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대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일상의 대부분을 선과 악의 숲을 들락거리게 마련이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자신이 선인이 되거나, 악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 악인이 선인인 척하는가 하면, 선인이 악인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무릇 모두가 원하는 선인으로 살아가기는 무척이나 어려운가 보다. 아무리 자신이 선인이라 하지만 마음은 항상 악의 숲을 들락거리기 때문이다. 다만 악을 좀 더 적게 지을 따름이지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어서다. 그렇기에 악에 물들어 버린 자는 선을 뒤로한 채 악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거소습불이여구(渠所習不以與狗)” 이는 “제 버릇 개 못 준다.”라는 말이다. 이처럼 자신의 못된 습성은 죽어서도 고치기 어렵다고 함이겠다. 어쩌다 악인이 뜬금없이 개과천선(改過遷善)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려운 일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묻지 마’ 살인사건이 있었다. 텔레비전에 비친 화면에 외양으로는 우리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양순한 사람 같아 보이건만 어찌 인간의 탈을 썼는가 싶을 만큼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질러 세간을 경악게 했다. “저렇게 곱게 생긴 여성이 어떻게 저런 살인을 저질렀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왜 사람을 죽였는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살인해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6월 13일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도 비슷한 ‘묻지 마’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교차로에 멈춰 선 승용차에 한인 부부가 타고 있었는데, 30살 흑인 한 명이 달려와 다짜고짜 총기를 난사해 조수석에 탑승한 남자는 팔에 총을 맞았고, 운전석에 있던 여자는 머리와 가슴에 총탄 4발을 맞고 현장에서 죽었다. 여성은 32주 임신부로 뱃속 아기도 숨졌다. 총을 난사한 범인과는 일면식도 없는 관계였는데 어떻게 이 같은 사건이 일어날까? 모두 의아할 따름이다.
이렇게 순간적으로 악인으로 변하여 범죄를 저지르는 사건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범죄의 성격을 지켜보노라면, 우발적이라기보다 누구나 마음속에 지닌 악과 선 가운데서 어떤 것이 강성이냐에 따라 힘이 센 쪽이 심리적 작용에 따라 앞서게 되는가 싶다. 이 경우 악성이 압도적으로 강했고, 그동안 범죄자는 악성을 키워온 결과라고 보아야 하겠다. 물론 선한 마음을 키우면 선인이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은 누구랄 것 없이 마음속에 선과 악의 양면적 인자(因子)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악을 다스리지 못하면 타인에게 해악을 저지르고 별별 끔찍한 사건을 자행하게 될뿐더러 추하고 혐오스러운 존재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누구나 개개인의 성향을 모르기 때문에 어제 어느 때 어떤 사람이 어떻게 악인으로 둔갑하여 나를 헤칠지 모른다. 그 때문에 항상 긴장된 마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불가에서는 이런 연유로 인간이 사는 세상을 고해(苦海), 이른바 괴로움이 끝이 없는 세상이라고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그러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는 어렵지만, 상대의 마음을 잘 헤아려야 하고 경계 또한 늦추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자식이 부모를 살해하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세상이니 말이다.
선인만 존재하는 세계는 없는 것일까?
악인만 존재하는 세계는 있을까?
그런데 악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가 있다고 한다.
날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고,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고, 돈 걱정, 집 걱정, 옷 걱정할 일 없는 세계. 산해진미(山海珍味)가 가득하고, 힘들게 일할 필요 없이 로봇 같은 도우미가 나의 모두를 관리해 주어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단 한 가지 근심 걱정 없이 마음 편하게 사는 세계가 있다고 했다. 이를 일러 천당이나 극락이라고 한다. 내용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세계에 살고 싶은가?”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천당이나 극락을 선택하리라 싶다. 그러나 천당과 극락은 죽어서 가는 곳이기에 지금 당장 갈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악인들이 득실거리는 지옥세계를 희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악이 없는 선의 세계만 고집한다면, 천당과 극락 같은 세상이 현생에 있어 그곳을 간절하게 희망하더라도 선한 사람만 모여 사는 세계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혹자들이 말하기로, 흉측한 죄를 저질러 놓고도 절대신(유일신)만 믿으면 어떤 죄라도 면죄되어 그 세계에 갈 수 있다고 하니, 믿음으로 면죄는 되었을지언정 살인마가 그 죄를 어떻게 지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때문에 죄인으로, 악인으로 고스란히 떠안고 천당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하여 천당이라고 해도 악인들이 득실거릴 수밖에 없다는 샘이 된다. 또 그곳에 참으로 깨끗하고 바르게 세상을 살았던 선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몇이나 되겠는가.
사실 선과 악의 본질을 따져보면, 선이 없으면 악이 없고 악이 없으면 당연히 선이란 있을 수 없다. 선과 악은 서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히 선만 존재하는 세계는 있을 수 없을 것 같고, 설령 있다하더라도 “내가 그곳에 가서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 하고 한 번쯤 냉정하게 생각해볼 필요성도 있을 것 같다.
