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모정(慕情)>에 담긴 이야기

2022.08.13 11:29:30

최종고‘의 《세계문학 속의 한국전쟁》에 나오는 ‘이안 모리슨과 한수인’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198]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윌리엄 홀덴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한 영화 <모정(慕情, A Many Spiendored Thing)>을 아십니까? 1955년에 제작된 영화인데, 홍콩에서 의사 생활을 하는 중국군 장교의 과부 한수인과 미국 특파원 마크 엘리엇과 사랑을 그린 영화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텔레비전의 명화극장에서 <모정>을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모정>은 작가 한수인(1916 ~ 2012)이 이안 모리슨과의 사랑을 그린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중국인 아버지와 벨기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수인은 벨기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국민당 장교 당보황과 결혼합니다. 그런데 남편이 1947년 만주전선에서 전사하자, 1949년 홍콩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퀸 메어리 병원에서 근무하다가, 호주계 영국기자 이안 모리슨과 사랑에 빠지지요.

 

 

둘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납니다. 이안 모리슨이 한국전쟁에 영국 <타임스>의 종군기자로 파견된 지 얼마 안 되어, 1950. 8. 12. 지뢰가 터져 전사하였기 때문이지요. 한수인은 소설 끝부분에 이안 모리슨이 한국전선에서 보내온 21통의 편지를 그대로 실었는데, 그렇기에 최종고 교수님은 《세계문학 속의 한국전쟁》에 한수인의 <모정>과 거기에 실린 이안 모리슨의 편지를 소개합니다. 한수인은 모정을 쓰게 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음 날 아침 영메이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내려오니 쉐일라가 신문을 보다 “오, 수인!”하고 소리쳤다. 나는 신문을 빼앗아 펼치니 거기에는 큰 글씨로 이안이 사망했고 그의 지프가 한 지뢰에 날아갔고, 그와 두 언론인은 곧바로 숨졌다고...... 나는 열기에 찬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안과 내가 그렇게 자주 함께 걷던 돌길도 지나갔다. 바다는 무심히 연초록이다. 다음날은 다시 출근했다. 그러고부터 이안의 편지들이 한국에서 오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순서대로 왔다. 나는 그가 죽은 것을 알지만, 그의 현존의 이 지속적인 모조(this protracted counterfeit of his presence)가 그의 죽음에 대한 나의 인식을 둔화시켜 주었다. 그의 생생한 종이, 필적, 표현들이 내 손 아래 있는데 어찌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3주간 동안 하나하나 왔다. 쓰여진 날짜를 보고 나는 마지막 편지를 알았다. 이 마지막 편지를 받고 더 이상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나는 타자기에 종이 한 장을 끼웠다. 그러고는 <모정>을 쓰기 시작했다.

 

영화 <모정>에서 한수인은 이안의 전사 소식을 듣고 집을 뛰쳐나와 그들의 추억이 어린 언덕으로 달려가 흐느끼면서, 영화를 보던 세계인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특히 주제곡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영화 <모정>은 195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받기도 하였지요. 여기에 그 주제가도 올려봅니다.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모두 “아! 이 노래!” 할 것입니다.

 

▶ 영화 <모정>의 주제곡 듣기

 

최 교수님은 이안이 한수인에게 보낸 편지들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일부만 소개하면서 제 글을 마치렵니다.

 

 

첫 번째 편지(1950. 7. 13.)

 

내가 8년 전 미군부대에 특파원으로 있던 때로 되돌아간 느낌도 있어. 사람과 사람 사이 의사소통의 어려움,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에 휩싸인 무고한 사람들, 고통받는 인간들, 이 모든 것은 아름다운 대자연과 대조되고, 희망과 미래는 저 멀리 사라져가는 것 같은... 나는 이런 것들을 전에 겪어본 것 같아.

 

그리고 한국인들은 매우 좋은 민족이야. 많은 사람이 이미 죽어가고 있어, 이 ‘불유쾌함’이 끝나면 많은 한국인이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종종 들어.

 

두 번째 편지(1950. 7. 14.)

 

나는 한국인들에게 엄청 미안하게 느끼고 있어. 길에 긴 대열의 피난민들, 공포에 떠는 사람들, 어린아이의 손을 꽉 잡고 걸어가는 여인들, 사랑하는 부모와 생이별을 해야만 하는 아이들, 등에 아기를 업고 걷는 어린아이들,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볼 때면 나는 당신이 생각나. 중국 항일전쟁 시기에 이런 모습으로 길고 긴 난민의 길을 걸었을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여서 마음이 너무 아파. 아마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깊어, 나의 종족들에 대한 마음보다 한국인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져 가는 것 같아. 지금 나한테는 나의 동포가 이젠 ‘외국인’이 되었어.

