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가마스 짜던 이야기

2019.04.20 10:31:50

[엄마가 들려준 엄마의 이야기 9]

[우리문화신문=김영자 작가]  해방을 맞은 뒤 얼마 안 되어 마을에는 호조조*가 건립되었고 남편 없는 엄마는 그래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었다 한다.

 

마을사람들은 늘 “저 불로집댁은 남성들과 짝지지 안아유, 수레몰기, 후치질*, 씨앗두기…… 머나 다 잘 한다니깐…”하고 칭찬들 하셨단다. 정말이지 검은치마에 흰저고리, 혹은 검은 몸베에 흰저고리를 입고 허리끈을 질끈 동이고 흰머리수건을 쓰신 엄마는 궂은일 힘든 일터에서 늘 쉽게 볼 수 있었다 한다. 집체로 일하여서 아버지 없는 우리집도 농사일을 쉽게 할 수 있었다 하더구나!

 

이렇게 살아가던 그때 마을의 한 청년이 외지에 갔다가 우연히 가마스(가마니) 짜는 부업일을 배워가지고 돌아와서 “아주머니, 내 돈버는 부업을 배워 왔는데 해봅소.”하더란다.

 

돈 번다는 소리에 마음이 확 쏠려 엄마는 “하지유, 몇 전이라도 해야지, 당장 큰애가 고중에 가겠는데……”. 하여 엄마는 마을의 다른 한 엄마와 함께 그 청년의 지도하에 가마스틀을 만들고 마을에서 첫 사람으로 누구도 해보지 못한 가마스라는 걸 짜보았단다. 그런데 새끼줄도 가쭌하게* 꼬지 못하여 가마스를 짤 때 가마스바디가 잘 오르내리지 못하였단다.

 

두 과부 엄마들은 마주앉아 그만 새끼줄에 아껴먹는 콩기름까지 바르고 짜보았단다. 글쎄 기름이 얼마나 귀했다구…… 이때 그 청년이 다시 알려 주어서야 엄마는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는구나! 이렇게 몇 번이고 련습해서야 겨우 짜는 요령도 알 수 있어 후일 오빠의 숙사비용 매달 8,00원*도 보내줄 수 있었다한다.

 

엄마는 이렇게 낮에는 호조조*, 인민공사의 밭일에 나가시고 밤이면 가마스짜기에 전념하셨단다. 하지만 아직 철 안든 둘째오빠와 나는 “엄마니깐,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로만 알았단다.

 

어느 하루였단다. 그날도 둘째오빠와 엄마가 손틀에서 가마스를 짜고 나는 옆에서 새끼줄을 꼬느라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을 비벼대고 있었단다. 우린 그때 모두 소학교 다닐 때였단다. 이때 우리집 앞 집체* 탈곡장 마당에서 아이들이 뽈 차는 소리, 녀자애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단다.

 

 

내가 먼저 안절부절 못하는데 오빠가 불쑥 “엄마, 나뚜 쬬꼼만 놀았으면, 뽈 차고 올까?……” 엄마는 “안 돼, 래일 가마스를 팔아야 너희 형 식비 보내지? ”하셨단다. 둘째오빠는 “야! 야! 넘겨라!”하고 들려오는 아이들 소리에 그만 혼나간 사람처럼 헛술질만 하더란다. 엄마가 “너 지금 정신이 어디 있니?”

 

“엄마, 나는 영 뽈 차고 싶어서……”

 

“오늘은 안 된다했잖니!…” 엄마 말이 채끝나기도전에 오빠는 가마스 짜던 술을 와락 당겨 가마스줄 십여 개를 끊어놓곤 헤~ 헤 웃으면서

 

“엄마, 줄 이습소. 그쌔루 내 좀 노꾸마!”하곤 문을 차고 냅다 뛰더구나!

엄마는 “이눔새끼……”하면서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있다가 “어유!”하고 한숨을 쉬곤 할 수없이 일어나 물동이를 이고 우물가로 가서 단숨에 물 몇 동이를 길어왔단다. 열 살도 안 되는 나는 까만 눈을 데록거리면서 무서워 꼼짝도 못하고 앉아서 새끼줄만 꼬았단다. 만일에 새끼줄마저 이어대지 못하면 더 큰 봉변을 당할까 두려웠단다. 엄마는 물독에 물을 채운 뒤 말없이 새끼줄을 다 이어놓은 후 오빠를 불렀지. 오빠는 헤헤 웃으며 들어왔는데 엄마는 다짜고짜로 볏짚을 쥐고 오빠의 볼기를 쳤단다.

 

“이눔 새끼야, 넌 언제면 철 들겠니? 넌 에미가 고생하는 게 보이지 않니? 돈 제때에 못 보내믄 네 형은 굶는단다.” 오빠는 난생처음 매를 맞고 눈물을 훔치곤 와락와락 번개처럼 술질하더란다. 한참 지나서 오빠는

 

“엄마, 다른 애들은 뽈을 차두 가네 엄마는 욕 안 하는데 엄만 너무 핫꾸마!”

“아직두 대답질이야? 그애들은 아버지가 있잖니?”

“이따 내가 크면 보깁소. 엄마 늙어서 힘없을 때 나두 가마스틀를 놓구 엄마를 욕하면서 요, 노덕년* 빨리 짜라구 하겠습꾸마, 두구 봅소……”

 

엄마는 너무도 어이가 없어 웃으시며 “내가 왜 너네 집에서 살겠니? 그리구 그때면 우리도 잘 살겠는데……”

“그럼 형님네 집에 가마스틀을 메구 가서 짜라구 을러메지……”

 

오빠는 그때 겨우 12-13살 정도였으니 엄마의 고통을 알리가 없었지……

엄마는 웃으시며 “크거들랑 맘대로 합소. 우리 둘째 도련님……”하여 오빠는 “히히”웃고 개선장군마냥 으쓱하더구나. 사르르 착착 가마스는 잘도 짜내려갔단다.

 

후일 우리가 어른이 되여 엄마 옆에 둘러앉아 엄마의 가마스 짜던 이야기를 꺼내면 교수이신 둘째오빠가 반성을 하여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단다. 그러면 과학원에 있는 큰오빠가 “모두 나 때문에 고생했지요.”하고 막내인 나도 “내가 너무 철부지여서 엄마를 돕지 못했다.” 하여 엄마는 “너희 언니두, 너희들두 모두 잘 자라주어서 고맙다.”고 하셨단다.

 

엄마가 없는 오늘에두 그제 날의 눈물겨운 이야기들은 영원히 우리 형제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어 가끔씩은 우리 형제들을 울리고 있단다.

 

(낱말풀이)

* 호조조(互助组) : 건국초기, 당시 농촌에서는 5~10호씩 결을 맺고 서로 도와 농사일을 하였다.

* 후치질 : 한여름 밭곡식 북 돋우는 농사일

* 가쭌하게 : 고르게

* 숙사비(宿舍费) 8.00 원 : 학교기숙사비. 당시 노동자 월급이 20~30원일 때 8원은 큰돈이었다.

* 집체(集体) : 집단. 건국초기, 당시 농촌 모든 일은 단체로 진행하였다.

* 노덕년 : 나이든 여인을 낮추어 부르는 말.

 

김영자 작가 15694331966@163.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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