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筆)과 먹(墨)의 이야기 / 정 인갑

  • 등록 2005.01.30 0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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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筆)과 먹(墨)의 이야기 문방 사보(상)필. 묵 중국 전통문화에서 "붓(筆)","먹(墨)""종이(紙)" 및 "벼루(硯)"를 총괄하여 "문방사보 文房四寶"라고 한다. 두 번에 걸쳐 문방사보를 소개하고자 하며, 여기서는 먼저 붓과 먹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허베이(河北) 츠산(磁山), 간수(甘肅) 따띠완(大地灣)에서 발굴된 신석기 시대 유적(약 7천년전)의 질그릇에 붓으로 그렸다고 추정되는 그림이 있으며, 갑골문(약 3천년전)에도 붓으로 쓴 후 미처 새기지 못한 글들이 있으니, 붓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붓의 가장 오래된 실물은 1954년 후난(湖南) 창사(長沙)에서 발굴된 전국시대의 붓과, 1975년 후베이(湖北)윈멍(雲夢)에서 발굴된 진(秦)나라 때의 붓이다. 전자는 털을 붓대의 밖에 감았고, 후자는 붓대 속에 꽂았다, 후자는 또한 붓대의 끝이 뾰족한 것으로 보아 비녀붓 일 것이라고 추정된다. 붓을 비녀처럼 머리나 모자에 꽂아두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썼다는 기록이 문헌에 있는데 , 이를 비녀붓이라 한다. 한나라 때의 붓은 발굴된 실물이 많다. 이 시기 붓의 전형적인 것으로는 붓대를 네쪽의 나무를 동여매어 만든 붓인데, 이는 붓끝이 망가지면 언제라도 바꿀 수 있다는 특색이 있다. 문헌에서는 이를"퇴필(退筆)"이라 일컬었다. 한나라 때에는 전문적으로 붓을 만드는 장인도 있었다. 간혹 붓대에 "백마작 白馬作","史虎作"등의 글이 새겨진 것이 있는데, 이"백마""사호"가 바로 장인의 이름이다. 붓깃의 가운데는 빳빳한 염소털을 썼고, 바깥은 좀 부드러운 족제비털로 썼다. 이를 피주법(披柱法)이라 하는데, 지금 까지도 붓 제작에 애용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당,송(唐宋) 때 붓 제조업이 크게 번성했다. 우선 붓을 전문적으로 제조하는 지역이 생겼다. 당나라 대는 쉔저우(宣州)의 붓이 유명해 "선호"(宣毫)라고 했고, 송나라 때는 후저우(湖州)의 붓이 유명해 "호필 (湖筆)"이라고 했다. 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염소 털로 만든 호필은 사람들이 알아 준다. 붓 끝에 쓰는 털도 염소, 사슴, 노루, 살쾡이, 쥐(수염) 범. 여우, 성성이, 쪽제비(꼬리)담비, 원숭이, 수달피, 들쥐, 닭, 거위, 오리, 돼지, 사람(수염)......등 못쓰는 것이 없었다. 붓의 질을 따지는 데는 "사덕(四德)" 이라는 개념이 있다. 즉"尖"뾰족 "齊"정연 "圓"원활" 健" 빳빳해야 한다. 붓끝을 만드는 재료별 특성을 보면, 염소털(羊毫)은 부드럽고길며, 토끼털(紫毫)은 탄성이 강하고 빳빳하며 족제비털(狼毫)은 탄성이 토끼털 다음이며, 닭털(鷄毫)이 가장 부드럽다. "羊毫" "狼毫"라 함은 중국어로 염소를 "山羊"족제비를"黃鼠狼"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한국인들은 "양털""승냥이 털"로 착각하기 쉬우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필자도 이전에는 이렇게 착각하여 왔었는데, 이번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구석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석묵(石墨), 신석기 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검은 염료,문헌에서 "먹"으로 썼다는 나무에서 나오는 검은 즙, 오징어 검은 즙 등은 모두 천연적인 원료이고, 전통문화에서 말하는 문방사보(文房四寶)의 먹은 인공적으로 제조한 먹만을 일컫는다. 갑골문을 쓴 먹이 인공으로 제조한 단질 탄소라는 것이 증명됐으므로 중국 먹의 역사는 3천년 이상이 된다.1975년 후베이 윈멍 쑤이후띠(虎地)에서 발굴된 먹은 지금까지 발굴된 것 중에 가장 오래된 먹으로, 지금으로부터 2.200년 전의 유물이다. 이 먹은 송연(松烟)소나무를 태운 연기를 노루 , 고라니, 소의 가죽으로 만든 아교에 반죽한 것이다. 먹의 크기가 작으므로 벼루에 넣고 절구 공이 같은 돌로 부수거나 갈아서 썼다. 송대" 宋代"에 석유나 유동(오동 나무씨의 기름)태워 먹을 만드는 방법이 개발됐다. 이때부터 먹의 제조지역이 소나무의 산출지에서 국한될 필요가 없어졌고 송림을 대량으로 파괴하는 현상도 방지할 수 있게 됐다. 한 대(漢代)부터 먹의 제조법이 급속히 발전했다. 우선 먹을 제조하는 지역에 따라 유명한 먹들이 생겼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에는 허베이(河北) 이현(易縣)의 묵을 易墨, 산시(山西) 루저우(路州)을 노묵(路墨). 당대(唐代) 명대(明代)에는 안후이(安徽) 휘이저우(徽州)의 휘묵(徽墨) 등이 그 것이다. 역대로 먹을 만드는 장인 중에 손 꼽을 수 있는 사람으로는 삼국시대 (三國時代)의 위탄(韋誕); 당대의 조민(祖敏), 해조(奚朝), 해정규(奚廷珪);송대의 장우(張遇) 반곡(潘谷),소해(蘇海), 심규(沈珪), 대언형(戴彦衡), 포대소(浦大韶), 섭무실(葉茂實); 명대(明代)의 나소화(羅小華), 정군방(鄭君房,) 방우로(房于魯), 소격지(邵格之); 청대 (淸代)의 조소공(曹素功), 왕근성(汪近聖), 왕절암(汪節庵),호개문(胡開文), 정정로(程正路), 정일경(程一卿) 등이 있다. 위의 이름들이 새겨 있는 먹의 진품이 있다면 부르는 것이 값이므로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뜻에서 되도록 많이 열거했다. 먹에 관한 문헌에 한민족과 관계되는 내용도 있다. 낙랑에서 제조한 먹은 가볍고 섬세하여 아주 좋지만 , 아교가 나쁜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반곡이란 사람은 공물로 들어온 낙랑의 먹을 부수어, 다시 자신이 만든 아교에 반죽하는 방법으로 최상품의 먹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 고려시대에 어느 사신이 소해가 만든 먹을 얻어갔으면 하여 황제가 이를 허락하는 조령을 내렸는데 ,소해는 겨우 열 개 밖에 주지 않았다 한다. 그때 소해의 먹이 황금보다 비쌌기 때문이다. 정인갑 / 중화서국(中華書局) 사전부(辭典部) 주임, 청화 대학중문학과 객원교수
김영조 sol119@hanaf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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