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보의 나무ㆍ상아 호패

2023.03.11 11:19:04

남성들의 신분증, 신분에 따라 호패 재질도 달라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 9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호패(戶牌ㆍ號牌)는 조선시대 16살 이상의 남성들이 차고 다니던 신분증으로 조선시대 전시실의 필수 전시품이기도 합니다. 호패법은 1413년(태종 13)에 처음 제정되었으나 시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호패는 호구(戶口)를 파악하여 각종 국역(國役)을 부과하기 위해 발급하는 것이었기에 역을 부담해야 하는 양인(良人)의 반발이 컸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사회 제도를 재정비했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 이르러서야 호패제가 지속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습니다.

 

 

 

신분에 따라 재질과 수록 정보가 다른 호패

 

신분제 사회인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호패 재질도 달랐습니다. 2품 이상의 관리는 상아로 만든 아패(牙牌)를, 3품관 이하 관리는 뿔로 만든 각패(角牌)를, 그 이하의 양인은 나무패를 착용했습니다. 재질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보도 달랐습니다. 착용자의 성명, 출생 연도, 제작 시기, 관(官)이 찍은 낙인(烙印)은 공통 요소이나, 상아ㆍ각패에는 나무 호패에 있는 신분과 거주지 정보가 없고 대신 과거 합격 시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패와 각패에는 신분증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주지 정보가 없습니다. 이는 아마도 아패와 각패가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공무원증의 역할을 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분에 따른 호패와 수록 정보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예가 이정보(李鼎輔, 1693-1766)의 나무 호패와 상아 호패입니다. 이정보(본관 연안 延安)는 관직으로는 종1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까지 오르고 품계로는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를 받은 18세기 고위 관료입니다. 그의 청년과 중년 시절의 삶을 추정할 수 있는 정보가 나무와 상아 호패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정보의 나무 호패

 

나무 호패에 새겨진 글귀를 보면 20살 이정보가 어디서 살았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무 호패 앞면에는 “동부(東部) 이정보(李鼎輔) 계유생(癸酉生) 동학생(東學生)”이, 뒷면에는 “임진(壬辰) 숭교방(崇敎坊) 1계(一契) 제6통(第六統) 제4가(第四家)”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곧 이정보는 계유년(1693)에 태어났고 20살인 임진년(1712)에는 동부학당(東部學堂)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으며 한성 5부 중 동부의 숭교방 1계 6통 4가에 거주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글귀에서 이정보라는 한 인물의 개인 정보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한성의 행정구역과 사부학당(四部學堂) 제도의 운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 ‘방’, ‘계’ - 조선시대 한성의 행정구역

 

호패에 적혀 있는 ‘부(部)’, ‘방(坊)’, ‘계(契)’는 한성의 행정구역입니다. 조선이 개국한 뒤 1394년(태조 3)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다음 행정구역을 정비했습니다. 다음 해인 1395년(태조 4) 6월 6일 한양을 한성부로 개칭했습니다. 1396년(태조 5)에는 도성 안을 동ㆍ남ㆍ서ㆍ북ㆍ중부 5부(部)로 나누고 그 아래 방(坊)과 계(契)ㆍ동(洞)을 두었습니다. '부'는 지금의 '구'와 같은 단위입니다. ‘동부’는 현재의 종로구 혜화동ㆍ이화동ㆍ숭인동ㆍ창신동ㆍ종로5가동ㆍ종로6가동에 해당합니다.

 

조선시대 동부는 도성 안으로는 연희방ㆍ숭교방ㆍ창선방 등 10개 방, 도성 밖으로는 숭신방과 인창방 2개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방’ 아래에 ‘계’ 단위가 있는데, 이정보가 살았던 숭교방에는 1계와 2계가 있었습니다. 숭교방은 현재의 명륜동1·2·3가 일부와 혜화동 일부에 있습니다. 숭교방 1계는 아마도 지금의 명륜동2가(혜화역 4번 출구 일대)로 추정됩니다.

