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도 가을이 외롭지 않네

2020.10.21 12:31:25

길가의 전봇대에서 마주친 시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68]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가을 수채화

 

                               ... 윤갑수

 

​       따스하던 한낮의 날씨는

       금세 지는 해처럼 갈바람은

       차갑게 옷깃을 파고든다.​

 

       자람이 멈춘 나뭇잎마다

       푸른빛을 내려놓고 탈색

       중이다​.

 

       밤낮

       기온 차가 화가로 변신

       연일 멋진 수채화를 그린다. ​

 

이제 가을이네. 사람이 다니는 길옆에는 수천, 수만 장의 수채화가 그려지고 있구나.

차가운 공기에 나뭇잎들이 어이쿠 안 되겠구나 하면서 몸의 물기를 거두면

싱그럽던 녹색의 이파리들도 노랗게 누렇게 빨갛게 색을 바꾼다.

그리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이런 가을엔 모두가 시인이다.

모두가 시를 쓰고 싶고 그 시로 이 가을의 무드를 잡고 그 속에 빠져들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시집이라는 책 속에 들어가거나

어디 창이 있는 방안에서 뭔가를 찾을 때 가능한 마음의 소풍이다.

 

길거리에서는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 사이에서 그런 호사를 누리기가 어렵다.

가을의 길거리는 자칫 마음만 바쁘고 쓸쓸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길 가다가 전봇대에서 멋진 시를 마주친다.

그 시는 이렇게 속삭인다. ​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정호승 시인의 시가 아니던가?

'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라는 긴 제목의 시구절이다.

 

가을의 낙엽은 자신을 버리는 사랑의 대명사다.

이 가을에 낙엽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다.

이 가을의 사랑의 대상은

그러므로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가을이 되면 길들은 온통 낙엽으로 뒤덮인다.

낙엽들은 우리들의 손바닥처럼 느껴진다.

이 손바닥들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닦아주는 손바닥이라고

시인 최영철은 가을을 우리에게 안내한다.

 

가로수는

조금 전까지 산들거리며 하늘을 닦고 있던

제 손바닥을 거두어

우수수 아래로 날려 보냈다

 

 

눈앞의 전봇대에는 이렇게 짦은 구절만 달려 있지만,

사실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은 그다음에 있다. ​

 

지나가는 사람들 발길에 채고 밟히면서

그 손바닥들은

제멋대로 흩어진 지상의 길을

팽글팽글 구르며

닦고 또 닦아주었다.​

 

말끔히 닦인 그 길로

금방 진흙탕을 건너온 한 사나이의

비틀거리는 발자국이 찍히고 있다

 

우리가 사는 동네 은평구 연신내의 네거리 가로수에 이렇게 가을의 시가 영글고 있었다. 은행나무라서 조금 있으면 누런 은행들이 떨어져 길이 미끄러워지고 더러워질 것을 막기 위해 아마도 구청에서 나무에다 보호막을 높이 쳐놓고 그 밑에는 시를 써놓았다. 그 시는 낙엽의 색깔과 분위기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곁들여져 멋진 가로수 시화전이 되고 있다.

 

길옆 유리창이나 벽보판에 시가 등장하는 수는 있었지만, 길가 가로수에 은행 보호막을 겸해 기둥마다 예쁜 시가 눈길을 끌어주니 이 가을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이 마음이 어느새 부드러워지고 감성에 물들고 뭔가 문화예술적인 마음으로 바뀌어 간다. 분명 이 가을의 공무원 세계가 찾아낸 한 아이디어다.

 

 

다른 지자체에서도 걸거리에 그림을 그리고 문화를 입히고 예술을 느끼게 하는 일이 많아지는 가운데 내가 사는 은평 일대에서도 이제는 삶의 각박함만을 한탄하다가 삶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고 그 아름다움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현장들이 나오고 있다. 문화의 옷, 예술의 향취를 우리 삶에 주는 것, 그것을 알고 보고 느끼고 나눠주는 삶... 그것이 많아진다는 것은 21세기 한국을 사는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는 삶의 수준이자 기쁨이자 보람이다.

 

서울이나 은평구만을 대상으로 하는 생활공간만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접하는 상품에도 문화의 옷이 입혀지고 있다. 최근 판매되고 있는 양갱이라는 식품의 겉 포장지에도 아름다운 시들이 등장하고 있다. 시의 분위기를 살리는 파스텔톤의 가을 색깔들과 간단한 그림들, 거기에 박인환이 있고 이육사가 있고 윤동주가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져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  박인환, '목마와 숙녀' 중에서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쉬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 그 위에 서다

 

                      ... 이육사의 '절정' 중에서

 

 

가을은 점점 차가워지는 공기 때문에, 어딘가 떠나는 낙엽 때문에, 마음이 쓸쓸하고 스산해지는 계절이고, 코로나19의 여파로 아는 사람을 마음 놓고 만나지도 못하고 삶의 팍팍해진 어려움에 더욱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서 길거리를 헤매며 더욱 마음이 무거워질 수 있지만, 눈을 들어 가로수에 걸린 시를 보고, 눈을 내려 작은 상품 표면에 적힌 시를 보면서 잠시 이 삶의 힘든 공간을 잊어버리고 문화와 예술의 힘에 우리는 의지해 보는 거다. 그 순간이나마 삶의 가벼움을 잊어버리고 그래도 살아있다는, 그래서 앞으로도 재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살려가면서 이 가을의 길거리를 걸어가는 거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