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레빗=이윤옥 기자] 이른 아침 잔디에 이슬이 촉촉이 맺혀있는 인원왕후 무덤 명릉(明陵)에 다녀왔다. 고양시 서오릉(西五陵) 안의 명릉에 잠들어 있는 인원왕후 무덤을 찾은 데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그의 친정아버지 김주신이 머물던 대자동의 영사정(永思亭)과 관련된 기사를 쓰다가 인원왕후를 알게 되었고 공부를 하다 보니 이 집안사람들의 인품이 사람을 매료하게 하는 점이 있어 인원왕후를 좋아하게 되었다.
인원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실제로는 민경왕후 김씨, 인현왕후 민씨에 이어 3번째)왕비이다. 나이 16살에 왕비가 되어 숙종과 19년을 살았지만 소생이 없었다. 그러나 숙종 사후 경종과 영조를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특히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연잉군은 훗날의 영조임금이다. 숙종과 최무수리 사이에서 태어난 영조는 인원왕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국왕이 된 이래 인원왕후를 친어머니만큼 극진히 모셨으며 인원왕후 사후에는 눈물을 흘리며 친히 대왕대비행록(영조 33년,1757년)을 짓기도 하였다.
▲ 인원왕후 무덤 (아래 언덕 왼쪽에는 숙종과 1계비 인현왕후가 잠들어 있다) |
“한 번 바람이 불거나 한 번 비가 내리는 것도 한결같이 지나쳐 버리신 적이 없었고, 만약 소자가 능묘(陵廟)에 행례(行禮)할 때를 당하면, 혹 합문(閤門)을 열고 기상을 관측하거나 혹은 뜰에서 거닐며 하늘을 쳐다보고 관찰하였는데, 만약 날씨가 맑고 바람이 잔잔하면 소자를 대해 기쁜 뜻을 먼저 유시하셨으나 혹 오래도록 장마가 지거나 오래도록 가뭄이 들면 한 번 구름이 끼고 한 번 개일 때마다 번번이 소자를 위로하셨다.(중략) 아! 당론(黨論)은 바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근본이므로 이 폐단을 매우 염려하셨는데, 말씀이 간혹 이 문제에 미치면 반드시 척속(戚屬)은 서로 경계하여 편당(偏黨)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매우 강개하셨으니, 국구(國舅)의 집안에만 훈계한 것이 아니고 이는 또한 성자(聖慈)의 교화가 미치는 바였다.”
대왕대비행록을 통해 영조는 인원왕후와의 추억을 낱낱이 적으면서 몇 번이고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했다. 대왕대비로서 당파싸움에 대한 분명한 의사를 표현했으며 당파싸움 말만 나오면 비분강개했다는 기록을 통해 대궐에서의 단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며 쓴 국문학사에 빛나는 인원왕후 작품 |
인원왕후는 효자로 소문난 친정아버지 김주신(1661~1721)과의 일화가 많은데 그의 아버지는 행실이 반듯한 사람으로 궁중을 드나들 때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까닭은 “딸을 통한 권력 부탁”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의 일이다. 인원왕후와 궁중 안을 걷고 있을 때 마침 궁 안을 걸어오던 내인(內人)이 인사하는 것을 아버지가 못 알아보자 왕비가 물었다. “아버님은 몇 해 동안 마주치는 사람을 능히 알지 못하심은 어떤 까닭이옵니까?” 이에 대한 아버지 김주신의 대답이 걸작이다. "신이 감히 궁궐을 다니지만 어찌 감히 눈을 들어 둘러 보리오까? 마음이 황송하여 눈을 들 수가 없습니다.”
딸을 왕비로 앉히고 갖은 이권과 권력을 쥐려했던 조선시대의 몇몇 친정아버지에 견주면 인원왕후의 친정아버지는 참으로 겸손하다. 김주신은 자신의 아버지 김일진(인원왕후의 외할아버지)의 무덤을 만들 때 비석을 소등에 얹어 실어 날랐는데 소가 숨이 차서 혀를 빼물고 헐떡이는 것을 보고 너무 측은하여 그 뒤로부터는 소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할 만큼 효심이 깊은 분이었다.
