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홍신자의 기이한 실험은 <푸나의 추억>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인도는 가정에까지 종교적 금욕이 파고 들어가 있는 나라다. 성에 관한 한 철저히 폐쇄적인 이 나라에서 그 체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은 결혼밖에 없을 것이다. 이해가 갔다. 다음 날 저녁 무렵, 우리는 아슈람(주, 라즈니쉬의 가르침을 따르는 국제명상센터) 밖 시내 한 지점에서 만났다. 릭샤(주, 인력거의 하나)를 타고 얼마를 간 후, 나는 그를 따라 작은 여관 비슷한 곳으로 들어갔다. 거울 하나 걸리지 않은 방 한쪽엔 옹색한 세면실이 딸렸는데 수도꼭지 하나와 찌그러진 양동이 하나만 달랑 놓여 있었다.
그는 준비해 온 향불을 피운 다음 전등을 끄고 대신 촛불을 켰다. 조금씩 나오는 수돗물에 몸을 씻고 나온 그는 긴 천 하나로 몸을 감더니 가부좌를 하고 벽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는 명상에 들어갔다. 나도 몸을 씻고 나와서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곧 바잔(주, 신을 찬양하고 헌신을 표현하는 힌두교의 노래)을 부르기 시작했다. 종교적이고 성스럽고 평화로운 가락, 나도 그를 따라 흥얼거렸다.
그렇게 바잔 만을 부르는 상태로 꽤 긴 시간이 흘렀다. 두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가 이상하게까지 생각되었다. 나는 가락에 취한 척 열심히 바잔을 흥얼거렸지만, 머릿속에는 이런 남자도 다 있구나, 하는 생각이 오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남자는 다 어떻다는 식의 통념의 잣대로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오히려 순수하지 않은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슬며시 부끄러웠다. 어디까지나 그는 성의 체험을 신성한 종교적 체험으로 끌어가고 싶은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도 그것이 아닌가.
이윽고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희미한 촛불 사이로 우리는 서로의 두 눈만을 응시하였다. 그 곳에 남자와 여자는 없었다. 한 인간과 또 다른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눈빛에서 남자를 초월하고 여자를 초월한 어떤 교감을 보았다. 성이 잊혀진 것이다. 그런 순간이 왔을 때 우리는 서로 손을 꼭 잡고 천천히 누웠다.
잠시 후 다시 일어나 앉은 그는 내 몸을 조심스럽게 훑어보았다. 그는 여자의 알몸을 처음 보는 것이라며, 여자의 몸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 몰랐다고 속삭였다. 한두 개의 손가락으로 찬찬히 나의 팔을, 나의 어깨를, 나의 가슴을 느껴 본다. 떨리는 그의 손끝이 그의 온몸에 실린 전율을 전해 오고 있었다. 나는 수동적인 상태로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의 애무가 점점 짙어진다 싶은 순간이었다. 그는 거친 호흡을 한번 한 뒤, 모든 것을 중단하고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천을 다시 몸에 두르고 아까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욕정이 그를 엄습해 왔고, 그것에 휩쓸리고 있는 자신을 감당할 수 없어지자, 그는 물러나 버린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다시 바잔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구원을 바라는 듯, 잔잔하지만 간절히 무엇인가를 애원하고 있었다.
나도 마음을 가다듬고 일어나 앉았다. 우리는 다시 거리를 두고 그렇게 마주 앉은 채 바잔 만을 불렀다. 약간 어수선하고 미묘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서 희미한 촛불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둘은 말없이 끝내 바잔 만을 불렀다. 천천히 새벽이 오고 있었다.“
홍신자씨 책에 나오는 밀교에 관한 진지한 이야기를 미스 K는 흥미 있게 들었다. 밀교에 심취한 인도 청년의 기이한 청을 들어준 홍신자 씨는 평범한 여성은 아니었다. 실험정신이 강하다고 말할까? 자유인이라고 부를까? 우리에게 익숙한 유교적인 고정관념으로 보면 파격적인 여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홍신자의 영적 스승 라즈니쉬는 누구인가?
