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말 한양 도성의 현황 들어보기

  • 등록 2016.04.20 06: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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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일본 공사관 터와 서울의 분뇨체계 두 논문 발표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서울과 역사』 93호에 수록될 연구논문발표회를 2016년 4월 21일(목)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서울역사편찬원 강의실에서 진행된다.

‘19세기말 서교(西郊)에서 부감(俯瞰)한 한양 도성도[漢城遠望之圖]의 내용과 성격’은 19세기말 한양 도성의 서부 지역에 위치하였던 일본 공사관 소속의 인물이 묘사한 회화식 지도의 표현을 역사 기록과 비교해 설명하였다. 지도에 묘사된 공간과 건물들이 지니는 역사성과 시대상을 찾아봄으로써 19세기말 한양 도성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발표문에서 밝히는 지도는 도성의 성문들과 성저 촌락, 주요 관서들과 도로망, 도성의 성벽들과 산성으로 이어지는 구역 등 당시 한양 도성의 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지도는 외국인의 시각에서 바라보았다는 것도 이색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주요 포인트의 명칭을 기재하고 있어서 사실감을 높이고 있다. 따라서 이 자료가 지니는 정보를 분석한다면 19세기말 한양 도성의 존재 양상을 입체적으로 규명하는 연구가 되리라 본다.

‘서울시 분뇨수거체계의 형성과 변화’ 발표문은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는 20세기 전반까지 똥오줌은 단순한 오물이 아니라 거름이라는 자원이었으므로 때로는 그 처분에서 수익이 발생했고, 이 수익과 비용의 분배의 방향은 시기별로 복잡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자료사진

이 발표문에서 밝힌 바는 다음과 같다. 수거한 똥오줌은 광희문밖 신당리와 마포의 처분장에 모았다가 비료회사나 농장, 개별 농민에게 판매했다. 전반적으로 거름으로서 똥오줌에 대한 수요가 일본 대도시만큼 높지 않아 늘 처분장의 똥오줌 적체가 문제였고, 화학비료의 도입, 위생(콜레라, 기생충) 문제 등으로 후기로 가면서 똥오줌의 거름으로서의 가치는 하락했다는 점도 밝혔다.

또한 똥오줌 수거가 제대로 안 되는 문제, 똥오줌처분장 때문에 인근 주민들이 받는 피해, 비료회사에 대한 특혜와 경성부의 뇌물수수 시비, 그리고 1935년 똥오줌 수거수수료 도입 등은 식민지기 내내 경성부의 시끄러운 문제였다고 밝혔다.

전수희 기자 rhsls6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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