▲ 인원왕후는 홀로 묻혀 있다. |
인원왕후는 그러한 아버지 밑에서 수양을 쌓은 덕에 유달리 친정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 같다. 그는 국문학사에 빛나는 한글 작품을 남겼는데 돌아가신 아버지 경은부원군 김주신이 살았을 때의 일화를 적은 ≪션군유사(先君遺事)≫와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션비유사(先妣遺事)≫가 그것이다.
또한 ‘시경’에 나오는 부모의 키워준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뉵아육장>, 중국 고대 모범적인 여성 이야기인 <노모사>, 자신의 늙음을 한탄하는 <노용자탄직금도>와 같은 작품도 남아 있어서 평소 국문으로 글쓰기를 좋아 했던 인원왕후의 단아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인원왕후 무덤은 서오릉(西五陵)묘역의 명릉(明陵)에 있다. 명릉은 숙종임금과 첫째 왕비 인현왕후의 쌍분이며 둘째 왕후인 인원왕후는 왕릉 정면에서 보아 왼쪽 편에 약간 떨어져 홀로 모셔져 있다. 숙종임금 하면 떠오르는 장희빈의 무덤도 서오릉 묘역에 있으나 인원왕후 무덤과는 반대편 쪽에 멀리 떨어져 있다.
▲ 인원왕후 무덤으로 오르는 명릉 주변에 심은 둘레솔 |
고양시 서오릉 관리소에서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주차장 끝 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가깝게 만 날수 있는 명릉! 인원왕후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는 무덤 조성 당시 심었을 굵은 적송이 키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한글을 사랑하고 궁궐의 어른으로서 절도와 품위를 유지한 인원왕후의 단아한 모습처럼 무덤은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격조 있어 보였다. 무덤을 둘러보고 내려오는 데 어디선가 상모솔새의 상쾌한 노래소리가 들려 사방을 돌아다보니 참도(參道) 주변의 노란 민들레와 흰 조팝나무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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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오릉>
서오릉 지역이 능역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에 의경세자가 사망한 뒤 풍수지리설에 따라 경릉을 조성하면서부터이다. 서오릉은 추존왕 덕종과 덕종 비 소혜왕후의 능 경릉,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능 창릉, 19대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인 명릉,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 등 총 5기의 왕릉을 기본으로 하여, 명종의 세자 순회세자와 세자빈 공회빈의 순창원, 영조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의 수경원 등 2기의 원, 그리고 숙종의 후궁이었던 희빈 장씨가 묻힌 대빈묘 1묘 등 총 5기의 왕릉과 2기의 원, 1기의 묘로 구성되어 있다.
*주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
*전화 : 02-359-0090
*입장료 : 1,000원
*누리집 : http://goyang.cha.go.kr/n_goyang/index.html
<서삼릉>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과 인종과 부인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이 들어서면서 왕릉군이 된 곳이다. 이후 주변에 후궁이나 대군, 공주의 무덤이 조성되었고 철종과 그의 부인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이 들어오면서 서삼릉이 되었다. 서삼릉의 경내에는 3원과 49묘, 태실 54기가 있다.
*주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전화 : 031-962-6009
*입장료 : 1,000원
*누리집 : http://goyang.cha.go.kr/n_goyang/index.html
**이윤옥 :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고양"에 둥지를 튼 지도 어언 17년째이다. 주차문제로 연일 시끄럽던 서울을 떠나 아파트가 아닌 작은 단독을 짓고 살면서 내 고장 ‘고양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고양(高陽)은 올해 땅이름이 생긴지 600년을 맞이하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요즘 사람들은 꽃전시회니 킨텍스니 해서 ‘현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지만 고양에는 조카의 왕위 찬탈을 거세게 반발한 사육신을 조명한 추강 남효온 선생을 비롯하여 고양8현(高陽 8賢)과 같은 대쪽 같은 선비들의 이야기가 무궁무진 포진해 있는 곳이다.
‘문화행위’가 점점 껍데기와 이벤트성으로 흘러가는 시대일수록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한 깊이 있는 역사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글쓴이는 2006년에 편찬된 《고양시사》 전 7권에 집필위원으로 참여 한바 있다. 그때 속속들이 소개하고 싶은 고양문화와 역사이야기를 따로 뽑아 두었는데 이제 그 이야기보따리를 얼레빗 신문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