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에서 다시 보는 형제의 다른 길

2022.04.27 12:44:13

경(敬)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써 몸을 바르게 한다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44]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567년 조선 왕국의 13대 임금 명종이 후사도 없이 세상을 뜨자 17살의 나이에 갑자기 왕위에 오른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늙은 몸을 이끌고 1568년 여름에 상경한 퇴계 이황은 정성을 다해 경연에 임하고 성왕(聖王)의 이치를 담은 <성학십도>를 지어 선조에게 올린 뒤 고향에 돌아가기를 간곡하게 청원한다.

 

그 이듬해인 1569년 음력 3월 4일 겨우 고향에 다녀오는 윤허를 받은 퇴계는 혹 임금의 마음이 바뀔 쌔라 다음날 한강을 건너 고향으로의 발길을 서둘렀다. 열흘 만인 3월 13일에 퇴계는 충북 단양에 도착했다. 단양은 퇴계가 48살 때에 군수로 약 10달 재직하였던 곳이다. 퇴계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20여 년 전 백성들을 위해 힘을 쏟았던 때를 생각하며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이지만 따로 기록을 남긴 것은 없고, 다음날 14일에 죽령을 넘어 풍기로 간다.

 

 

죽령은 해발 696미터로 아주 높지는 않지만, 문경의 조령(새재)와 함께 소백산맥을 넘어 서울과 영남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고갯길이었다. 퇴계는 지금 죽령옛길로 불리는 길을 따라 맑은 물이 흐르고 곳곳에 폭포가 있는 아름다운 이 길을 올라가 죽령 정상에 이르러서는 더욱 깊은 감회를 느꼈음이 틀림없다. 그것은 20년 전에 이곳에서 가장 친한 형님 온계(溫溪) 이해(李瀣)와 마지막 이별을 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퇴계(1501~1570)에게는 위로 5명의 형이 있었지만 다섯 살 위인 넷째 형 온계(1496~1550)를 가장 의지했다. 두 형제는 다른 형제와 달리 도학과 성현지도를 닦는 데 뜻을 두었고 대과 급제 후 나랏일을 하면서도 핏줄로서의 우애를 넘어서서 세상을 일궈나가는 데도 서로 격려하고 힘이 되어주었다. 그러기에 두 형제는 자주 보지 못해 안타까워하면서 언제든 고향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우애를 나누고 싶어 했다.

 

퇴계가 단양군수로 있던 1548년 형님 온계가 충청감사로 오는 바람에 한 도(道)에 형제가 나란히 아래위로 근무할 수 없다며 퇴계는 그 옆의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다음 해인 1549년 두 형제가 마침 고향 성묘를 위해 만나고는 죽령 위에서 이별을 하는 것이다. 퇴계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해놓았다.

 

 

 

형님(李瀣)이 충청감사로 계실 때 잠시 말미를 받아 고향에 오셨다. 나는 당시에 외람되이 풍기군수로 있어서 맞이하고 전송하기를 모두 죽령에서 하였다... 작별하게 되자 형님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자네는 벼슬을 그만두지 말게. 내년에 내 꼭 다시 올 것이니 저 대 위에서 잔을 드세나.” 하셨다. 그다음 날 내가 기념으로 두 절구를 써 붙였다.​

 

爲破天荒作一臺 험한 터를 다듬어서 대(臺)를 꾸민 것은

鴒原棠茇送迎來 감사 형님 오가실 때 마중 배웅 위해서죠

泠泠恰似惟情溢 영롱한 물소리 우리 형제 깊은 정 같네

矗矗還如別恨堆 우뚝 솟은 산들은 이별의 한 쌓인 듯

 

雁影峽中分影日 안영협 골짜기에서 서로 헤어지던 날

消魂橋上斷魂時 소혼교 다리에서 넋이 나가는 듯했지요.

好登嶺路千盤險 험하디험한 영남 고갯길 잘 오르셨듯이

莫負明年再到期 내년 다시 오실 기약 저버리지 마소서.

 

​이에 형도 동생의 마음 받아 시를 짓는다,

 

神輸鬼役築層臺 귀신이 한 일인 듯 층층대 우뚝하니

一夜能成待我來 하룻밤 사이 날 기다려 쌓은 것이라네

眼力定應天奧覷 하늘 끝까지 눈에 들어오는 이곳

暫時斸跛白雲堆​ 비탈진 산길엔 흰구름이 올라오네

 

西日奄奄若不遲 어느덧 벌써 서산에 해가 지는구나

躕躇橋上酒闌時 술자리 파했지만 서성거리는 마음

雲山聽我丁寧說 구름 낀 산아 내 말 잘 들어주소

好待明年來有期​ 명년에 다시 오리니 꼭 기다리라고

 

하였다.

형제가 작별한 곳이 촉령대(矗泠臺)다. 촉령대는 죽령(竹嶺) 요원(腰院)의 아래에 있는데, 충청도와 경상도의 분계 지점이다. 퇴계가 온계를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을 여기서 했다. 촉령대라는 이름은 퇴계가 이름을 지었다. 작별에 임해서 온계는 동생에게 “너는 풍기군을 떠나지 말아라. 내년에 내가 마땅히 다시 와서 촉령대 위에 잔을 올리리라.”라고 말했다.​

 

그러나 퇴계와 온계는 촉령대에서 헤어진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55세 되던 그다음 해 8월에 온계는 자신에게 앙심을 품은 당시 권력층의 모략으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런 아픔의 역사가 있는 곳이었기에 퇴계는 20년 전 형님을 이별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가장 영명했던 형님이 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유명을 달리한 것을 애통해했을 것이다.

