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청화 산수무늬 사각병

2023.01.27 11:52:10

유렵에서 시작된 사각병(유리병)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9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해상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바닷길을 통해 서양으로 건너간 도자기를 우리는 ‘무역 도자’라고 부릅니다. 동서 문화 교류의 산물인 무역 도자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여러 재미있는 사실과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소개하는 <백자 청화 산수무늬 사각병(白磁靑畵山水文四角甁)>은 이러한 무역 도자의 전통 아래 탄생한 작품입니다.

 

조선 후기 백자 사각병의 등장

 

 

<백자 청화 산수무늬 사각병>은 단정하고 차분한 기형에 청화 물감의 발색 또한 안정적인 수준 높은 작품입니다. 몸체에 사각 테두리를 그리고 그 안에 산수무늬를 그려 넣었습니다. 어깨에는 고대 청동기에서 자주 보이는 뇌문(雷文)이 장식되었고, 그 위에는 네 면을 둘러 복을 상징하는 박쥐무늬가 당초무늬와 더불어 그려져 있습니다. 구연의 목 부분에도 ‘만수무강(萬壽無疆)’ 글자를 한 자씩 정성스레 써넣어 조선 후기 백자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길상과 장식화 경향을 잘 보여주는 유물입니다. 굽바닥에 ‘함풍성조(咸豊盛造, 1851~1861)’라는 중국 연호가 있어 19세기 분원가마에서 제작된 왕실용 고급품으로 추정됩니다.

 

사각병은 직사각형 몸체에 어깨의 모서리를 비스듬히 깎아내고 아가리를 붙인 형태를 의미합니다. 조선 후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각병(角甁) 가운데 하나로, 이전 시기 청자나 분청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기형은 물레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특수한 기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흔히 판성형 기법이라고 부르는데, 정제된 백토를 사용해 얇은 판을 밀고 적당히 반건조(半乾燥) 상태가 되면 사각으로 자른 뒤 서로 이어 붙이는 방법입니다.

 

반듯한 직선 형태로 이루어진 사각병 모양이 얼핏 단순해 보이기도 하지만 제작까지는 오히려 복잡하고 세심한 작업 과정이 필요합니다. 흙과 흙을 이어 붙이는 과정을 소홀히 하거나, 설령 꼼꼼히 처리하더라도 굽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기는 균열이나 터짐의 위험을 완전히 막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각병의 굽 부분을 살펴보면 실금처럼 균열이 가있습니다. 이런 조형의 특수성과 제작 공정의 까다로움 탓에 현재 전하는 백자 사각병은 많지 않지만 대부분 정제된 백토를 사용해 공들여 청화 무늬를 그려낸 양질의 백자입니다.

 

유럽의 유리병을 본뜬 중국의 백자 사각병

 

 

백자 사각병이 처음 만들어진 곳은 이웃 나라 중국이었습니다. 동아시아의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한 백자 사각병은 중국의 유럽 수출용 자기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을 선두로 중국에 진출한 유럽이 수많은 도자기를 무역품으로 취급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유럽에 들어온 중국 도자기는 상상 이상의 열풍을 일으켰고, 유럽인들은 서로 앞다투어 중국 도자기를 갖고 싶어 했습니다.

 

특히 당시 유럽의 임금과 귀족들은 개인 수집품 공간을 만들어 중국 자기를 진열함으로써 자신의 지위와 부를 과시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산투스 궁전(Santos palace) 도자기 방이나 독일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Charlottenburg Palace) 내부에 가득한 청화백자들은 당시 유럽인의 열망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1625년 말레이시아 인근에서 침몰한 포르투갈의 배 완리호(Wanli Shipwreck)에는 만력 연간(萬曆 年間, 1573~1620) 중국 징더전(景德鎭)에서 제작된 37,000여 점의 청화백자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 청화백자 가운데는 백자 사각병도 있었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완리호에서 발견된 사각병 조각과 비슷한 백자 사각병이 영국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두 사각병은 기형은 물론이고 상ㆍ하부에 그려진 무늬까지 완벽히 닮았습니다. 영국박물관에 따르면, 몸체 윗부분에 그려진 유럽풍 무늬는 포르투갈의 특정 가문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백자 사각병이 유럽의 주문 제작품이었단 사실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유럽인들은 초기에는 중국에서 생산된 자기를 그대로 수입해 사용했으나, 점차 그들의 취향에 맞는 문양을 그려달라고 하거나 유럽인의 식생활에 맞춘 도자기를 제작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중국에서 제작되어 유럽으로 수출된 백자 사각병은 물레 성형이 아닌 편평한 판을 서로 이어 붙인 판성형 기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네 면이 모두 반듯한 장방형 몸체와 모가 없이 부드럽게 이어지는 어깨 위에 원형의 구연이 딸린 형태로, 중국에서는 보기 드문 기형입니다.

 

반면 당시 유럽의 회화 등에서 이러한 기형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유명 화가 펠더(Esaias van de Velde, 1587~1630)와 할스(Dirck Hals, 1591~1656)의 작품들을 비롯해 정물화, 판화 등 다양한 회화 작품 속에 이러한 기형의 유리제 사각병이 자주 등장합니다. 백자 사각병의 탄생은 당시 유럽에 퍼진 중국 자기의 열풍 속에서 그들의 생활 용기인 유리병을 본뜬 도자기를 주문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백자 사각병과 조형 변화

 

 

중국 자기에 대한 유럽인의 끊임없는 수요와는 반대로 중국은 명말 청초의 정치적 혼란기에 빠져들었고 중국 자기의 유럽 수출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중국 자기에 대한 열망이 끝없이 팽창하자 당시 무역을 주도하던 동인도회사는 17세기 초 자기 제작에 성공한 일본을 대안으로 떠올렸습니다.

 

모모야마시대[桃山時代, 1573~1603]에 남만무역(南蠻貿易)을 통해 유럽인들의 주문을 받아 공예품을 제작한 경험이 있는 일본은 적합한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1697년 침몰한 오스터랜드호(Oosterland Shipwreck)에서 아리타산[有田産] 백자 사각병 조각이 발견되어 일본에서도 유럽 수출용주문 제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일본의 백자 사각병은 어깨 형태가 곡선에서 비스듬히 각진 형태로 변화했는데, 유럽의 유리병을 충실히 모방하고자 했던 중국과는 다른 양식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일본 사각병의 조형적 특징은 19세기까지 이어졌는데 프랑스 화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1902)의〈Young Ladies Admiring Japanese Objects〉(1869)라는 회화 작품에서도 이러한 사각병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본과 조선의 백자 사각병은 양식적으로 유사해 당시 두 나라의 영향 관계를 알려줍니다.

 

동서 도자 교류의 산물, 백자 사각병

 

동아시아의 백자 사각병은 유럽의 유리병을 본뜬 중국의 수출용 자기가 시발점이었지만, 중국과 일본의 백자 사각병과 달리 조선 후기 백자 사각병은 내수용 자기의 성격을 띠며 발전해나갔습니다. 세계 도자의 흐름 속에서 일본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으나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시도하지 않던 사각의 구연을 갖추거나 목가구의 다리 형태를 모방한 굽을 적용하는 등 조선만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거듭났습니다.

 

                                                                                  국립중악박물관(박혜선) 제공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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