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들을 살피고 있다. 몇 신료들을 요약ㆍ정리해 본다. 이번에는 신장과 심온을 보자.
신장(申檣, 우왕 8년 1382~ 세종 15년 1433)
신장은 조선 태종~세종 때의 문신이다. 20살의 젊은 나이에 급제하고, 세종 때 창설된 중요한 학문 기관인 집현전의 첫 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명필로도 널리 알려졌다. 세조~성종 대 중요한 대신인 신숙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신숙주(申叔舟) 등 다섯 아들을 두었다.
주요 활동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1382년(우왕 8) 윤2월에 태어났다. 1402년(태종 2) 식년문과에 20살의 젊은 나이로 급제한 뒤 예조 · 병조 · 이조정랑을 거쳐 세종 3년(1421)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세종 14년(1431) 공조참판에 이르렀다.
경력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집현전의 첫 번째 부제학으로 발탁되었다는 것이다. 세종은 세종 2년(1420) 3월 집현전을 창설하면서 부제학을 임명하지 않고 신장을 일단 직제학에 제수하였다가 이듬해 7월 부제학으로 승진시켰다. 이른 나이에 급제하고 중요한 학문 기관인 집현전의 첫 책임자로 임명된 것은 신장의 학문적 능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신장은 학문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였다. 원자(뒤의 문종)에게 《소학》을 가르치고 사대문서를 전담하였으며, 《태조실록》ㆍ《정종실록》ㆍ《태종실록》ㆍ《팔도지리지』 등을 펴내는 데 참여하였다.
정초(鄭招) · 정인지(鄭麟趾) · 윤회(尹淮) 같은 당시의 주요 문신들과 함께 「헌남산지곡(獻南山之曲)」을 지어 바치고, 《동인문(東人文)》과 《익재집(益齋集)》을 교정하기도 하였다. 할아버지 신덕린과 함께 명필로 평가되었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실록》의 신장 졸기를 보자.
“공조 참판 신장(申檣)이 갑자기 졸(卒)하였다. 본관(本貫)은 고령인데, 사람됨이 온후(溫厚)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시가(詩歌)와 문장에 능하고 초서(草書)와 예서(隷書)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 죽음에 미쳐 허조가 듣고 탄식하기를, "이런 어진 사람을 오직 술이 해쳤다." 하였다. 치부(致賻, 임금이 신하가 죽었을 때 내리는 부의(賻儀)하기를 명하였다. 아들 다섯이 있는데 신맹주(申孟舟)ㆍ신중주(申仲舟)ㆍ신숙주(申叔舟)ㆍ신송주(申松舟)ㆍ신말주(申末舟)였다. (《세종실록》 15/2/8)
심온 (沈溫, 1375 ?~ 1418)
세종과 함께 일한 경력은 적지만 세종의 장인이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조선 개국공신 심덕부(沈德符)의 아들이며, 1408년 딸이 충녕군(忠寧君)의 비가 되어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은 뒤 벼슬이 높아졌다.
고려 말 나이 11살에 감시(監試)에 급제하고, 아버지와 함께 조선 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392년 조선이 개국한 뒤 병조와 공조의 의랑(議郞)을 지냈다. 정종 때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가 태종 때 지각문사(知閣門事, 조선 시대 초기 각문(閣門)의 종3품 벼슬)를 거쳐 상호군으로 승진하였고, 태종 7년(1407) 승정원 동부대언으로 발탁된 뒤 좌부대언, 동지총제에 임명되었다. 이후 태종 11년(1411) 풍해도(豊海道)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돌아와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조금 후에 대사헌에 올랐다.
태종 14년(1414) 형조ㆍ호조 판서와 한성부판윤, 의정부참찬, 좌군도총제를 역임하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지방의 관직을 수행할 때는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병사들의 사사로운 백성 침탈과 군기소홀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가하였으며, 성품이 인자하고 온순하여 물정(物情)에 거슬리지 않았다고 한다. 1418년 태종이 선위하여 세종이 즉위하자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임금의 장인으로 영의정부사에 임명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갔다. 그가 명나라로 떠난 때 많은 사람이 연도에 나와 배웅하였는데, 이것이 상왕이었던 태종에 보고되어 태종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이때 병조좌랑 안헌오가 "심정(沈泟)이 박습ㆍ강상인과 더불어 사사로운 말로 ‘이제 호령이 두 곳(상왕과 세종)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한 곳(세종)에서 나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였다고 무고하였다. 이것은 당시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상왕 태종의 권한을 비판한 것으로서 이를 계기로 강상인의 옥사가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강상인과 박습 등이 참수되었고, 그 우두머리가 명나라에 사은사로 간 심온으로 지목되었다.