 

 

 

450년 전 퇴계의 마지막 귀향길을 답사하면서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간 뜻을 되새겨보기 위해 4월 4일 서울을 떠난 김병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과 원로 한문학자 이장우 박사, 강구율 동양대 교수, 온계의 직계후손인 온계파 이목 종손 등 답사단은 이날 단양에서부터 40리 길을 네 시간 넘게 걸어서 죽령고개에 오른다. 고개 정상에서 두 형제가 지은 시를 서로 주고받고 하여 두 형제의 만남과 헤어짐의 의미를 회고해 보았다. 답사단의 일원으로 구절양장의 단양옛길을 함께 걸어 죽령에 오른 필자도 간간이 뿌리는 빗방울 속에 썰렁한 바람을 맞으며 감회에 빠졌다. 필자의 직계 선조이신 온계와 그 동생 퇴계 등 두 할아버지 형제의 운명이 서로 교차한 곳이기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이었다.​

 

두 분이 공부하고 실천한 가르침인 유학은 경(敬)과 의(義)라는 두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주자는 말했다.​

 

"나는 일찍이 주역(周易)을 읽고 두 마디 말을 얻었으니 '경(敬)으로써 안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의(義)로써 밖으로 몸을 바르게 한다'라는 것이다. 이를 학문하는 요점으로 삼은 것은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퇴계 이황의 철학은 경(敬) 철학이라고 한다. 경(敬)은 공경함(恭), 엄숙함(肅), 또는 삼가다(勤愼) 등의 뜻으로 풀이된다. 하늘로부터 본래 부여받은 순수한 마음을 경 공부를 통해 회복하여 내면에서 자신에게 비친 천명인 성품을 확인하고 세계 속에서 궁극적 존재와 일치하려고 한다. 경(敬)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그러한 상태를 오래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으로서 자신을 스스로 수양하고 제자들의 맑은 덕성을 함양해서 사람들이 사는 사회를 맑게 이끌 인재를 기르는 것이다. 퇴계는 이 경(敬)을 평생 지키고 추구해 나갔다.​

 

다만 형인 온계는 이 사회가 올바른 도를 추구하는 왕도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수양에 머무르는 것을 넘어서서 의를 보고, 의를 행하며 의를 함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기에 그는 임금이건 신하건 잘못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과감히 시정을 요구했고 백성들을 위한 목민관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두 형제가 살던 시대는 권신들에 의한 정치의 혼란이 극심했고 세상의 바른 도는 무시되고 있었다. 이런 세태 때문에 동생 퇴계는 형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떠나기를 권했고 스스로 고향에 내려가서 서당을 열고 경(敬)을 지켜나가면서 바른 생각을 제자들에게 전했다. 그런 대신 형은 자신의 이상인 의(義)를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결국 험난한 세상의 파도에 휩쓸려 자기 뜻을 다 세우지 못했다.​

 

퇴계는 올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하는 선비들이 조정에 진출하고 있으면서도 계속되는 권력 싸움과 정치의 혼란으로 수많은 지식인이 목숨을 잃거나 유배 가고, 정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 근본적인 해법을 학문에 대한 근본 개념, 우주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해서 먼저 인간이 되어 정치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찾으려 했다. 당시 끊임없이 연속되는 정치적 참화의 근본 원인이 나아가는 길만 있고 물러나는 길이 없는데 있다고 보고 이 구조를 해소하고 퇴로를 뚫는 데 자신의 역할을 찾아 이를 실천으로 옮겼다.

 

그것은 현실에서 맞설 용기가 없어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도가 돌아오기를 촉구하는 수양과 학문의 길을 가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밝고 바르게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퇴계로서는 이제 자신도 스스로 모든 정계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내려가는 만큼 20년 전 형님이 다른 길을 갔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그러지 못하고 일찍 몸을 잃은 데 대한 아쉬움이 교차했을 것이다.

 

 

퇴계는 그렇게 해서 길고 높은 이름을 남길 수 있었지만, 형은 가슴 속의 뜻을 다 세우지 못하고 한 많은 생을 끝내야 했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 온계와 같이 옳음을 위해서는 목숨을 거는 용기가 없다면 우리 사회의 불의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고 우리들의 삶은 피폐해질 것이다.

 

죽령의 차가운 비바람 속에서 필자는 경의 철학으로서 진정한 도학자, 유학자의 길을 제시한 퇴계를 생각하면서 동시에 길은 다르지만, 의(義)의 추구를 통해 다른 선비의 길을 보여준 퇴계의 형 온계를 다시 생각하며 그 길의 중요성을 되새겨본다. 자기 자신의 내면을 성찰해 스스로 학문을 완성한 뒤에 세상에 이바지하는 것이 중요한 가르침이지만 세상의 불의와 싸우고 의를 세우는 자세도 모두 우리의 삶을 이끌고 받쳐주는 중요한 덕목이자 추구해야 할 값어치이자 길임을 새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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