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소동파의 문사향(聞思香)
향기를 들을 수 있는 동파여 (돌)
오감을 튕겨 가락을 듣는 이 (초)
홀로 그 얼마나 쓸쓸했기에 (달)
코호강 생각에 귀가 가렵나 (빛)
... 25.2.4. 불힌시사 합작시
소동파(蘇東坡)에게 향(香)은 단순한 취미나 풍류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난과 유배의 세월 속에서 스스로 지켜내는 하나의 수행법이자, 일상의 자리에서 도(道)를 잇는 조용한 공부였다. 옛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향을 통한 수행, 곧 ‘향공(香供)’ 혹은 ‘향관(香觀)’의 전통을 이어왔다. 향을 피우는 행위는 종교적 제의이면서 동시에 마음을 가다듬는 수련이었고, 향을 바라보고 맡고 사유하는 전 과정이 하나의 수행 체계였다.
향을 크게 나누어 보면, 연기로 드러나는 '향연(香煙)'과 보이지 않는 '향기(香氣)'가 있다. 향연은 눈앞에서 피어올랐다가 이내 흩어지는 찰나생멸의 형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생멸의 이치를 그대로 드러내는 무언(無言)의 설법과도 같다. 피어오르는 곡선과 흔들리는 흐름 속에는 미묘한 운율, 다시 말해 존재의 리듬이 깃들어 있다. 향연을 바라보는 일은 곧 무형의 형상을 관조하는 일이며, 삶의 흐름을 잠시 멈춰 세워 바라보는 내면의 눈을 기르는 일이다.
반면 향기는 코로 맡지만, 실은 마음으로 느끼는 기운이다. 향기는 잡히지 않으나 분명히 작용하며, 그 미묘한 기운은 사람의 정서와 의식을 조용히 흔들어 정화한다. 향기를 따라 호흡이 가라앉고, 마음이 고요해지며, 일상의 소음 속에서도 잠시 깨어 있는 자리를 회복하게 된다. 이처럼 향연은 형상으로 무형심을 보여주고, 향기는 기운으로 미묘한 각성을 일으킨다.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할 때, 향은 단순한 냄새를 넘어 하나의 수행 매개가 된다.
소동파가 말한 ‘문사향(聞思香)’이란, 바로 이러한 향 수행의 정수를 함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향을 "듣는다(聞)"라는 것은 감각의 차원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그 향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한다(思惟)"는 데까지 나아가는 일이다. 향을 코로 맡되, 마음으로 듣고, 그 듣는 마음으로 다시 자신을 비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사향’은 후각의 쾌락이 아니라, 감각을 매개로 한 사유의 수행이며, 몸과 마음을 하나의 리듬으로 조율하는 내면의 공부라 할 수 있다.
유배지에서의 소동파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졌으되, 오히려 자기 자신과는 더욱 가까워졌던 인물이다. 천애 고도의 외로운 삶, 벼슬길에서 밀려나 먼 변방을 떠도는 고난의 세월 속에서, 그가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글과 술, 차와 더불어 바로 이 향의 고요한 동행이었을 것이다.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향연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향기를 들이마시며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순간, 그는 세속의 억울함과 분노를 잠시 내려놓고, 삶의 깊은 곳에서 다시 숨을 고를 수 있었으리라.
불한시사의 시벗 라석이 먼 중국 해남땅 소동파의 적거지에 가서 귀한 ‘문사향’을 가져와 선물해주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향품(香品)을 옮겨왔다는 뜻을 넘어, 동파의 고독한 수행 정신과 향을 통한 내면 수련의 전통을 오늘의 자리로 옮겨온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향 한 가닥 연기 속에는 천년의 고독이 깃들어 있고, 향 한 줄기 기운 속에는 유배지에서 견뎌낸 한 문인의 마음공부가 스며 있다. 그 향을 피우는 순간, 우리는 소동파의 방 한편에 함께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셈이 된다. 향연이 흔들릴 때 마음도 흔들리고, 향기가 사라질 때 생각도 사라지는 그 자리를 자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문사향의 핵심이 아닐까 한다. (옥광)
| ㆍ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의 불한티산방에서 만나는 시벗들의 모임이다. 여러 해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답시(和答詩)와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합작시의 형식은 손말틀(휴대폰) 화면에 맞도록 1행에 11자씩 기승전결의 모두 4행 44자로 정착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으로 싯구를 주고받던 옛선비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