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신이 북적대던 고양동 벽제관터

2013.05.09 06:31:48

[고양문화통신 3] 일본에서 육각정자 뜯어가

 [그린경제=이윤옥 문화전문기자]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벽제관 터는 수퍼나 우체국에 갈 때면 으레 들리는 곳이다. 지금은 주춧돌만 덩그마니 남아 있지만 이곳은 일제강점기 총독부 학무국에서 심의한 조선고적(朝鮮古蹟) 명소에 뽑힐 만큼(1931.6) 고색창연한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 할 때 반드시 들러야하는 오늘날의 인천국제공항과 같은 중요한 관문이었다.

   
▲ 지금은 터만 남은 벽제관터(한자 지 '址'보다는 우리말 '터'로 고쳐 써야 한다 )

벽제관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세종 5년(1423) 9월 5일)을 보면 세종임금이 중국 사신을 배웅할 때 벽제관까지 세자를 보내야할지 말지에 대해 묻고 있다.

“예전에 사신 황엄(黃儼)이 돌아갈 때에, 세자(世子)가 벽제관(碧蹄館)까지 나가서 전송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또 세자가 작별할 때 읍(揖)을 해야하나? 절(拜)을 해야하나?” 라고 하니,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등이 아뢰기를,

“예전에는 세자께서 이미 장성하였으니 벽제관까지 가서 전송하는 것이 옳았지마는 지금은 세자께서 나이 어리니 갈 수 없으며, 교외(郊外)에서 배례(拜禮)하는 것도 또한 옳지 못합니다.” 라고 하면서 세자의 벽제관 배웅을 못마땅해 한다. 

이후 연산군 때에도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세자가 벽제관까지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론은 ‘아니오'였다. 그 대신 신하들은 뻔질나게 사신 접대를 위해 벽제관을 드나들어야 했다. 그러한 역사적인 공간인 벽제관은 1960년 무렵까지만 해도 객관문(客館門)은 남아 있었으나 이후 무너져버려 현재는 객사의 윤곽과 터, 그리고 210센티(7尺) 간격으로 둥근형태(원좌주초석)의 장대석(長臺石)만이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다. 

벽제관이라고 하면 1592년 임진왜란 때 벌어진 벽제관 전투를 빼놓을 수 없다. 벽제관 전투는 명군(明軍)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명군은 고바야가와가 거느린 일본군 3대(隊)에 포위 공격당하게 되었다. 명군은 포군(砲軍)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 기병만으로 싸웠지만 일본군 조총의 집중사격을 받아 크게 패하게 되었고, 뒤늦게 도착한 명의 화군(火軍) 도움을 받아 간신히 일본군의 추격을 막았다. 이때 많은 전사자를 낸 명군은 일단 파주로 후퇴했다가 개성으로 물러났으며, 이를 계기로 명군은 전투에서 적극성을 잃어 일본군을 섬멸할 기회를 잃었다.

   
▲ 1930년대만 해도 조선의 고적명승지를 자랑하던 벽제관

   
 

사적 제 144호인 벽제관터(碧蹄館址)는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한양에 들어오기 전에 반드시 이 역관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관복으로 갈아입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정해진 예법이었다. 벽제관은 원래 이곳에서 서북방으로 5리 정도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인조 3년(1625)에 지금의 위치로 행정관서를 옮기자 이곳에 새로 세운 객관이 지금의 벽제관이다.

당시 규모는 면적 1,265평, 건물은 601평에 달하였다. 그 많던 건물들은 일제 때 일부가 헐렸고 6·25 때 완전히 불타 버리는 안타까운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곳 벽제관터에 있던 육각정 정자를 일제 때 일본이 뜯어간 것이 확인되어 이에 대한 반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서울신문 2013년 2월 6일치 보도에 따르면 1918년 조선총독부 하세가와 총독이 자신의 고향인 일본 야마구치현 이와쿠니시로 약탈해 간 것이다. 지난해 6월 일본 현지를 방문해 조사를 벌인 고양시 관계자와 문화재 전문가들은 육각정이 건축학적으로나 역사학적으로 충분한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여 2013년 ‘고양 600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육각정 환수위원회를 구성하고 구체적인 환수 계획을 세워 나갈 계획이다”라는 것을 보도하고 있다.

   
▲ ▲주춧돌만 남은 터에 안내판만 서있다.

야마구치현의 야마구치현립대학 도서관 안에는   '테라우치 문고' 가 있는데 여기에는 초대 조선 총독이던 테라우치가 조선에서 강탈한 18,000여점의 고문헌이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육각정마저 뜯어간 빈 주춧돌만 남은 벽제관터 주변에는 그래도 봄이라고 나무들이 새순을 내고 있었다. 

  <안내> 
 * 주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55-1
 * 1분 거리에 '고양본동 우체국'이, 3분 거리에 있으며 '고양동 동사무소'가 있다.
 * 빈터 상태라 아무때나 볼 수있다.

 

** 이윤옥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 고양"에 둥지를 튼 지도 어언 17년째이다. 문화행위가 점점 껍데기와 이벤트성으로 흘러가는 시대일수록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한 깊이있는 성찰과 역사공부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알려주는 사람은 없다. 글쓴이는 2006년에 편찬된 고양시사7권에 집필위원으로 참여 한바 있다. 그때 속속들이 소개하고 싶은 고양문화와 역사이야기를 따로 뽑아 두었는데 이제 그 이야기보따리를 얼레빗 신문을 통해 풀어내고자 한다.

이윤옥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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