이렇게 선과 악을 나누어 생각해보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것을 떨쳐내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마음 가운데는 어느 때고 선과 악이 서로 대립하면서 끊임없이 꿈틀대다가 어느 한순간 대상을 접하면 선과 악이 번갈라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마음작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 마음 가운데는 선과 악이 끊임없이 생겨나기 때문에 선한 마음도 내 마음이요, 악한 마음도 내 마음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선악일여(善惡一如) -선과 악이 하나다.‘-라고 했다. 그 때문에 이 사회는 별수 없이 선인과 악인이 함께 동승하여 물 흐르듯 흘러가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붓다는 이 같은 세계를 일컬어 사바세계(娑婆世界) -괴로움이 많은 인간 세계-라고 하였다. 사바세계야말로 선인과 악인이 몸을 맞대고 더불어 사는 세상, 이곳이야말로 이상세계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누가 뭐래도, 세상이 천지개벽을 하여도, 죽었다 깨어나도 인간 세상에서는 누구도 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맹자는 성선설(性善說)을 설파했고, 순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그리고 붓다는 불성(佛性)을 설파했다. 맹자가 말한 성선설은 사람이 선하여지려고 노력함으로써 스스로 완전해진다는 뜻이요,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은 자기욕구의 충족을 위한 악함이 있다는 의미다. 그런가 하면 불성이란 모든 만물은 애당초 티 없이 깨끗한 마음[佛性]을 가지고 있는데, 태어나 살아가면서 생존경쟁에 의해 악한 마음(때)에 물들어 불성이 흐려진다고 하였다.
누가 선하게 살기를 거부하여 악인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과연 누가 악하게 살기를 원하겠는가. 다만 악의 고리를 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본래 선하고 착하건만 사람과 사람의 부딪힘 속에서 때가 묻어 악인이 된다는 것이나, 본성 속에 악함이 있어 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악은 우리 마음속에서 결코 없앨 수 없는 하나의 성품으로서 작용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는 논리에 공감하게 한다. 이 가운데 선을 추구하는 쪽이라면 내 마음속에 있는 악을 잘 다스려 선화(鮮花)로 곱게 피어나게 하여 무명(無明) - 잘못된 의견이나 집착 때문에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마음-을 밝히는 사람이 되라고 성인은 이같이 말하고 있다.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
자정기의 시제불교(自淨其意 是諸佛敎)
- 칠불통계(七佛通戒 -
모든 악은 저지르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하라. 이것이 곧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악을 경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것은 성인들이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 도리는 일반적인 도덕이다. 따라서 누가 뭐래도 자기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이 밖에도 선을 지향하는 말들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다. 요즘 가장 시청률이 높은 SNS에서도 선(善)을 권장하는 내용들이 가장 많이 올라온다.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범죄 사건이 많아지는 것은 무엇일까? 문제는 누구나 자기만큼은 선인이라고 생각할 뿐 자기를 좀먹는 악성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사회의 구성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내가 주인공이라고 했다. 그런 내가, 선인이 되어야 하고, 사회 정화는 나로부터 시작되고, 내가 청렴하고 바르게 살아갈 때의 이야기다. 그런데 선행과 깨끗함과 청렴을 상대의 몫으로 돌린다. 내가 어떤 악행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면서 자신인 선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남의 탓으로 돌리려는 악한 습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겉으로는 선인인 척 이중 인격체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들을 이따금 보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어떤 정치인들의 공방을 보더라도, 내로남불을 외치면서 자기만은 항상 청렴결백하고 완벽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내 마음도 모르는데 타인이 마음속을 어떻게 알랴마는 선하고, 악하고, 속고, 안 속고가 문제가 아니라 “녹슨 쇠가 자기 몸을 파고들어 가듯이”, 기필코 어긋난 행동이 모두 자기 자신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 같다.
누구나 내가 사는 세상이 극락정토(極樂淨土)가 되기를 바란다. 착하고 마음 따뜻한 사람들만 살아가는 세상을 원한다. 그러나 세상은 날이 갈수록 인정은 메말라가고, 혼돈과 아귀다툼이 더욱더 치열해지고 있다. 무엇 때문에, 왜! 이렇게 사회가 험악해지고 살벌하게 변해 가는지, 그 답을 외부에서 찾으려 하는가. 한 번쯤은 각자 자신을 뒤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파사현정(破邪顯正)는 그릇된 것을 깨뜨려 없애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악과 선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내 마음과 그릇된 행동이 개선되지 않고서는 도저히 세상이 맑고 깨끗하게 변하지 않는다. 각자 모두 몫이다. 물론 내 마음속에 악을 완전하게 제거할 수는 없다. 다만 악이 솟구치더라도 조심스럽게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악을 지혜롭게 다스리는 지혜를 중도(中道)-고와 낙의 양면을 떠나서 심신(心身)의 조화를 얻는 길-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우리 마음과 일치시켜 말하기를, 평상심(平常心)-오로지 한가하고 한가한 마음 바탕-이라고 했다. 그런 다음 선과 악을 넘어선 경지는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주적 공심’이라고 한다. 우주적 공심이란?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의 핵심이다. 우주적 공심 속에서는 선도 악도 본래 없었다. 이것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했다.
푸른 하늘에 한 조각 구름 떠간다.
인연 따라 생겨나 천만 가지 모습
시시때때 모양 바꾸며 흐르는데
그 모습 가운데
선(善)인들 악(惡)인들 품고 흐르겠냐만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흐르고 흐르다 흔적 없이 흩어지는 것들
너와 내가 어찌 알까?
아는 체하지 말라 세상만사 다 그렇거늘
밤새워 둘러앉아 뜬구름 잡고 있네
- 일취 선시(禪詩), <인생>의 전문 -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은 공간 속, 선과 악의 너머에는 우주적 공심이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