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명문이 새겨진 고려 무신 김선치의 벼루

  • 등록 2017.06.12 11: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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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4호

[우리문화신문= 전수희 기자]



이 벼루는 14세기 벼루로서 시대가 확실한 명문을 가지고 있으며, 고려의 문인이자 무신인 벼루의 주인공 김선치의 12세때 자서명이 음각된 벼루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김선치 (1318(충숙왕 5)∼1398(태조 7))  선생은 1359년(공민왕 8)에 도원수 이암(李嵒)을 따라 홍건적을 막으러 서경에 갔을 때 이암이 서경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창고를 불태우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창고를 불태우면 적이 식량을 얻기 위해 오히려 전국에 침입할 것이니 옳은 계책이 아니라고 반대해 이를 중지시켰다.


1363년에 홍건적을 평정시킨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어 그 형상이 벽상(壁上)에 그려졌고,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었다. 뒤 이어 이부시랑이 되어 양광도(楊廣道)를 안찰(按察)하였다.


그 때 재상이 남경(南京)의 궁궐을 헐어 백악(白岳)으로 옮기려 하자, 왕에게 “전날 남경을 지을 때 사람과 짐승을 괴롭혔는데, 이제 다시 헐면 백성들이 실망할 것입니다.”라고 의견을 밝혀 왕이 놀라 그 일을 중지시켰다.


1363년(공민왕 12)에 난이 평정되자 1등 공신이 되었고 이부시랑()으로 양광도()를 안무()했다. 그 후 계림부윤()으로 오래 해결을 보지 못한 강도 사건을 처리하여 1백여 명의 연루자를 석방, 상성군()에 봉해졌다.


 1762년에 이 벼루가 발견될 당시 함창현감이 제작케 한 벼루집은 목질이나 양식이 당대의 것으로 인정된다. 특히, 이 벼루를 두고 조선시대 당시의 문사( 文士) 30여명이 가(記), 시(詩), 가(歌), 행(行) 등으로 찬양하고 있어 그 정신문화적 가치는 매우 높다 .


<자료: 문화재청>

전수희 기자 rhsls6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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