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1950년 12월 20일 북한 동해안의 가장 큰 항구인 흥남항의 부두는 10만의 미군들과 장비들, 그보다 더 많은 북한주민이 뒤섞여 큰 혼란이 벌어졌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간신히 흥남으로 온 미군들의 남쪽으로의 철수가 최대의 과제였다. 당시 동해안 지역을 관할 하는 제10군단의 에드워드 아몬드 (Edward Almond) 군단장은 모든 가용 군함을 동원해 적군의 포화가 떨어지는 위급한 상황에서 미군들의 철수작전을 펼쳤다. 미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주민은 마을마다 집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흥남부두로 향했다.
이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곧 참혹한 현실 혹은 죽음이었다. 이같은 사정을 본 맥아더 사령부의 민사고문인 현봉학 박사는 미군 군함에 피난민을 함께 실어달라고 아몬드 군단장에게 긴급 요청했으나 당장 군인들의 생명을 구해야 할 상황에서 피난민을 수송할 수는 없었다. 현봉학 박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미 10군단 참모부장겸 탑재참모였던 미 해병대의 포니(Edward S. Forney) 대령을 통해 다시 간절히 요청한다.
결국 그의 진심과 간절함에 아몬드 중장이 결단을 내려 피난민들의 수송을 허가한다. 그렇게 해서 근 10만에 이르는 북한 주민들이 차례로 흥남을 통해 남쪽으로 내려오게 된다. 미군은 태울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태웠다. 피난민들은 어느 사람도 먼저 타려고 아우성을 치지 않고 차례를 기다렸다. 이 피난민 가운데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친이 있었고 필자의 장인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공산 치하를 벗어나 남쪽의 한국민이 된 것이다.
그렇게 피난민들을 수송한 마지막 배는 우리가 이제는 그 이름을 아는 메레디스 빅토리호, 승조원 35명과 장교 12명, 그리고 승객 최대 12명 등 59명을 태울 수 있도록 설계된 길이 450피트(137.16m), 폭 50피트(15.24m)의 화물선이었다. 미군은 군사물자를 버리고, 기중기 팔(boom)과 즉석 제작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피란민 1만 4,000명을 차례로 태웠다. 그 많은 피난민은 질서정연했다. 모두가 함께 차례를 기다려 배를 탔다. 25년 뒤인 1975년 4월에 베트남 패망 때 마지막 철수를 하는 미군 비행가와 배에 올라타려던 베트남인들이 수없이 떨어져 숨지는 것 같은 비극적 사고는 없었다.
남아있는 피난민을 다 태우니 그 숫자가 1만 4천 명이었다. 그들은 화물선에 발을 디딜 곳이 있으면 어디든 올라서 있었다. 그들은 배에 올라서 서로 가슴을 맞대고 서 있거나 갑판의 기계와 제트 연료 드럼통 위에도 누워 있었다. 이 배가 남쪽으로 830킬로미터를 항해해서 12월 23일에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이미 항구는 밀려드는 선박으로 댈 자리가 없어 기다리다 못해 그다음 날 거제도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다시 항해해서 성탄절인 25일에 거제도에 도착해 우리 땅으로 올라온다.
먹지도 못하고 물도 못 마시는 악조건 속에 피난민들은 28시간을 참았다. 그리고 사망자 없이 모두가 무사히 내려왔다. 그 사이에 5명의 아기가 배안에서 새로 태어났다. 도착하자마자 12월 25일 성탄절. 교회에 나가는 분이나 아니나 이들 모두에게 역사상 가장 큰 성탄절 선물이 되었다.

2년 전 미국 워싱턴 포스트(WP)는 '한국전쟁 성탄절 기적'이란 제목으로 박토리아호를 끌고 온 레너드 라루( Leonard LaRue 1914 ~2001) 선장의 기적과 같은 피난민 수송을 재조명했다. 라루 선장은 빌 길버트 WP 기자가 2000년 발간한 저서 《기적의 배》를 통해 "해안에서 쌍안경으로 안타까운 장면을 목격했다"라며 "부두에는 탈영과 미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중공군에게 참수 위협을 당한 북한 난민들이 가득 차 있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아무런 무장도 없는 이 화물선은 공격만 받으면 그냥 침몰이었다.
당시 미군의 고문관으로서 미군당국에 피난민들의 수송을 간곡하게 요청해 승낙받은 의사 현봉학 박사(1922~2007)는 나중에 한국의 쉰들러로 유명해졌고 서울역 앞 연세대 세브란스 자리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영화 '국제시장'에도 그가 나온다. 단 한 척의 배로 가장 많은 난민을 수송한 배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004년에 기네스북에 올랐다. 한국의 언론들은 철수 70돌이 된 2020년, 이 기적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아니 더 기억해 주어야 할 미군 장성이 있다. 바로 당시 군사물자를 버리더라도 피난민을 수송하는 것을 허가한 미군 10군단장 에드워드 아몬드 중장이다.

