윤동주 고향 아주머니가 들려주는 “명동학교와 윤동주 생가”

2014.09.30 08:52:47

[만주에서 찾아보는 배달겨레의 혼 6]

[우리문화신문 =  중국 연길 이윤옥 기자]   “젊은이들은 모두 돈 벌러 한국으로 나갔지요. 약자(弱子)와 노인 분들만 남았어요. 저도 나가지 못해 남았지만 지금은 살만해요. 돈 벌러 나간 조선족들 땅을 제가 다 맡아서 농사도 짓고 한족에게 빌려주기도 해서 이제는 걱정 없이 살지요


  
▲연변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에 있는  윤동주 시인 생가, 왼쪽이 대문이고  돌비석은 담장으로 꾸며져 있다.

 

  
             ▲1993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해 놓은 생가
 

  

▲생가에는 작은 방이 두어개 있는데 입구 방에 초라한 모습으로 이렇게 꾸며져 있다. 올해로 69주기다.


어제 29일 용정시 지신향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를 찾아갔을 때 “윤동주생가”는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용정시내에서 택시로 30분 거리인 윤동주생가는 왕복 60위안을 주고 전세 낸 택시로 갔는데 생가에 도착해보니 그만 나무 대문이 잠겨있는 것이었다. 대문 앞에서 서성이다 보니 대문 한켠에 관리인 전화번호가 적혀 있기에 전화를 거니 밭에서 일하다가 나왔다며 단숨에 아주머니가 한 분 달려 나왔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아래 보이는 집이 생가이며 집 앞에는 너른 들판이 있고 멀리 산이 있는 이곳에서 윤동주 시인은 태어났다.

 

  

 ▲현재 생가(아래쪽에서 입구를 향해 찍은 모습)는 군데군데 기념시비를 세워두어 공원 같은 느낌이다.


  

▲100여년이 넘은 명동교회 건물, 이곳이 임시 윤동주 기념관인데 내용이 부실하다. 사진은 서순금 관리인(왼쪽)과 도다이쿠코 작가


한 사람 당 10위안을 내고 대문 안으로 들어 서니 바로 윤동주 외삼촌인 김약연 선생이 활약하던 명동교회 건물이 눈앞에 들어온다. 지은 지 100여년 넘었으니 안과 밖이 매우 낡았고 현재 윤동주 전시관으로 쓰고 있지만 전시물이 엉성하고 조잡했다. 명동교회 건물 아래로 윤동주 생가가 보이고 군데군데 돌로 만든 시비가 서있었다.   

 

“이제 얼마 있으면 저 아래 전시관으로 모두 옮길 거래요. 그런데 언제 할지는 모르지요” 관리인 아주머니 서순금(55살) 씨는 매우 활달한 분으로 먼 곳에서 찾아간 우리를 마치 시누이라도 되는 양 살갑게 윤동주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윤동주가 태어난 명동촌 마을은 앞이 훤히 트인 곳으로 끝없는 논밭이 이어져 있었고 더 멀리는 약간 경사진 구릉지였다. 이 마을은 조선 회룡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삼합진과 지신진 두 개의 지역의 경계지역으로 용정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명동(明東)이란 이름은 “조선을 밝게 하자”는 뜻으로 1881년 청나라 정부에서 연변에 대한 통금령을 해제한 뒤 조선이주민들이 정착한 마을이다. 1899년 김약연을 중심으로 한 전주 김씨 31명, 김하규를 중심으로 한 김해김씨 63명, 문병규를 중심으로 한 문씨 가문 40명, 남종구씨 외 7명과 토지 구입 등으로 먼저 와 있던 김항덕 씨 등 모두 142명이 초기에 정착하여 조선족 마을로 형성된 곳이다. 이곳에 윤동주의 할아버지인 윤하연 일가 18명이 정착하게 되어 윤동주는 이 시골마을에서 태어나게 된다.


  
     ▲윤동주 생가에서 100여미터 거리에 있는 민족정신을 구현하던 명동학교 옛터 표지석

 

  

    ▲명동학교는 1911년 여학부를 설치하고 연변에서 처음으로 근대여자교육을 했다.



  

 ▲명동학교 표지석 곁에 세워놓은 옛 명동학교 재현 건물은 전시관으로 활용될 예정이나 현재는 일부전시관만 만들어져 있고 아직 내부 공사 중이다.