심온은 사은사에서 돌아오는 즉시 의주(義州)에서 체포된 뒤 수원(水原)으로 압송되어 사약을 받고 처형되었는데 이때의 나이 44살이다. 이 사건은 심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걱정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이 무고한 것으로 밝혀져 문종 때 관작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중복되겠지만, 실록의 심온의 졸기를 보자.
“이양(李揚)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심온은 이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명을 내리기를, "심온은 비록 예(禮)를 갖추어 장사지내지 못할지라도, 또한 후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이양달(李陽達)을 보내어 장사지낼 땅을 가려 정하게 하고, 수원부(水原府)에 명하여 장사(葬事)를 치르게 하며, 또 관곽(棺槨)ㆍ종이ㆍ석회(石灰)를 내려 주고, 내관(內官)을 보내어 장사를 돌보게 하고, 있는 곳의 관원이 제사 지내게 하였다.
심온은 경상도 청보군 사람으로... 나이 11살에 고려의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국초(國初)에 병조와 공조의 의랑(議郞)을 역임하였다. ... 임금이 왕위에 오르매, 국구(國舅, 임금의 아버지)로서 청천 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하고, 조금 후에 영의정부사가 되었다가 이때 이르러 죽으니, 나이 44살이다. 심온은 성품이 인자하고 온순하여 물정(物情)에 거슬리지 않았다. 평소에 심온이 하윤(河崙)과 뜻이 서로 맞지 않았는데, 어느 날 심온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하윤이 빈객(賓客)과 많이 교통하고 뇌물을 많이 받아들이며, 대낮에 첩의 집에 드나드니, 추잡한 행실이 이와 같습니다." 하면서, 장차 장차 임금에게 고하고자 하므로, 임금이 상세히 상왕에게 아뢰니, 상왕이 말하기를, "신하가 밀계함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며, 또 외인(外人)의 의심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하여, 마침내 불러 보지 아니하였다.
양녕이 덕을 잃으매, 여러 신하가 다 임금에게 마음이 돌아가게 되며, 양녕도 가끔 임금의 어진 덕행을 말하니, 상왕이 이를 듣고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고, 인하여 심온에게 경계하여, 감히 공공연하게 말하지 말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사인(士人,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을 널리 접촉하지 말고 조심하여 법도를 지키라."고 하였다. 구종수(具宗秀)의 일이 발생하자, ... 의금부에서 아뢰니, 상왕이 임금에게 이르기를, "내가 심온에게 그처럼 경계하였는데도, 이런 사람들과 교통하고, 또 말하는 바가 이와 같은 것은 어찌 된 까닭인가." 하였다.
심온이 중국 서울에 갈 적에 상왕이 임금에게 이르기를, "네 왕비의 아버지가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 매양 세밑이 되니, 친히 왕비의 종족과 더불어 그 집에 가서 잔치를 베풀어 위로할 것이라."라고 하더니, 그가 돌아오기 전에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 이때 이르러, 상왕이 임금에게 말하기를,
"심온이 전일에 손을 사절하고 조용하게 지내겠다는 뜻을 내가 심히 옳게 여겼더니, 지금 이와 같은 것은 무슨 까닭이냐."라고 하였다. 상왕이 임금에게 매양 이르기를, "네 비(妃)의 집은 상이 나서 무너졌으나, 오직 안수산(安壽山)만이 홀로 남아 있으니, 마땅히 고관대작에 임명해야 할 것이다."
고 하므로, 수산이 얼마 아니 가서 중추부로 들어왔다.(《세종실록》즉위년 12/25)
심온은 임금의 장인에서 아래 사람들에 대한 관리 잘못과 오해 그리고 태종의 왕권강화의식이 낳은 건국 초기의 내홍(內訌)의 가운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