아몬드 장군은 1892년 미국 버지니아주 루레이에서 태어나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에 육군 보병 장교로 임관한 뒤 제1ㆍ2차 세계대전에 모두 참전하였고, 종전 뒤에는 맥아더 총사령부의 인사참모부장 및 참모장을 역임했다.
6ㆍ25전쟁 당시에는 미(美) 제10군단장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에서 상륙군을 지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인근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악화하자 흥남에서 철수작전을 계획했다.
흥남철수작전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작전이었으나, 아몬드 소장은 현봉학 박사, 포니 대령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위험을 무릅쓰고 10만여 명의 피란민들을 이남 지역으로 수송하기로 했다. 아몬드 군단장이 군인들의 수송만을 고집했다면 10만의 북한 주민들은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랬을 것이다. 그랬다면 문재인 대통령도 없었을 것이고, 필자도 지금의 가족을 꾸리지 못했을 것이다.
흥남철수작전의 성공으로 국군 1군단과 미군 10군단은 전투력을 보존하고 이듬해부터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에 참여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야말로 영국이 자랑하는 던커크 철수작전을 능가하는 큰 역사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아몬드 장군은 6ㆍ25전쟁 당시 미군과 우리 군 승리의 주요한 장면에서 결정적인 공을 세웠음을 우리들은 지나쳐보고 있다. 그는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 밑에서 참모장을 하면서 인천상륙작전의 세세한 전략을 세워 9월 15일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을 통해 상륙할 때 사령관을 수행했다.
그러고는 한강을 건너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적군의 퇴로를 차단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으며 다시 동해에서도 원산 상륙작전으로 우리 군과 유엔군이 일찌감치 북한으로 처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공로로 그해 10월 23일에 미국 대통령이 주는 수훈십자장을 받았는데 그 공적서를 보면 아몬드가 얼마나 영웅적인 지휘를 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인천을 점령하는 동안, 아몬드 장군은 직접 최전선 부대를 방문하고 전술적 노력을 조율했으며, 자신의 용감한 모범을 통해 부대들이 부여된 목표를 점령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인천 함락 뒤, 알몬드 장군은 직접 병력을 지휘하여 적 점령 지역을 가로질러 신속하게 진격하여 서울을 점령하고 적군 전력의 와해를 가속화했습니다.
한강 도하 공격 중, 그는 도하를 관찰하고 통제하기 위해 아군 전선보다 훨씬 앞선 전방 위치로 이동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적의 중포격에도, 아몬드 장군은 남아 한강을 건너는 제7보병사단 선두 부대를 보호하는 공군과 포병 지원을 감독했습니다. 적의 지뢰밭과 저격수 사격을 무시하고, 그는 도하 지점으로 나아가 상륙용 전차의 사격을 지휘하여 도하를 방해하는 적의 저항을 무력화했습니다.
그의 감동적인 지도력, 위험에 대한 완전한 무관심, 그리고 전장 통제를 통해 아몬드 장군은 제10군단의 작전 지역에서 적군을 섬멸하는 전술 작전을 신속하게 종결시켰고, 그의 지휘하에 있던 병력의 수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 훈십자장 증서
그러고는 1950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피난을 위한 민간인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현봉학 박사 등 한국군과 미군 지휘관의 요청에 응해 한국 민간인들의 해상 철수를 허가하고 지휘하여 이들을 살린 것이다. 아몬드 장군은 그다음 해에 중장으로 승진한다. 1951년 7월 아몬드는 10군단을 떠나 미 육군대학 총장으로 취임했고, 1953년 1월 31일 중장으로 퇴역했다. 1979년 죽은 뒤에는 미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과 사위는 이미 2차대전 때 군에서 전사하였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군인가족이었다. 그렇게 아몬드 중장은 벤 플리트 장군과 더불어 전쟁에서 자식을 앞세운 미군 장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공적은 2020년 9월에야 대한민국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2020년 9월에 6ㆍ25전쟁영웅으로 뽑아 기리기로 한 것이다.
전쟁은 무수한 피를 요구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젊은이들이 이 땅에 와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숨지고 다쳐 평생을 고생했다. 수백만의 우리 국민도 남과 북에서 죄도 없이 죽어갔다. 그런 전쟁에서 가장 고귀한 공헌은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다. 살릴 수 있는 한 사람들을 많이 살리는 것이, 거창한 인류애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가장 값어치 있는 행동이자 선택이다.
그렇게 지휘관으로서 북한 주민들을 구하는 결정을 해 준 지휘관 아몬드 중장을, 당시 배를 끌고 온 메레디스 호 선장과 선원들과 함께 오래 기억해 주는 것이 우리들의 도리일 것이다. 온 나라 사람들이 전적으로 우리를 도와준 미국이란 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때 급박한 사정에 가족들을 챙기지 못하고 그 배에 올라 남쪽으로 내려오신 필자의 장인도 마침 올해 연말로 돌아가신 지 40년이 된다.
12월 25일이 되면 흥남철수작전이 늘 생각난다. 장인어른은 어떻게 살다가 나오셨을까? 남겨둔 가족들은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그때 현봉학 박사나 레너드 대령, 그리고 아몬드 장군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현재는 어떻게 되었고 나는 또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