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화 보살의 무주상보시의 뜻을 기리고자

  • 등록 2025.08.24 10: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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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뭐꼬의 장편소설 <꿈속에서 미녀와> 28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할머니는 젊어서 백석과 이별한 이후 해마다 백석의 생일날인 7월 1일에는 세 끼를 굶고서 백석에 대한 그리움을 되새겼다고 한다. 그녀는 1997년에는 2억 원을 출연해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살던 자야오당(子夜晤堂)에는 멋진 편액 한 편이 걸려 있다. “유주학선 무주학불 有酒學仙 無酒學佛 (술이 있을 때는 신선도를 따르고, 술이 없을 때는 부처를 배운다)” 그녀가 찾아갈 부처는 백석일 지도 모른다. 그녀는 노년까지 백석의 시를 조용히 읽는 것이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김대중 정부에서 이루어진 남북 화해 이후 백석에 관해서 많은 것이 밝혀졌다. 그녀가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백석은 자야와 헤어져 만주로 가서 사업을 했다. 해방이 되면서 백석은 만주에서 귀국하여 고향인 평북 정주에서 살았는데, 초기에는 문학 활동을 활발히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석은 1962년에 김일성 찬양시 '나루터'를 발표한 이후 창작활동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백석은 1996년에 죽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남북 화해가 조금 일찍 시작되었더라면 두 사람은 이산가족으로서 재회할 수도 있었으련만, 너무 늦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가 대원각을 기증하고 죽은 뒤, 2001년 11월 말에 서울민사지법의 한 판결문이 그녀의 이름 석 자를 다시 신문에 나게 하였다. 그동안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던 그녀의 외동딸 서정온 씨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법원은 “KAIST는 서 씨에게 44억 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조정이 성립되었다고 밝혔다. 3년을 끌어온 이 소송은 그녀가 사망하면서 자신의 재산 가운데 현금과 부동산 등 31억 원을 딸에게 남겼지만, 서울 서초동 빌딩 등 122억 원 상당의 나머지 재산 모두를 “과학발전에 써 달라”면서 KAIST에 기증하면서 발생한 분쟁이었다.

 

그 후 백석의 ‘고향’이라는 시가 2003년 11월 수능시험 국어 영역에서 출제되었는데, 그만 정답 둘을 인정하는 소동을 빚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교육부 장관이 사표를 내고 수능을 출제한 교육과정평가원장이 해임되고 말았다. 백석은 죽었지만 그의 영향은 아직 남아 있음일 것이다.

 

그녀는 1999년 83살 되던 해에 백석을 만나러 하늘나라로 승천하였다. 할머니는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뜰에 뿌려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필자는 이 소설의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2015년 5월 초에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 찾아가 보았다. 극락전 왼쪽 작은 다리 건너편에 그녀의 공덕을 기리는 작은 비가 세워져 있었다. 공덕비의 뒷면을 보니 “길상화 보살의 무주상보시의 뜻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2001년 11월 21일 비를 세웠다”라고 쓰여 있었다. 공덕비의 사진을 여기에 올린다.

 

 

길상사 이야기를 끝내자, 그랜저는 과천을 지나 서울에 진입하게 되었다. 도로에는 차가 많아졌다. 차선을 바꾸지 않으니, 운전은 어렵지 않는데 차가 많아지면서 자꾸 정체된다. 차가 가다서다를 반복하니 아무래도 운전에 신경이 쓰여 이야기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서울은 만원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서울로 몰려드는 것일까? 서울에는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의 도로는 항상 정체가 심하고 서울의 대기는 오염되었고 서울의 거리는 소음이 심한데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려드는 것은 무언가 좋은 것이 서울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일자리와 좋은 학교가 서울에 모여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국에서 서울로 몰려드는 것이다. 서울이 만원이라고 다른 사람들을 탓하지 말자. 서울이 만원이 된 것은 바로 K 교수 때문이다.

 

차는 K 교수의 목적지인 양재역에 가까워졌다. 그런데 옆자리를 흘깃 보니, 아니 이럴 수가.... 미스 K가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고 조수석에 기대어 자는 것이 아닌가? 자는 사람 눈치 보지 않고 정면으로 뚜렷이 바라보니, 잠자는 미녀의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다. 눈 뜬 미녀보다는 자고있는 미녀의 모습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다. K 교수는 난처했다. 잠자는 미녀를 깨우고 싶지 않았다. 마침, 약속 시각은 한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으므로 K 교수는 미녀를 깨우지 않고 계속 시내로 진입하였다.

 

차는 이제 양재역을 지나 한남대교로 향하였다. 한남대교를 넘으면 남산터널을 거쳐 도심으로 진입하게 된다. 도심까지 들어가면 아무래도 약속 시각에 늦을 것 같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K 교수는 미녀를 살짝 불러 깨웠다.

 

미녀는 예쁜 눈을 뜨더니 “어머, 내가 졸았나 봐요. 아니, 여기가 어디에요? 한강을 지나잖아요. 교수님, 양재에서 내린다고 하셨는데... 아이 미안해요.”라고 당황해한다. K 교수는 “잠자는 미녀를 차마 깨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한남대교 건너서 내리면 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한남대교 건너서 오른쪽 길가에 깜빡이를 켜고서 차를 세웠다. K 교수는 운전석에서 내렸다. 미스 K는 “K 교수님,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파스타 밸리에서 만나요.”라고 말한 뒤 그랜저를 운전해 남산 쪽으로 사라졌다.

 

(계속)

 

 

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muusim2222@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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