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립고궁박물관에는 고종 어진과 초상 사진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어진은 임금의 명에 의해 엄격한 절차와 형식, 특별히 뽑힌 화원에 의해 그려졌습니다. 《성종실록》에는 어느 일본인이 그린 세조의 초상화를 두고 신숙주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신하와 백성이 임금의 어진을 만들지 못하며 어긴 사람은 중죄를 받는다.”라고 한 부분이 있습니다.
임금의 모습은 함부로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이었고, 형상화된 어진은 살아있는 임금과 다름없는 위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궁에 드나드는 수많은 신하들도 임금의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고, 임금의 초상인 어진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임금의 얼굴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궁내 출입인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초상 사진으로 신문, 인쇄물, 그리고 인화된 사진을 주변에 내려줌으로써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황실 가족들도 사진을 통해서 드러냈습니다.
조선 말,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쇄국정책을 펼쳐왔던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1873년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나라의 정통성 확보와 존속을 위해 고심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안으로는 왕실의 진전(眞殿, 어진을 봉안하는 곳)과 어진의 재정비 작업을 명하여 태조와 열성조의 어진을 그리고, 자신의 어진과 황태자인 순종의 어진도 만듭니다.
또한, 고종은 근대적 개혁을 주장하는 개화파와 함께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주 독립국임을 만천하에 알립니다.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등 세계 각국과 조약을 맺고, 나라밖에 사절단을 보내 선진국의 제도와 문물을 배우게 했습니다. 이 때 고종은 사진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고종이 처음 초상 사진을 찍은 것은 1880년대 전후로 추정됩니다. 보스턴 미술관(Boston Museum of Fine Arts)에 소장되어 있는 고종의 초상 사진은 1884년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윤치호 일기》 1884년 3월 10일과 13일자에 따르면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과 지운영이 고종 그리고 왕세자의 사진을 찍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고종이 사진을 찍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진은 어진과 달리 원할 때마다 수량을 늘려 복제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외교 관례에 따라 서양을 비롯한 다른 나라와의 조약이나 국제관계 형성에 국가원수의 사진을 교환하기도 하고, 왕실에 초청된 외국인이나 여행자에게 자신의 사진을 내려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신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자신의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임으로써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실천하는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사진을 이용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진을 나라의 독립과 개화에 이용했던 고종의 계획은 오래지 않아 무산되고 맙니다. 1907년 강제 퇴위 이후 일본은, 고종과 황실 관련 사진을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활용한 것입니다.
사진의 촬영과 관리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면서 인쇄물과 각종신문에 실리는 고종과 순종의 초상 사진, 그리고 황실의 사진들은 상대적으로 조선의 이미지를 왜곡하는데 활용됩니다. 일본의 황태자와 찍은 사진에서 자세나 위치를 일본인이 더 부각되게 촬영한다던가, 영친왕과 이완용내각의 단체사진에서 오른쪽 한편의 고종을 의도적으로 지워서 인쇄물에 싣는다던가 하는 행태입니다. (본문에 실린 사진은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고종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경우이지만, 「한미정변사」 내에 실린 사진에서는 의도적으로 고종의 이미지를 지운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황실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내의 일상적인 풍경과 일반 국민들의 사진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편집하고 여러 매체를 통해 공개하며 대외적으로 조선의 이미지를 조작했습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세상을 떴습니다. 고종의 국장의식은 일본식 장례절차에 의해 진행되었고, 그 모습은 《덕수궁 국장화첩(德壽宮 國葬畵帖)》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처음 사진기 앞에 나선 조선의 국왕이자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한 황제 고종, 나라를 위한 외교적 교류에 자신의 모습을 활용하고 드러내는데 앞장섰던 고종, 그러나 시대적 상황은 고종을 뒤안길로 밀어내고, 사진 속의 모습처럼 먼발치의 쓸쓸한 모습으로 남겼습니다.
처음 사진기 앞에 선 고종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선대로부터 이어져오던 숨겨진 임금의 모습을 드러낼 만큼 나라를 생각하는 고종의 마음은 절실했을 것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 제공(정희원, 유물과학과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