  

    ▲명동학교의 역사를 꾸며놓은 내부 전시관 일부



당시 명동촌을 일군 사람들은 구한말 조선의 실학파들로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글을 모르면 남에게 천시당한다”는 생각으로 자녀들 교육에 힘썼다. 그래서 초기에 이들은 집단으로 구입한 토지 가운데 양지바르고 좋은 땅의 10분의 1을 학교부지로 내놓아 이곳에 명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명동학교는 1906년 용정에 설립되었던 서전서숙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1908년 4월 27일 명동촌 일대 여러 서당들을 통합하여 세운 근대 민족적 교육기관이다. 명동학교는 조선족 청소년들에게 근대지식의 전수와 더불어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교육시켜 그들로 하여금 문무를 겸비한 우수한 민족의 인재로 성장하게 한 밑거름이 된 학교다.


이 무렵 연변 각지에는 연변을 항일기지로 삼고자 각 곳에 사립학교를 세우게 되는데 창동학원, 정동중학, 길동학교 등이 당시 연변지역의 명망 높은 항일학교였다. 그러나 1907년 일제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용정에 조선통감부간도파출소를 두어 당시 용정 일대에 많은 조선인 학교들을 감시하고 폐교 시키는 일을 자행했다. 서전서숙 등 당시 민족교육에 힘쓰던 학교들이 속속들이 폐교하는 운명을 맞이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이후 명동촌은 간도국민회건립 이후 남부총회의 본부가 되었으며 명동학교는 총회본부사무실로 활용하였다. 총회에서는 <독립신문>. <우리들의 편지>를 발간하였고 <청년>, <자유의 종>등의 신문도 만들어 민중들에게 항일 민족 사상을 드높이게 하였다.


 이러한 배경의 항일민족 정신의 고향인 용정 명동촌에서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태어났고 이곳 명동촌 소학교를 나왔다. 윤동주생가를 관리하는 서순금 씨는 이곳 명동촌에서 태어나 윤동주 생가를 보아온 사람으로 “윤동주 시인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는 몰랐지요. 윤동주 할아버지가 장로였으므로 윤 장로 집으로만 알았어요. 윤동주 아버지는 한때 이 집과 논밭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시내로 나가서 양계장도 하고, 나무묘묙 장사를 거쳐 출판사를 했는데 모두 망해 결국 이 집이 다름 사람에게 넘어 간 것이지요. 이 집을 산 사람도 나중에는 집을 떠나 이 집이 허물어 진 것입니다.” 라며 소상하게 윤동주 생가와 명동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1▲919년 3월 13일 항일운동으로 희생된 학생들의 무덤으로 용정에서 명동촌으로 들어가는 중간 지점에 있다.



현재 복원해 놓은 윤동주생가는 1981년 무렵 허물어지게 된 것을 1993년 용정시에서 관광지역으로 지정하여 복원해 놓았다. 윤동주 생가에서 100여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명동학교는 당시 무수한 민족해방운동가, 항일투사와 학자, 문인을 배출한 곳으로 북간도의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김약연 선생이 명동촌에 정착한 이래 아리랑의 라운규, 문익환 목사,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이자 시인인 송몽규, 독립운동가 리동휘 선생 등의 발자취가 남은 곳이다.


 현재 명동학교가 있던 자리에는 돌비석이 서있으며 새로 명동학교 모습을 재현 놓은 건물이 들어서 있다. 내부에는 일부 전시관만 만든 상태로 아직 교실 재현 등의 공사는 더 해야 개관한다고 한다. 2001년 조선족 출신 작가가 쓴 <유서 깊은 명동촌> 이란 책에는 “7개의 자연부락으로 150 호에 500여명의 사람이 살고 있으며 남성이 270명, 여성이 230명이다. 농사를 주로 하며 담배가 주 작물이다. 명동촌에는 소가 160마리, 돼지 60여 마리, 닭 1천여마리를 기르고 있다(1999년 통계)”라는 기록이 있으나 윤동주생가 관리인 서순금 씨는 현재 이 마을에는 40여호만 남고 모두 한국 등지로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이 조금 설렁해 보였다.


 윤동주 생가를 찾은 시각은 오후 3시 무렵이었으나 날씨가 흐린데다가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고 기온이 뚝 떨어져 몹시 추위를 느끼게 했다. 서둘러 덜덜거리는 택시를 타고 용정 시내로 나오는 길 들판에는 누런 벼가 익어 가고 있었고 먼 산에는 하나둘 단풍이 들고 있었다. “마을마다 진달래요, 고을마다 항일운동유적비”라는 일컬어지는 연변지역은 이곳 용정의 윤동주 생가 가는 길목에도 군데군데 항일기념탑과 돌비석이 서 있었다.


특히 이곳에는 “3.13 독립운동”이라 불리는 1919년 3월 13일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 희생자들의 무덤이 있어 들려보았는데 어린 학생들이 먼 이역 땅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부르다 숨져갔다는 것이 가슴 뭉클하다. 잠시 묵념을 하고 돌아서는 내내 가슴이 아프고 저려왔는데 차창으로 펼쳐지는 먼 발치의 해란강 만은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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