 

 

호패에 적혀 있는 ‘통(統)’과 ‘가(家)’로 인해 당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시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가작통법은 다섯 집[家]을 한 통(統)으로 하고 통주(統主)를 두어 관리하는 행정 자치 제도입니다. 숙종대에 이 제도를 강화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농사를 지을 때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돕게 하려는 취지를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유랑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고 세금 납부를 독려하는 의도가 컸습니다.

 

동부학당 – 중등관립학교

 

 

호패 앞면의 ‘동학생’은 동부학당의 학생을 말합니다. 동부학당은 한성에 설립된 국립 중등학교 가운데 하나입니다. 동부 말고도 남ㆍ중ㆍ서부에도 세웠습니다. 사부학당은 고려 제도를 따른 것으로, 1411년(태종 11) 남부학당, 1422년(세종 4) 중부학당, 1424년(세종 6)에 동부학당과 서부학당을 조성했습니다. 학당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부속된 예비 학교로, 이곳에서 공부를 마치면 성균관으로 진학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학당마다 학생 정원은 100명이었으며 기숙사가 있었습니다.

 

동부학당은 창선방(彰善坊, 현 종로6가 62번지), 중부학당은 관광방(觀光坊, 현 중학동 83번지), 서부학당은 여경방(餘慶坊, 태평로1가 62번지), 남부학당은 성명방(誠明坊, 필동1가 24번지)에 있습니다. 지도에는 각각 동학, 중학, 서학, 남학으로 표기했습니다. 이정보가 다닌 동부학당은 흥인지문 서북쪽 건너편인 동학동계(東學洞系)에 있었습니다. 숭교방 1계에 살던 청년 이정보는 지금은 복개되어 볼 수 없는, 현재 대학로 아래를 흐르고 있는 흥덕동천(興德洞川)을 따라 30분 정도 걸어서 동부학당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정보의 나무 호패에 새겨진 글자를 찬찬히 살펴보면 청년 이정보의 삶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정보는 40살부터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의 중년 기록은 많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 146회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 호패에 수록된 청년 이정보의 삶은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어서 값어치가 높습니다.

 

이정보의 상아 호패

 

 

이정보는 29살인 1721년(경종 1) 진사시에 합격했고, 40살에 드디어 정시 문과에 급제했습니다. 정9품 검열(檢閱)을 시작으로 이정보의 관직 생활은 이어졌습니다. 그의 나이 56살인 1748년(영조 24) 1월에 종2품 함경감사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정보의 상아 호패는 이 시기에 발급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아 호패 앞면에 “이정보(李鼎輔) 계유생(癸酉生) 임자 문과(壬子文科)”, 뒷면에 “무진(戊辰)”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정보는 계유년(1693)에 태어났으며 임자년(1732)에 문과에 급제했고, 무진년(1748)에 2품 이상의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기에 제작되었을 초상화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해집니다. 이정보가 관복을 입고 종2품 이상의 관원이 착용하는 허리띠인 학정금대(鶴頂金帶)를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초상화는 함경감사로 임명된 1748년 이후에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종2품이 되어 영예로운 상아 호패를 발급받은 의미 있는 1748년을 기념 삼아 초상화를 제작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

 

강직한 성품의 이정보

 

초상화에서 그의 얼굴을 보면, 그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바른말을 잘한 신하였습니다. 사헌부 정5품 관리로 있던 1736년(영조 12), 영조(英祖 재위 1724-1776)에게 신하를 대하는 태도, 탕평책 등에 대해 9조목의 상소를 올려 충언했습니다.

 

또한 70살인 1762년(영조 38) 4월에도 세손(훗날 정조)의 스승으로서 강의할 때, 이정보는 “전하께서 지나치게 질문하시기 때문에 신들도 대답을 올리기 어렵습니다.”라고 영조에게 직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올바름을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제학으로서 과거시험을 공평하게 주관하여 당시에 이정보를 매우 칭찬하였다는 평이 그의 졸기(卒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호패, 초상화, 문헌기록으로 이정보가 20살되던 해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의 삶을 단편적으로나마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을 파악할 때 호패와 같은 역사 자료 하나가 좋은 실마리가 될 수 있음을 이정보의 호패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수경) 제공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