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오늘날 한국 차문화계에서는 조선 말기 승려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을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부르는 관행이 거의 상식처럼 굳어져 있다. 각종 차 관련 서적과 행사, 언론에서도 ‘다성 초의’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이 과연 역사적ㆍ사상적으로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재검토가 필요하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다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해 왔으며, 차문화를 특정 인물의 성인화로 환원하는 관행이 오히려 한국 차문화의 본질적 흐름을 가린다고 보아왔다.
이 문제의식은 문화평론가 박정진의 "매월당 김시습을 다성으로"라는 논의와도 맞닿아 있다. 그는 한국 차문화의 상징 인물을 다시 묻는 과정에서, 초의 대신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차의 성인’에 더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후기 조선 중심의 통념적 서사를 넘어, 한국 차문화의 근원을 재사유하려는 문제 제기다.
먼저 짚어야 할 것은 ‘다성(茶聖)’이라는 개념이다. 중국에서 육우(陸羽)가 다성으로 불리는 것은 그의 저서 《다경(茶經)》을 통해 차를 하나의 문명사적 체계로 정립했기 때문이다. 곧 다성은 단순한 차 애호가가 아니라, 차문화를 사상과 문명의 차원에서 새롭게 규정한 인물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다산(茶山)과 추사(秋史) 그리고 초의 등 조선 후기의 여러 차인을 ‘다성’으로 호명하는 관행은 차문화의 역사성과 사상적 깊이를 인물 숭배로 단순화하는 오류를 낳는다.
초의 의순은 조선 후기 차문화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다산 정약용과의 교유, 《동다송》을 통한 차 담론의 확산, 수행과 차 생활의 결합은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차의 성인’으로 추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초의는 사상적ㆍ학문적으로 다산을 넘어서는 독자적 체계를 구축했다고 보기 어렵고, 《동다송》과 《다신전》 역시 중국 차 문헌의 수용과 요약 성격이 강해 한국 차문화의 정체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창조적 성과로 보기는 어렵다(필자의 "다성론" 참고). 초의를 ‘탁월한 차인’으로 평가하는 것과 ‘다성’으로 추존하는 것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반면 매월당 김시습은 조선 전기라는 이른 시기에 이미 차를 삶과 사유, 예술과 수행을 관통하는 문화적 매개로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많은 차시(茶詩)를 남겼으며 '초암차(草菴茶)' 전통을 실천하며 차를 유ㆍ불ㆍ선 사상을 아우르는 정신 수양의 도로 이해했고, 그 정신은 일본 등 동아시아로까지 전해져 문화적 교류의 기반이 되었다. 김시습의 방랑적 삶과 은둔적 태도, 문학과 사상의 깊이는 차문화를 단순한 기호가 아닌 삶의 '풍류도(風流道)’로 격상시키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그는 특정 시기의 차 부흥을 이끈 인물이 아니라, 고운 최치원 이후 한국 차문화의 원형적 정신을 형성한 인물에 가깝다.
필자와 박정진 시인이 매월당 김시습을 ‘다성’의 상징에 더 맞다고 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단순한 인물 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차문화를 후기 조선의 문인 취향 중심 서사에서 벗어나 보다 장기적ㆍ동아시아적 맥락 속에서 재배치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다성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성찰하는 일이다. 필자의 "다성론"은 특정 인물을 또 다른 성인으로 세우기보다는, 한국 차문화를 개인숭배의 서사에서 해방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다. 다만 굳이 상징성을 세운다면, 후기 조선의 다승(茶僧) 초의 의순보다는 한국 차문화의 근원적 지평을 열고 동아시아로 확장시킨 매월당 김시습이 그 상징에 더 잘 맞는다는 점은 분명히 지적할 수 있다.
결국 “누가 한국의 다성(茶聖)인가”라는 물음은 한 인물을 가려내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한국 차문화를 어떤 역사적 깊이와 사상적 눈높이에서 바라볼 것인가를 묻는 말이다. 초의를 다성으로 당연시해 온 익숙한 시선을 잠시 멈추고, 그 이전의 역사와 차정신을 성찰할 때 한국 차문화는 더욱 넓고 깊은 유구한 지평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