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세다대학, 독립운동가 김상덕 선생이 공부한 곳

2016.08.25 08:06:35

도쿄 와세다 대학 교정에서 의자에 앉아 독립운동과 친일에 대해 생각하다

[우리문화신문= 도쿄 이윤옥 기자]


여기일까 아님 저기였을까

츠보우치 연극관으로 가는

좁은 길목

나무 의자에 앉아

교정을 거닐었을 선배들을 그려본다


나라 잃은 몸으로

적국인 이 땅에서

고이 품은 꿈을

펼치려했던 이들


더러는 거목으로 우뚝 섰지만

더러는 춘원처럼

이름을 욕되게 했던 곳


무더워

매미도 울지 않고

바람 한 점 없는

한여름


니시와세다 교정엔 적막만이

강물처럼 흐른다. -와세다 교정에서 ‘이한꽃’-


한여름 무더위 속, 여름방학이라서 그런지 와세다대학 교정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23일(수) 오전 9시, 캠퍼스를 일찍 찾은 탓도 있지만 평소 같으면 학생들로 북적 거릴 교정은 텅 빈 채 청소하는 아저씨들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본의 사립대학 가운데 명문으로 일컬어지는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은 과거 한국에서 조도전(早稲田)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초창기 '조도전(早稲田)' 은 낱말 그대로 벼농사를 짓던 논이 즐비하던 땅이다. 때는 1882년 (명치 15년), 일본의 근대화가 한창이던 이 시기에 일본은 서구의 대학을 시찰하고 곧바로 미래의 일본을 책임질 젊은이들을 교육 시킬 책무를 느끼고 대학 설립의 길로 들어선다.


와세다도 그런 이념으로 설립된 대학으로 초기에 동경전문대학(東京専門学校)을 인수하여 와세다대학으로 키웠다. 와세다대학은 2016년 현재 13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실상부한 사립대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이야 외국대학에 유학 가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지만 1910년대만 해도 외국유학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17년, 이 캠퍼스를 드나들었던 사람 가운데 한 분이 광복 후 반민특위 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친일청산을 꾀했던 김상덕 (1891~1951)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7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뒤 1919년 2월 2·8 독립선언에 참가했다가 일제에 체포ㆍ구금되는 일을 겪는다.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중퇴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의 길을 걷기 위해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으로 평생을 바쳤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와세다대학을 드나든 또 한사람이 있었으니 춘원 이광수(1892~1950)다. 이광수는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본과 철학과에 입학하여 소설가의 길을 걸으며 초창기에는 2·8 독립 선언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에 관여했으나 훗날 변절의 길을 걷는다. 이광수의 변절을 말해주는 적극적인 창씨개명에 대한 주장은 그가 살아온 인생 후반부의 삶을 잘 대변해준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한 동기는 황송한 말슴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내선일체를 국가(일본)가 조선인에게 허하였다. 이에 내선일체운동을 할 자는 기실 조선인이다. 조선인이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될 것 밖에 바랄 것이 무엇이 있는가. 따라서 차별을 제거하기 위하여서 온갖 노력을 할 것밖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또 있는가. 성명 3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의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했다." -1940년 2월 20일 매일신보, 이광수〈창씨와 나〉-


춘원에 대한 긴 이야기가 필요 없는 대목이다. 나는 텅빈 와세다대학 교정의 낡은 나무의자에 앉았다. 요 며칠 도쿄를 강타한 태풍의 상륙으로 매미들도 숨을 고르는지 캠퍼스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매미들의 후각은 아직 때가 아닌 듯 울지 않는다.


고요한 캠퍼스에서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고 외친 춘원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독립투사 김상덕 선생을 떠올렸다. 같은 물이라도 젖소가 먹으면 '우유'를 만들지만 독사가 먹으면 '독'을 뿜듯, 같은 캠퍼스에서 빼앗긴 조국의 슬픈 자화상을 가슴에 새겼던 두 조선의 청년이 걸은 길이 어쩜 이다지도 다를 수 있는지 콘크리트열로 달궈진 캠퍼스 의자에 앉아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한 통의 편지를 떠올렸다.


"하늘이 허락하는 천수에 가까워가면서도 저는 어머니 품을 그지없이 그리워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릴 적 민혁당 대가족이 모여 사는 손가화원에서 누구보다도 힘들게 어린 생명을 부지해야 했던 우리 남매는 어머니의 품이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어머니 가신지 채 한 해도 버티지 못하고 막내 영이가 따라간 것도 이 탓입니다. 막내를 애장하고 돌아온 아버지께서 그길로 기약할 수 없는 어린 남매를 지키기 위해 고아원에 맡겨버리는 바람에 저는 영이의 어린 영혼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티 없이 자란 영이는 아마도 어머니 곁으로 갔다고 봅니다. 짧게 세상에 머물다 굶주려갔으니 어머니! 잘 보듬어 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김상덕 독립투사의 아드님인 김정륙(81세) 선생이 돌아가신 어머님께 쓴 편지글 가운데 일부이다. 독립운동을 위해 어린 남매를 고아원에 맡겨야 했던 그 심정을 지금의 우리가 어찌 헤아릴 수 있느냐만 이는 독립운동가 가족사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숭고한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변절자의 이름을 함께 거론할 수 있느냐고 따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다. 함께 거론하기도 껄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오늘도 와세다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후학들은 이 두 사람이 걸은 길을 새겨보았으면 하는 생각에 두 사람의 이름을 들어 보았다. 우리가 하는 작은 몸짓, 생각, 행동 하나가 훗날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을 하면서 와세다대학 교정을 나왔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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