 

그들은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는, 전쟁 훈련도 받아 본 적 없는, 전쟁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이야. 한 젊은 신병은 태어나 처음으로 시체를 보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울었대. “누가 나오라 명령했어. 돌아가.” 그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모든 한국인이 적으로 보이고 총을 휘두르고 피난민도 죽였어. 그리곤 양민들은 조용히 바위처럼 되어버렸어. 이런 신병들이 영웅이 되었지. 그들은 지난 세계대전 때도 뉴기니아에서 눈부신 전과를 거둔 인간말짜들이었지.

 

세 번째 편지(1950. 7. 15.)

 

북쪽 공포의 지배, 인민재판(확인하기는 힘들지만 북에서의 살인과 숙청에 대한 보고들에는 상당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남한인들이 포로를 다루는 방식! 정치범들이 트럭으로 실려 한적한 길에서 몰래 처형되고 있어. 트럭에 무릎이 꿇리고 울부짖는 비명소리. 어젯밤 통행금지시간 이후 나는 감옥으로 끌려간 2천 명의 긴 행렬을 보았어. 네 사람씩 한 손을 새끼줄에 매고 다른 한 손은 앞 사람의 셔츠를 잡게 했는데, 다수가 여자들이고 등에 아이들을 업었어. 정말 기겁하게 하는 광경이었어. 양쪽으로 10야드마다 권총을 찬 헌병들이 서 있어. 왜 인간은 서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가?

 

여덟 번째 편지(1950. 7. 28.)

 

오늘 아침 너무 황당한 일이 생겼어. 어제 《마지막 청교도》 그 책을 기차에 두고 내린 거야. 600페이지 중 80페이지를 더 읽어야 하는데, 지난 열흘 동안 오직 이 책 하나로 내 영혼을 달래면서 살아왔는데, 이 미치광이와 야수성 속에서 빠져나와 몇 페이지씩 읽는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어. 이 책을 다 읽으면 당신한테 보내주려고 했는데, 이 책은 나를 젊은 시절로 데려갔고, 나의 지난 사랑을 되살렸으며, 남성의 본능이 나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했고, 오직 그것을 통해 나 자신과 세상을 발견하게 했어. 이 책을 읽으며 처한 나의 환경, 즉 비정상, 공포, 증오, 거짓, 고난, 야만 이런 모든 것들이 내 의식을 두드렸고 하루에도 몇 번씩 끌고 갔어.

 

열 번째 편지(1950. 7. 30.)

 

나는 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이번 개입이 과연 통일한국에 기초를 제공할 효과를 줄 수 있을지를 묻게 돼. 미국인들은 한국에서 많은 친구를 만들지는 않아. 어제 나는 미국인들만 타는 기차를 타고 이동했어. 기차가 출발하기 전 상사가 명령하기를 “여러분, 이 기차는 미군 전용기차입니다. 국스(Gooks, 미군들의 한국인에 대한 명칭)들이 타려고 하면 발로 차버려요.” 매일 그들의 공권력으로 미국인들은 도시와 마을들을 박멸해버리고, 한 군인이 50인의 민간인들은 죽일 거야. 공산군이 세우는 인민위원회에서는 이러한 비극을 당한 사람들이 일어서서 이들 구원자의 만행을 욕하고 더 많은 피해와 파괴를 주장하고 있지.

 

열두 번째 편지(1950. 8. 1.)

 

나는 이미 찰스와 함께 부산항에 내려왔어. 그는 프랑스 청년인데, 아름다운 매너에 점잖은 풍자를 드러내지. 그는 “난 공산주의를 싫어하지만, 또한 많은 일이 반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을 싫어한다고 고백해”라고 말했어. 그는 얼마 전에 데이비드와 함께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에 갔었대. 난민들의 참상은 가여운 데이비드의 마음을 깊이 움직였어. 그는 기차 출입문(미국인들과 기자들의 전용문)을 열어 난민들을 모두 기차 안으로 불러들였고, 그가 갖고 있던 현지 화폐 전부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사과와 수박, 쌀을 사주었을 뿐만 아니라 갖고 있던 담배도 나눠줬대. 그리고 한 어린아이를 무릎에 앉혀 내내 보살폈다지.

 

열일곱 번째 편지(1950. 8. 8.)

 

세 가지 광경이 늘 나를 미치게 해. 포로, 피난민, 부상자. 이유는 똑같아. 그들의 참을 수 없는 조건이지. 오늘 우리는 북한군 포로 10명을 실은 트럭을 지나갔어. 젊은이들은 모두 삭발 되었고, 두 손은 새끼줄로 트럭의 칸막이에 묶였으며, 목에는 명패가 걸려 있었어. 부상자들도 목 근처에 명패가 걸려 있어.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의 철학의 근본적 차이는 한 사람에게 개인이 될 수 있거나 아니면 단지 그들의 목에 명패를 거는 단순한 장치인가? 그렇지만 어쩌면 혼란하고 기근이 난 이 세상은 이미 너무 복잡한 장소가 되어 민생의 처리가 시급하다 보니, 이 두 세계는 어쩔 수 없이 팻말을 벗을 수 없나 봐. 난 모르겠어. 당신은 알겠어?

 

 

양승국 변호사 yangaram@lawlog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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