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첫 재즈 곡 이난영 <다방의 푸른 꿈>

2019.05.07 12:27:12

[김상아ㆍ김민서의 음악편지 123]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한 나라의 문화수준은 특수한 몇몇 경우를 빼고 나면 대체적으로 국력과 궤를 같이하는데, 특수한 경우란 어느 한 민족의 고유문화가 선진문화에 영향을 끼치는 경우와 선진문물이 들어와 그 나라의 실정에 맞게 변화하고 발전하여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로 자리 잡는 것으로, 다방은 그 후자의 좋은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오늘은 이른 바 “70,80 세대”라 불리는 사람들이 청춘을 보냈던 음악다방을 회고하면서 다방이 흘러온 길을 따라가 본다.

 

차를 마시는 장소에 대한 기록은 ‘다연원(茶淵院)’이라 하여 통일신라 문헌에 이미 등장하고 있으니 천년이 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방(茶房)’이라는 용어는 고려 때의 기록에 나타나긴 하나 차를 마시는 곳은 아니고 차와 술, 과일 등을 관장하는 국가기관이었다 한다. 이 땅에서 차(茶)가 가장 많이 음용되던 시기는 요즘을 빼고 나면 고려 때이다.

 

이는 불교의 융성과 맞물려서 절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말미암아 차 문화는 된서리를 맞게 된다. 조선사회에서 맥이 끊기다시피 한 차가 역사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구한말 개화기 때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커피를 처음 맛보고 반하게 된다. 환궁한 뒤 커피 맛을 잊지 못한 황제는 차를 마시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하였다하니 근대식 다방의 효시라 할 수 있겠다.

 

한말 개화의 바람을 타고 홍차와 커피가 수입되면서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는 다방의 등장은 시간문제였다. 개항지인 인천에 세워진 대불호텔과 슈트워드호텔에 부속 다방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다방의 역사가 시작된다. 1902년에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Antoinette Sontag)이라는 여성이 서울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을 건립하면서 다방도 함께 문을 열었는데, 그 때부터 다방은 세포분열을 하여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게 된다.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끽다점(喫茶店)’이라 하여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다방 일색이었으나 1927년에 영화감독 이경손이 “카카듀"라는 다방을 개업하면서 조선인 다방의 시대를 열었다. 시인이자 건축가인 이상(李相)은 유별나게 다방에 애착을 보였는데, “식스 나인”을 시작으로 그가 손댔던 다방이 무려 4곳에 이른다.

 

1930년대 중반에는 음악 감상을 전문으로 하는 다방 몇 곳이 생겨났고 그것이 훗날 음악다방의 싹이 된다. 6.25전쟁 직후에는 전시장이나 모임장소가 턱 없이 부족하자 다방이 그 역할을 톡톡히 대신 하였다. 60년대부터는 다방의 규모도 커지고 얼굴마담과 레지 위주의 운영체제로 변모하게 된다. 전화가 귀하던 시절, 전화와 응접시설이 갖춰진 다방은 영세사업자에겐 훌륭한 사무실이기도 하였다.

 

70년대 들면서 음악다방시대가 열리는데, 60년대 종로통에서 음악 감상실 시대를 이끌었던 “디쉐네” “쎄씨봉” “메트로” 같은 음악 감상실들이 쇠락하자, 명동을 중심으로 음악다방들이 앞 다투어 생겨나 디제이 전성시대를 맞게 된다. 60년대 말에 문을 연 “청자” “심지”라는 이름의 음악다방들을 시작으로 속칭 “딸라골목”의 “예스” 라든가 “락”, 경음악 평론가 이백천의 “르시랑스”등이 그 전성시대를 주도하게 된다. 특히 심지다방의 주인 이종민은 “오비스 캐빈”이라는 공연업소를 열어 우리나라 청년문화 발전에 한 몫 하였다.

 

뒤이어 등장한 “싼타나” “피엘” “꽃다방” 역시 빼 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참고로 음악다방은 아니지만 미들급 세계 챔피언을 지낸 권투선수 김기수가 운영하던 “참피온”다방도 명동의 명소였다.

 

90년대 이후에는 “카페”와 “커피 숍”이라는 이름이 다방을 대신하게 되었지만, 한 잔의 차와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은 앞으로도 꾸준히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고요한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부른다

그리운 옛날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흘러간 꿈은 찾을 길 없어

연기를 따라 헤매는 마음

사랑은 가고 추억은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내뿜는 담배연기 끝에

희미한 옛 추억이 풀린다

 

조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 밤이 새롭다

조그만 찻집에서 만나던 그날 밤

목메어 부른다

그리운 그 밤을 부르누나 부르누나

서리에 시든 장미화러냐

시들은 사랑 쓰러진 그 밤

그대는 가고 나 혼자 슬퍼

블루스에 나는 운다

조우는 푸른 등불 아래

흘러간 그날 밤이 새롭다

 

                                - 이난영의 “다방의 푸른 꿈”

 

민족가수 이난영은 1916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어릴 적부터 갖은 고생을 하며 자랐다. 열여섯 되던 해에 제주도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중 공연을 온 “삼천가극단”을 찾아가 막간가수로 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삼천가극단이 일본 순회공연을 할 때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에게 발탁되어 데뷔하였는데, 열일곱 되던 33년의 일이다. 두 해 뒤에 발표된 “목포의 눈물”은 우리 겨레 대중가요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게 된다. 박향림, 장세정과 함께 “저고리 시스터즈”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니 우리나라 걸 그룹의 원조이기도 하다.

 

스무 살 때 천재 작곡가 김해송과 결혼하여 4남 3녀를 두었다.39년에 김해송은 아내를 위해 기념비적인 곡을 만들었는데,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블루스곡인 “다방의 푸른 꿈”이다.

코에 착착 감기는 이난영의 가성이 재즈의 분위기와 여성의 매력을 더해준다.

 

해방 직후에 남편과 함께 KPK악극단을 조직하여 주한미군 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6.25 전쟁 때 남편을 잃고 힘겹게 KPK악극단을 이끌다 후배가수 남인수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62년, 사실혼 관계에 있던 남인수 마저 세상을 떠나자 약물과 술에 기대어 살다가 65년에 그 굴곡진 삶을 내려놓고 우리들 곁을 떠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미어지는 이름이다.

 

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ccrks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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