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무안 용덕사를 세운 비구니 종수 스님의 삶

2021.10.01 11:14:51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비구니 큰 스님, 종수 스님<1922.12.20.~2020.12.19(음력)>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우연이라고는 했지만 ‘사찰순례’를 하다보니 언젠가는 만날 법한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마다 한가위를 앞두고 부모님 묘소(전북 전주)에 성묘하러 간 김에 주변 지역의 사찰순례를 하곤 하는데 올해는 전남 무안에 있는 용덕사(龍德寺)로 발걸음을 옮겼다.

 

용덕사는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에 있는 절이다. 길찾개(네비게이션)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에 따라 절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주차장 끝에서 시작되는 절 입구에는 근래에 세운 듯한 공덕비 하나가 근사한 모습으로 세워져 있었고 종수당(宗秀堂)이라는 작고 아담한 부도탑도 곁에 있었다.

 

 

 

찬찬히 공덕비문을 읽고 절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나중에 볼 요량으로 먼저 절 경내로 들어섰다. 대개 지역에서 이름난 절이 아닌 경우, 절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고 수수한 모습이 대부분인데 용덕사는 아담한 규모의 절이었지만 꽤 짜임새 있는 가람을 갖춘 절이었다.

 

용덕사가 비구니 스님 절이라는 것을 안 것은 경내를 분주히 오가던 비구니 스님을 보고서였다. 절을 찾은 날은(9월 11일, 토) 곧 다가올 한가위를 맞이하기 위해 비구니 스님 두 분께서 대웅전 옆에 자리를 깔고 부처님 전에 과일을 올리는 놋그릇에 광을 내고 있었다. 보기 드문 정경이었다. 다가서서 인사를 드리니 절 입구에 있는 공덕비를 보고 왔냐고 묻는다.

 

 

‘아직 읽지 않았다’고 하니 주지 스님(법강 스님)은 놋그릇을 열심히 닦으면서 용덕사 창건주였던 종수  큰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종수 스님은 법강 스님의 은사스님이었다고 했다.

 

“용덕사를 세운 종수 비구니 큰 스님의 출가 동기는 특이합니다. 당시는 일제 침략 시기로 종수 스님의 속가 이름은 문덕금이었습니다. 문덕금은 일곱 살이 되어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하마터면 위안부로 끌려갈 처지에 놓여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지요.”

 

보통학교에 갓 입학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중퇴한 이야기만 빼고 종수 스님이 용덕사를 세운 이야기는 용덕사 절 입구에 서있는 ‘용덕사 창건 공덕비’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용덕사는 한반도 소백산의 메아리가 줄기차게 달리다 머물러서 서남단의 다도해를 바라보며 솟아오른 봉대산 자락에 꽃피운 절로 전남 무안군 해제면 광산리 산 41번지, 구룡곡에 1965년 10월 15일 부처님 자비도량으로 개산하였다. (중간줄임) 용덕사를 창건한 종수 스님은 남편 사후를 추모하여 효열 미풍의 시묘 3년이라는 천하에 유례없는 공을 세운 분이다.

 

(중간줄임) 숲이 우거져 낮에도 혼자서는 내왕이 어려운 우적골에서, 문덕금(훗날 종수 스님)은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묘살이에 들어갔다. 집안 어른들의 중매로 혼인한 문덕금의 남편은 결혼 7년 만에 세상을 떴다. 무덤 옆에 작은 토막을 짓고 방에는 짚을 깔고 짚 베개를 베고 꼬박 3년의 시묘살이를 했다. 3년간 머리를 감지 않았으며, 입고 있던 흰옷은 검정 옷으로 변해있었다.(중간줄임) 시묘살이 뒤에 유년시절부터 선천적으로 불교를 신앙했던 종수 스님은 비구니절로 들어가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했는데 문중 어르신들께서 ‘문중을 빛낸 분’을 어찌 남의 절로 가시게 할 수 있냐는 의논 끝에 문중의 선산 680여 평과 인법당(人法堂)을 지어 종수 스님께 희사했다.

