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묘조에 여러 신하들을 추복(追復, 빼앗았던 벼슬을 죽은 뒤 회복시킴)시켰을 때와 선묘조에 군흉(群凶, 흉악한 무리)을 추삭(追削, 죽은 사람의 벼슬을 깎아 없앰)하였을 때를 참고하여 옛글과 교문(敎文, 죄인을 사면하기 위해 임금이 내리는 글)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 이와 같이 처분한 후에도 이 일을 다시 제기하는 자가 있을 것 같으면 마땅히 멀리 유배라도록 하는 법을 시행할 것이다. 아! 가까운 신하들은 나의 이 분부를 조정과 민간으로 하여금 모두 분명히 알게 하여야 할 것이다.“
위는 《영조실록》 5권, 영조 1년(1725년) 4월 10일 기록으로 영조 임금이 즉위하고 반년이 지난 뒤 탕평책을 대내외에 밝힌 것입니다. 노론ㆍ소론ㆍ남인ㆍ북인 등이 휩쓴 붕당정치의 폐해를 겪었던 영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붕당 타파를 위한 탕평을 적극 추진했습니다. 또 영조에 이은 정조는 외척을 정권에서 배제하고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깨끗한 신하를 등용했으며, 규장각을 개편하고 인재를 양성하여 자신의 측근으로 삼아 왕권 강화를 꾀했지요.

탕평정치는 필연적으로 왕권의 신장과 임금을 중심으로한 정국의 안정을 가져왔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의 시행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또 영조ㆍ정조대에 각종 책을 펴낸 것을 비롯하여 문예운동이 활발했던 것도 이런 정치적 안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탕평책은 권력집단간의 세력균형 도모가 중심 목표가 아니라, 왕권의 신장과 안정된 정국을 기초로 의리나 명분보다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 수 있었음에 그 의의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