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만리 외 6인 언문 반포 반대 상소의 진실

2015.03.11 18:02:45

[한국문화신문 = 김슬옹 교수]  최만리[?-1445]를 대표로 하는 집현전 일부 학사들의 집단 상소는 정확히 1444220(이하 음력)에 올려졌다. 훈민정음 창제가 144312(정확한 날짜 모름)에 공개되었으므로 짧게는 20, 많게는 세 달쯤 뒤의 일이다. 같은 달 216, 세종이 최항과 박팽년 등에게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게 한 지 나흘 뒤의 일이었다. 

이 상소문으로 세종과 최만리는 명논쟁을 역사에 남기게 된다. 상소문과 논쟁 과정이 고스란히 세종실록에 실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세종은 막판에 화를 참지 못하고 7명을 옥에 가두는 실수를 하게 된다. 그것을 후회해서인지 하루 만에 풀어 주었지만 끝내 정창손은 파직을 당하고 김문은 더 심한 옥고를 치르게 된다.  

흔히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반대했다고 하지만 이때는 이미 창제한 뒤이므로 반포를 반대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최만리는 비록 훈민정음 보급을 반대했는데 그의 반대 상소 덕에 창제 배경과 과정에 얽힌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있었다.  

세종과 세종을 지지한 정음학자들은 이 상소 덕에 반대 쪽 사람들의 생각을 제대로 알게 되었고 새 문자 해설서를 더욱 잘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토론 내용이 실록에 고스란히 남게 되어 새 문자 창제 동기와 과정 등을 후손들이 잘 알게 되었다.  

최만리는 당대 최고의 학자이면서 청백리였음에도 상소문만으로 오늘날의 마녀사냥과 같은 부정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다면 거꾸로 비판이나 비난의 근거나 되는 상소문의 맥락을 제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내친 김에 이 상소문은 당시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 공 외 6(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의 연합 상소임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상소문은 이 해의 연도에 따라 갑자상소라 부르기로 한다 

 

   
▲ 최만리와 집현전 학사 6명은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그림 이무성 한국화가)

결국 갑자 상소문은 다양한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지닌 복합 문헌이다. 이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상소문의 맥락적 의미를 제대로 드러내 주는 전략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이 상소문 덕에 밝혀진 역사적 사실을 몇 가지로 분석해 보기로 한다. 갑자상소는 14431230일자에 요약식으로 간결하게 기술된 엄청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를 풍부하게 해 준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한자에 관한 것과 우리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간결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_세종실록 102권 즉위 251230 

첫 번째는 훈민정음 세종 친제설을 명확히 해 주고 있다. 상소문에 첫머리에서 언문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새 문자를 창조하시는데 지혜를 발휘하신 것은 전에 없이 뛰어난 것입니다.”라고 세종이 만든 언문이 신기할 정도로 뛰어남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상소의 다섯 번째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일에 언문을 어쩔 수 없이 만든 것이라 한다면, 이것은 풍속을 바꾸는 중대한 일이므로 마땅히 재상들과 함께 토론하되, 아래로는 모든 벼슬아치와 모든 백성들이 옳다고 해도 오히려 반포하는데 더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옵니다. 또한 옛날 제왕들이 해 온 일과 맞추어 따져 보아 어그러지지 않고 중국에 비추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먼 훗날의 성인이 보아도 의혹됨이 없는 연후라야 시행할 수 있는 것이옵니다.  

이제 넓게 여러 사람의 의논을 들어보지도 않고 갑자기 10여 명의 서리들에게 가르쳐 익히게 하며 또 옛날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운서(한자 발음 사전)를 경솔하게 고치고, 언문을 억지로 갖다 붙이고 기능공 수십 명을 모아 판각을 새겨 급하게 널리 반포하려 하시니, 이 세상 후대 사람들의 공정한 의논으로 보아 어떻겠습니까 

