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문다. 옛 시인이 “술이 있다 한들 뉘와 함께 마실까…” 라고 쓴 글을 읽다가, 마치 시인의 고독한 심정에 감염된 것처럼 가슴 속에 찬 바람이 인다. 그리고 지금 시인처럼 저마다 혼자가 되어 마음 나눌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해가 바뀌고, 새로운 길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 번거로운 말 대신 술잔 만으로도 통하는 사람을 가진 이들은 행복할 것이다.
방해꾼 없이 조용한 시간을 내어 사람을 기다리는 옛 시인의 마음에 어울릴 음악을 골라보는데, 술잔 대신 찻잔 기울이며 다우삼매(茶友三昧)에 빠진 이들의 정겨운 시간이 음악 듣는 마음을 따끈하게 녹여준다. 박일훈 작곡의 ‘다우삼매’(서울음반, ‘찻잔 속에 스미는 사계’ 수록곡)라는 작품이다.
작곡자 박일훈은 “흰눈이 보스락 보스락 싸립문 위에 나리는 섣달 그믐…. 오랜만에 찾아 온 친구와 마주앉아 지나간 세월을 보듬어 보던 추억. 사무사(思無邪) 아무아(我無我 ) 같은 것이었던가?”라며 오랫동안 품어 온 추억의 시간을 조촐한 실내악 풍으로 반추했다. 이 곡에서는 대금과 해금, 열여덟 줄 가야금이 어울리고, 여기에 흙을 구워 만든 ‘훈’이라는 악기와 몇 개의 타악기 음향이 아주 깊은 겨울밤의 분위기를 들려준다. 유리병에 입을 대고 불 때 나오는 소리처럼 어둡고 신비로운 훈의 소리는 대금과 해금, 가야금 소리를 더욱 도탑게 끌어안고 흘러간다. 여기에 반복적으로 울리는 마른 대나무 채 소리는 마치 ‘보스락 보스락’ 끝도 없이 내리는 눈 소리처럼 들려오고, 풍경 소리 같은 놋쇠 타악기 울림은 ‘다우삼매’의 평온한 공간을 그림처럼 실어다 주는 음악이다.
이 곡을 여러 차례 반복해 들으면 이들의 찻잔대화가 들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말’은 역시 들리지 않고 세상을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사는 이들의 화기애애한 웃음만 떠오른다. 너무 심각하지 않게, 너무 무겁지 않게. 인생이 애달프다거나, 시들하다는 생각 대신 유쾌한 웃음으로 사는 이들의 시간이 이 음악 속에 흐르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음악처럼 송구영신(送舊迎新) 했으면 좋겠다.
(숙명여대 전통문화예술대학원 교수 dalsure@hanmail.net )

송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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