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분

2022.04.08 11:12:02

[이달균 시조집 《말뚝이 가라사대》와 함께하기 11]

[우리문화신문=이달균 시인]  

 

사랑이 오신다면 스미듯 오셔야지

시나브로 꿈 적시는 봄비처럼 오셔야지

화들짝 헤픈 도화처럼 왜 난분분 오시는가

내사 못할 짓이네 당췌 못할 짓이네

눈물에 자물자물 시나브로 잠이 들면

문풍지 실바람에도 흠칫 놀라 잠을 깬다

과부야 애솔나무 송화분 흩어지면

은근짜 옷고름 풀듯 보리밭도 흥감터라

궁노루 흐벅진 욕정의 중중모리 휘모리

어디선가 맹렬히 별똥별 떨어지고

들물 날물 한데 엉켜 소용돌이 뺑이 돈다

들끓던 햇살의 산조, 차츰 숨이 잣는다

쟁여둔 시간과 한 송이 목화구름

연두빛 보료는 향기롭고 따뜻하다

달디단 밀봉의 오후, 꿈처럼 봄날은 간다

 

 

 

<해설>

고성오광대 막을 열면 문둥춤을 추는 사내가 등장한다. 아무도 그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저 다짜고짜 춤판을 연다. 그 사내는 누구인가. 왜 한 많은 사연을 안고 문둥춤을 추는가. 그래서 이렇게 상상해 보았다.

 

한 사내가 있었다고 가정하자. 얼굴이 얼금얼금 얽어 있는 얼금뱅이 사내를 등장시켰다. 그런 탓인지 혼기 놓치고 장가도 못 갔다. 하지만 그 동네에 들물댁이란 과수댁이 살고 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가진 이들은 눈빛만으로도 통한다. 그래서 둘은 사람들 몰래 정분이 났다.

 

“과부야 애솔나무 송화분 흩어지면 / 은근짜 옷고름 풀듯 보리밭도 흥감터라 / 궁노루 흐벅진 욕정의 중중모리 휘모리”

 

벚꽃 흐드러지게 피고 송홧가루 날리는 봄날 두 사람은 초록빛 보료 같은 보리밭에서 뜨거운 정을 나눈다. 옷고름 푸는 시간도 아깝다. 사랑하는 곳이 보리밭이면 어떻고, 물방앗간이면 어떤가. 뜨거운 욕정은 가쁜 호흡의 중중모리로 날뛰다 격렬한 휘모리로 돌아든다. 어디서 별 떨어지는 소리 들리고, 맥박은 한없이 달려간다. 드디어 큰 쉼호흡 끝에 들끓던 햇살도 차츰 찾아든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목화솜처럼 따뜻이 맨몸을 감싸준다.

 

누가 이들을 말릴 것인가. 이 맹렬한 사랑을 무엇으로 말릴 것인가. 꿈처럼 떠 가는 봄날의 어느 날, 하늘이 무너져도 내 사랑은 놓지 않으리. 첫판 문둥춤 추는 사내가 어쩌면 이 사내가 아니었을까. ‘밀봉의 시간’은 누구에게도 구애받지 않고 둘만의 뜨겁고 은밀한 시간을 말한다.

 

 

이달균 시인 moon15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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