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의 '새로운 길'

2022.07.13 11:46:39

작은 길 하나라도 먼저 걸어가 열어주자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155]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비가 온다는 것은,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는 길을 멈추게 하는 힘이 있다. 며칠 전 구파발역 쪽 병원에 내려갔다가 구파발천 옆길을 따라 올라오는데 예보에 없는 비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제법 굵은 빗줄기로 바뀌어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이 없으니 우선 길 중간에 설치된 휴게시설의 한 의자에 앉아 비를 피하며 쉬다가 문득 뒤를 보니 의자 뒤편에 시가 하나 판에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보니 윤동주 시인의 <새로운 길>이란 시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길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하면 대충 '별을 헤는 밤'이라던가 '서시(序詩)'를 접해 온 우리에게 "아이구. 윤동주에게 이런 시가 있었나?" 하며 그의 시를 다시 보게 한다. 만주 용정에서 태어난 윤동주가 서울 연희전문을 다니면서 시를 많이 썼고, 이 시도 그때 써서 교지인 문우(文友)에 발표한 것이라는데, 청년 윤동주가 이런 소년 같은 감수성으로 새로운 길을 가고 있고 계속 가고 싶다는 희망을 썼구나….

 

윤동주 연구가들은 동주가 20살을 전후하여 10여 년간 활발한 시 창작 활동을 했는데 이 시기 그가 시인으로서 걸어온 길은 청년기의 고독감과 정신적 방황, 조국을 잃음으로써 삶의 현장을 박탈당한 동일성의 상실이 그 원천을 이룬다고 분석을 한다. 그렇지만 그는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명령하는 바에 따라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내면의 의지를 드러낸 작품이 많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 시도 아름다운 고향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함께 잘 사는 그런 세상을 찾아가는 길을 노래하였다.

 

일제강점기라는 어려운 시대에 썼다고 보기 힘든 순수미학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음은 현대인들에게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80년 뒤 은평구에서 개천을 멋진 걷는 길로 단장을 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이 시를 골라서 세워놓았을 것이다.​

 

휴게시설이 있어 비를 피할 수 있는 이곳은 약 2킬로가 넘는 구파발천의 중간지점이다. 보통은 그냥 걸으면 30분이 채 안 걸리는 짧은 구간이기에 굳이 휴게시설에 앉을 이유가 없는데 마침 소나기가 내린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이 길에서 잠시 쉬며 당신이 걸어온 길에 대해 좀 생각해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평상시 우리는 가는 목적지는 정해져 있겠지만 가는데 바빠서 어디까지 와 있는지를 모를 때가 많다. 우리는 길을 잃고 나서야,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의 시계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미국의 사상가 H D 소로가 그의 유명한 수필 「월든」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그날 갑자기 내린 비로 내가 시계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나 자신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구나!​

 

뭐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구파발역과 집 사이의 중간이듯이 지금 내가 있는 시간도 2022년의 중간을 막 지난 7월이구나. 다시 말하면 어느새 이 해의 절반을 우리가 과거로 보냈으면서도 지금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새해를 맞으면서 생각했던 일, 계획했던 일들은 어느 정도 되어가고 있는지, 남은 시간은 어떻게 효율적으로 보내어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는지.... 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한해의 절반을 보냈구나....​

 

그런데 이런 시간이 빨라 지나간다는 타령조의 사설은 지금은 할 마음이 없다. 연초에 많이 듣고, 연말이면 또 지겹게 들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을 보며 며칠 전 ‘우리문화신문’에 나온, 윤동주를 좋아해서 한글 공부를 하고 한글 서예를 공부하고 가르친 한 일본인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한글 공부를 시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운명이라고 해야 좋을 이 한 편의 시와의 만남은 이후 나의 붓글씨 세계를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한국과의 인연을 시작한 서예가, 그의 이름은 다나카 유운(田中佑雲, 1957~2018)이다.

 

일본 도치기현 도치기시에 살던 다나카 씨는 윤동주의 시를 접하고는 감동을 하여 마흔여덟에 한글 공부를 시작했고, 13년 동안 한글서예 작품을 써 내려갔다. 한글을 사랑하고(한글 서예), 한국인을 사랑하고(윤동주 시인 등), 한국을 사랑해서 인생 말년을 한국으로 이주해 살기를 꿈꿨던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소원인 한국에는 와보지 못하고 2018년에 눈을 감았다. 그의 4주기를 맞아 지난달 25일 인천관동갤러리(관장 도다 이쿠코)에서 <구름의 길, 바람의 길 –윤동주를 사랑한 서예가 다나카 유운 작품전> 전시회가 개막됐다고 한다.

 

 

윤동주에 반한 일본인들 가운데는 저명한 분들이 꽤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살 때에 패전(일본의 항복)을 맞는 등 어수선한 청년기를 겪었지만 1950년 이후 주부로서 생활하면서도 시인의 길에 몰두해 전후파로 불리는 많은 젊은 시인들의 리더로서 ‘전후 현대시의 맏딸(長女)’이란 이름을 받은 이바라기 노리코( 茨木のり子, 1926~2006)가 그 대표인물이다.

 

1986년 '한글에로의 여행'이란 에세이집에 '윤동주'라는 글을 실음으로 윤동주에 관한 관심을 이끌어 내었는데 그 글이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인 <신편 현대문>에도 실려서 읽혔다. 글에서 이바라기는 1945년 2월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의의 형무소에서 세상을 떴는데 이를 두고 "그는 일본 검찰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통한(痛恨)의 감정을 갖지 않고서는 이 시인을 만나 볼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다고 기치로(多胡吉郞)라는 일본인은 런던에서 NHK 특파원으로 있다가 윤동주의 '서시'를 보고 그에게 꽂혀 직장을 포기하고 작가의 길을 걷는다. 10여 년에 걸쳐 NHK에 윤동주 다큐를 제작하자고 끈질기게 설득하여 만들어냈고, 시인이 한 학기를 다닌 동지사대(同志社大學)에 그 다큐를 보이며 윤동주 시비를 세워야 한다고 설득해 대학에 시비를 세웠고(1995), 윤동주의 마지막 사진을 발견하여 시인이 친구들과 서 있었던 자리, 우지(宇治)에 또 하나의 시비를 세우기도 했다. (2017).​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난 것은, 바로 이들이 윤동주가 꿈꾸었던 새로운 길을 걸어간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자각적 인식이 들었기 때문이다. 윤동주는 대학생일 때 많은 꿈을 꾸고 시로 나타냈는데, 그 꿈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표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자기 삶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세상의 모든 보잘것없고 눈에 띄지 않는 사물들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된다.

 

'별 헤는 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동물들은 모두 힘없고 양순한 존재들이고, 시인의 애정어린 눈길과 따뜻한 가슴을 필요로 하는 것들인데 이러한 데 대한 사랑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리라. 결국 윤동주는 우리뿐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서로 통할 수 있는, 나라와 국경을 넘는 사랑의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이 아니겠는가?

 

 

길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조그마한 길이라 하더라도, 그 하나로서만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철학자 박종홍 교수가 말했다지만 굳이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고민만 하지 말고 사람들이 마음을 트고 가서 모두가 고향사람처럼 서로 만나고 사랑할 수 있는 작은 길 하나라도 먼저 걸어가 열어주면 그것 이 세상에 윤동주가 걷고 싶었던 ' 새로운 길'이 아닐까.... 문득 맞은 소나기가 지나가는 시간에 드는 생각이었다.

 

 

이동식 인문탐험가 lds@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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