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윤지영 기자] “우리들 몸이 없어진 뒤의 일은 단지 청렴 렴(廉)자 하나를 지키는 일입니다. 검소를 숭상하고 사치를 억제하는 것이 정치에 있어 먼저 할 일입니다. ”
청백리의 표상 방촌 황희 선생(1363~1452)의 유적지 내 기념관 안에 들어서면 바로 눈 앞에 황희 선생의 어록이 눈을 사로잡는다. 자유로를 달리다 문산 (당동) 인터체인지로 빠져나가 왼쪽으로 200여 미터 달려 사목리에 이르면 방촌 황희 선생유적지가 나타난다.
황희 선생 유적지 안에 들어서면 임진강변에 우뚝 솟은 반구정(伴鷗亭)이 눈에 띄는데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하며 여생을 보낸 곳이다. 잘 가꿔진 유적지 경내는 한눈에 봐도 단정해 보였지만 찜통더위 탓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냉방이 잘되어 있는 기념관으로 몰렸다.
황희 선생은 조선 초기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노력한 유능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전형으로,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재상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고려 말에 벼슬을 시작하였으나 고려가 폐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태조의 요청과 백성만이라도 구제해야 한다는 동료들의 천거로 다시 벼슬에 나가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잡는데 힘썼다.
성품이 강직·청렴했으며, 사리에 밝고 정사에 능해 역대 왕들의 신임을 받았지만 때로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왕과 다른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좌천과 파직을 거듭했다. 현실적으로 불합리하거나 중복·누락된 부분이 있던 <경제육전>을 온전한 법률집으로 만드는 등 법전의 정비에 힘썼으며, 농업생산력 발전을 위해 농사의 개량과 종자 보급을 실행했다. 세종대에는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등 세종을 도와 성세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곳에서 문화해설을 하는 권효숙 해설사는 “가족단위로 기념관을 찾는 분들이 꽤 많다. 주변에 매운탕집도 있고해서 이쪽으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은 거의 황희선생 유적지를 들리는 것 같다. 청백리 가운데 으뜸인 황희 선생 유적지를 둘러보며 이 시대의 청렴을 다시 되새겨 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본다. ”고 했다.
또한 조윤현(서울 양평동) 씨는 방학을 맞아 초등학생들과 임진각에 들렀다가 황희 선생 유적지에 들렀다면서 “아이들에게 공직자로서 황희 선생의 청렴결백한 정신을 알리고 본받게 하는 일은 매주 중요하다고 본다. 와서 보길 잘했다”고 했다.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처마가 넓으니 바람이 통하기 쉽네
큰 나무는 땅에 그늘을 만들고
먼 산 봉우리는 푸르게 하늘을 쓰는 것 같네”
이는 경내에 있는 방촌 황희 선생 동상 좌대에 새겨진 글로 1423년(세종 5) 감사 재직 시에 남긴 말이다. 높은 관직자리에서 얼마든지 부를 축적 할 수 있었겠지만 청렴을 삶의 가장 큰 가치로 삼고 이를 실천한 황희 선생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부를 탐하다가 패가 망신하는 요즘 몇몇 공직자들을 떠 올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