위 내용을 보면 공동 창제로 볼 만한 내용이 없는데다 세종이 비밀리에 혼자 추진했음을 보여준다. 그간 국어학계와 역사학계에서는 세종친제설과 집현전 학사들과의 공동 창제설로 오랜 세월 논쟁을 벌여 왔는데 갑자상소문에 그 답이 이미 다 들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언문 창제 사실을 알린 뒤에는 반포 작업을 과감하게 속전속결로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 1444216, 언문을 반포하기도 전에 운회 번역을 시켰다는 것은 새 문자에 대한 자신감인 동시에 반포를 위한 임상실험을 서둘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거기다가 아예 하급 관리들을 가르쳐 가능한 빨리 새 문자가 퍼지기 위한 치밀한 전략을 쓴 듯하다. 하급 관리들은 행정 언어로 이두를 많이 썼고 그 이두의 불편함과 비효율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 문자 보급이 시급했던 것이다. 또한 갑자상소문에서 언급한 다음 내용도 세종이 언문 반포를 위해 얼마나 총력을 기울였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이번 청주 약수터로 행차하시는데 흉년인 것을 특별히 염려하시어 호종하는 모든 일을 힘써 간략하게 하셨으므로 전일에 비교하오면 108, 9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 보고해야 할 업무까지도 의정부에 맡기시면서, 언문 같은 것은 나라에서 꼭 제 기한 안에 시급하게 마쳐야 할 일도 아니온데, 어찌 이것만은 임시 처소에서 서둘러 만듦으로써 전하의 몸조리에 번거롭게 하시나이까. 신등은 그 옳음을 더욱 알지 못하겠나이다. 

세종이 각종 질환으로 병상에 누운 것은 1436(세종18)으로 세자인 이향(문종)의 나이 23세 때였다. 이듬해 세종은 세자에게 서무(庶務)를 결재하게 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였지만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1년 전인 1442년 세자가 섭정하는 데 필요한 기관인 첨사원(詹事院)을 설치하여 국가의 중대사를 제외한 서무는 모두 세자에게 결재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하여 왕의 권한을 대폭 의정부에 이양하게 된다. 이렇게 한 것은 건강 탓도 있었지만 훈민정음 반포를 위한 연구에 몰입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던 듯하다. 이러한 숨 가쁜 역사의 맥락이 갑자상소로 인해 드러난 것이다. 

셋째, 언문이 다목적용으로 만들어졌음을 잘 보여 준다. 하급 관리를 가르쳤다는 것은 하층민과의 문서를 통한 소통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고 운회를 번역하게 한 것은 표준 한자음을 적기 위한 새 문자의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넷째, 갑자 상소로 인해 반포를 위한 해례본 집필과 보완이 훨씬 늦추어졌을 것임을 알 수 있다. 판각수 장인들 수십 명이 반포를 위해 판각하려던 것은 아마도 해례본이 아니라 세종이 직접 쓴 예의편(정음편)이었을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 반포하려다 사대부들을 제대로 설득하기 위해 예의편 반포 대신 해례본 반포를 택한 듯싶다. 결국 갑자상소 문제제기 덕에 해례부분 집필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반포가 늦추어졌을 것이다.  

다섯째, 갑자상소의 영향으로 세종 어제 서문을 대폭 보완하고 상세하게 설명한 정인지 서문이 기술되었을 것이다.  

여섯째, 세종이 한글 창제 사실을 공표한 뒤 다각적으로 사대부들을 설득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144312월부터 14442월까지 세종실록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아마도 승정원 일기에는 있었을 터인데 이 기록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오나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죄인을 심문하거나 심의를 해주는 사이에 억울하게 원한을 품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가령 우리나라로 말하더라도 옥에 갇혀 있는 죄수로서 이두를 아는 자가 직접 공술문을 읽고서 그것이 거짓인 줄을 알면서도 매를 견디지 못하여 거짓말로 자복하는 자가 많사옵니다. 이런 경우는 공술문의 뜻을 알지 못해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비록 언문을 쓴다 할지라도 이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범죄사건을 공평히 처결하고 못하는 것은 법을 맡은 관리가 어떤가에 달려있으며 말과 글이 같고 같지 않은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언문을 사용해야 처결 문건을 공평하게 할 수 있다는데 대해서는 신 등은 그것이 옳다고 보지 않사옵니다. 

갑자상소의 이 기록은 세종실록에는 없는 기록이라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일부에서 언문이 한자음을 적기 위해 창제되었다고 주장하지만 한자음 적기보다 더 중요한 창제 동기와 목적이 있음이 이 기록을 통해 드러난다. 하층민과의 소통 문제가 매우 중요한 창제 동기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내용은 세종 서문에도 반영되어 있다.  

세종은 사대부들을 설득하기 위한 또 다른 전략으로 성리학적 철학을 상세하게 기술하여 새 문자에 대한 논리적 근거와 방어 논리를 대폭 강화했고 그것이 해례본 해례 부분에 실려 있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보강하느라 반포가 크게 늦춰졌을 것이다. 세종은 성리학적 세계관과 성리학적 음운학의 배경으로 해레본을 아주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기술하였다.

 

김슬옹 교수 tomul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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