 

이때가 1969년 11월 17일이었다. 사찰명은 구룡곡(九龍谷)의 용(龍)자와 속가명인 문덕금(文德今)의 덕(德)자를 취해 용덕사(龍德寺)라 지었다. 용덕사를 창건한 종수 스님은 1971년 지금의 절터에 관음전을 지어 관세음보살을 봉안하였다. 그 뒤 1972년 공주 마곡사에서 법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광주 신광사에서 행자생활을 하고 1976년 대흥사 석암 대종사를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계하였다. 1978년 송광사에서 구산 대종사를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한 뒤 해인사 삼선암, 범어사 대성암, 울주 석남사 등에서 참선수행을 하셨다.

 

이후 용덕사에 주석하시면서 불교 불모지였던 이 지역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시다가 용덕사를 대한불교조계종 22교구 대흥사 말사로 등록한 뒤 불사(佛事)에 착수하여 1990년 대웅전 건립 및 삼존불 봉안, 1992년 범종각 및 범종불사, 1993년에는 산신각 건립, 2001년에는 부처님진신사리 5층보탑 및 관음전 건립, 일천관세음보살을 조성 봉안하여 오늘의 가람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일은 종수 스님의 초지일관 광대무변한 원력과 일구월심의 기도 정진으로 이룩한 것이다. -불기 2548년(2019) 10월 2일 용덕사 창건 공덕비 건립 추진위원회-”

 

 

용덕사의 유래가 적힌 공덕비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자니 종수 큰 스님의 일생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졌다. 주지 스님은 종수 스님의 근영(사진)을 보여주겠다면서 요사채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인자한 모습의 종수 스님 사진과 종수 스님이 지은 몇 편의 시가 벽에 걸려 있었다. 그 가운데 ‘자화상’ 이라는 시가 눈에 띄었다.

 

국화 꽃잎 하늘 하늘 거리는

새벽 찬 공기 따라

젖은 국화 꽃잎의 향기

도량석 목탁 소리 따라 거니는

그 꽃의 향기가 이리도 좋구나

구시월 피는 늦가을의 국화꽃 향기는

노승인 내 모습을 어느새 닮아 있었네.

-2019.3.5. 종수 스님-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도량석을 돌던 스님을 따라 다니던 국화향을 종수 스님은 유달리 좋아 하셨나 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하마터면 위안부로 끌려갈 뻔했던 소녀 문복금은 조선총독부 시절의 보통학교를 미련 없이 내던졌다. 그리고 보통 여자들이 걷던 길로 들어섰으나 뜻하지 않은 일로 남편이 운명하자 남자도 하기 어려운 시묘살이를 자청하여 3년상을 치렀다. 이 일은 당시 전라남도에 널리 퍼져 1962년 10월 3일, 도지사 (송호림)로부터 ‘열녀표창장’을 받게 되었고, 1979년에는 대한 충의 효열 <무안향교 삼강문> 에 수록되었고, 1992년에는 <무안 삼강지>에 수록, 2002년에는 <무안 삼강 문헌록>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이후 종수 스님은 불문(佛門) 귀의하여 부처님의 법음(法音)을 지역사회에 널리 펼치시다가 세수(歲數) 99세, 법랍(法臘) 52세로 지난해(2020년 12월 19일<음력>) 열반에 드셨다.

 

“아이고, 조금 더 일찍 오셨더라면 우리 종수 스님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쉽군요.” 용덕사 주지 법강 스님은 놋그릇에 광을 내며, 은사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근조근 들려 주었다. 이야기를 마친 법강 스님은 ‘용덕사 창건 공덕비’가 있는 절 입구까지 마중 나와, 종수 스님의 이야기가 적혀있는 ‘공덕비’의 건립 사연까지 자세히 들려 주었다. 검은 오석에 깨알같이 박혀 있는 빼곡한 글귀를 다 읽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을 하늘은 더 없이 높고 푸르렀다.

 

그래, 종수 스님은 직접 뵙지 못했지만 용덕사의 오늘을 있게 한 종수 스님 이야기라도 소개하자는 심정으로 귀가하여 수제자 법강 스님(용덕사 현 주지스님)이 들려 준 이야기와 <용덕사 창건 공덕비>를 찬찬히 다시 읽어보며 국화향처럼 살다가신 종수 비구니 큰스님의 삶을 되새겨본다.

 

* 용덕사: 전남 무안군 해제면 회안길 72 (광산리 산 42)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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