라즈니쉬는 1931년에 자이나교(Jaina敎)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러 종교의 경전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인도에서 철학교수로 활동하며 명상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했다. 그는 인도에서 구루(주, 영적인 스승)로서 높이 평가되었는데, 1970년 푸나에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공동체에는 서양에서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다. 홍신자는 1976년에 한국인 최초로 라즈니쉬 제자가 되었다. 그녀는 3년 동안 공동체 생활을 하다가 인도를 떠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1993년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경기도 안성군 죽산에 ‘웃는 돌 명상센터’를 설립하였다.
라즈니쉬는 198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미국의 서부에 있는 오리건주 사막에 260 km2의 땅을 매입하여 전 세계에서 온 추종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공동체가 지역 주민들과 충돌하고 선거 개입을 목적으로 한 생화학 테러 사건에 연루되었다. 라즈니쉬는 이민법 위반 혐의를 인정하고 1985년에 미국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강연과 명상 워크숍을 하며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그는 1987년 푸나의 옛 아슈람으로 돌아가 공동체 활동을 이어가다가 1990년(59살)에 병사했다. 라즈니쉬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그의 사후에는 인기가 쇠락하였다.
그는 미국의 젊은 세대가 추구했던 히피(hippie)라는 시대적 배경에 맞추어 자유로운 섹스를 긍정하였다.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자로서의 태도를 고수하였다. 그는 역동적인 명상법을 개발하였는데 현대인의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성에 대해 보수적인 인도에서 비난을 받았다. 그 결과 라즈니쉬 제자의 절대다수는 서양인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홍신자의 뒤를 이어 작가 류시화, 개그맨 장두석 등이 라즈니쉬의 제자로 알려졌다. 라즈니쉬의 명상 서적들이 2010년대 초반에 ‘치유’ 열풍과 맞물려 인기를 끌었으나 차츰 시들해졌다. K 교수는 라즈니쉬가 해설한 《반야심경》을 읽어 보았는데, 불교의 핵심 경전인 《반야심경》을 잘 설명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기억에 남는 것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관계를 “강둑이 없으면 강물도 없다”는 비유로 설명한 것이었다. 색을 강둑, 공을 강물로 설명한 비유가 참신하며 이해하기 쉬웠다.)
홍신자와 밀교 그리고 라즈니쉬 이야기가 끝나고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K 교수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이번 일요일에 저녁 식사를 여기서 할 수 있나요? 대학 동창들과 K리조트 골프장에서 골프 모임이 있는데, 골프가 끝나고 친구들에게 은정 씨를 자랑할 겸 식사를 하면 좋겠는데요.”
“원래 일요일에는 주방장이 안 나와서 차 종류만 하는데, 교수님께서 말씀하시니 제가 간단한 식사를 준비해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일요일 저녁 6시쯤 8명이 오겠습니다.”
전위 무용가 홍신자 이야기를 길게 하다 보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이제는 아쉽지만, 집에 가야 한다. 결혼한 남자는 아내가 기다리는 집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물론 역(逆)도 성립한다. 결혼한 여자는 남편과 한집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센스 있는 미스 K가 먼저 말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사모님이 기다리실 거에요. 제가 모셔다드리지요.”
미스 K는 약속대로 그랜저를 운전하여 K 교수를 수기리 집에까지 데려다주었다. K 교수는 낮에 아내에게 “오늘은 학회 행사로 밤늦게 들어온다.”라고 전화를 해 두었다. K 교수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초저녁잠이 많은 아내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K 교수는 그날 밤 알코올의 힘을 빌려서 처음으로 미스 K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는데, 거절을 당한 셈이다. 미스 K가 가는 곳마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예쁜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들 듯, 수많은 남자가 미스 K에게 접근했을 것이다. 용기 있는 남자 몇몇은 데이트를 신청했을 것이다. 남녀 교제에 관한 한 미스 K는 산전수전을 다 겪었을 것이다.
K 교수가 큐피드의 화살을 한 번 쏘아서 미스 K를 죽산 예술제에 데려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면, 그것은 세상 물정 모르는 대학교수의 순진한 기대였다. 이 세상에서 쉬운 일은 없다. 그러니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너무 실망하지 말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을 믿어 보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