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청송심씨 두 가문의 묘지 분쟁

2013.05.13 09:23:04

[파주문화통신9] 윤관과 심지원 묘 산송이야기

 [그린경제=권효숙 기자]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옛 의주로 길에는 사적 제323호로 지정된 윤관장군묘가 있다. 왕릉의 규모만큼 크고 묘역 아래 윤관 대원수가 타고 다니던 말과 교자를 묻은 의마총과 교자총도 있다. 윤관 묘 봉분 뒤에는 약 2m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데 5년 전만 해도 그 담장 너머에는 조선 효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심지원(沈之源)의 묘와 그의 할아버지 심종침(沈宗忱)과 할머니 단양우씨의 쌍분묘가 있었다.

   

▲ 1988년 국가사적으로 지정된 윤관 대원수의 묘역

 

윤관 대원수(1040년·정종 6년~1111년·예종 6년)는 고려 때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쪽 9성을 차지해 고려의 지도를 넓힌 명신으로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격)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심지원(1593년·선조 26년~1662년·현종3년)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대사헌을 거쳐, 좌·우의정과 영의정에 올랐다. 그의 아들 익현(益顯)이 효종의 딸인 숙명공주(淑明公主)에게 장가들어 사돈이 됨으로써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심지원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137호로 지정되었다.
 
   
▲ 윤관 대원수가 타고 다녔다는 말과 교자를 묻은 의마총과 교자총

이 심지원의 묘와 윤관장군 묘를 둘러싸고 1763(영조 39)부터 역사적인 산송분쟁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조상의 묘 관련 산송은 무척 많이 발생하는데 그 가운데 분수원 산송은 파평윤씨와 청송심씨 두 명문간의 산송으로 지방관서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중앙으로 이첩돼 임금이 친히 재조사를 명하고 심리 판결하였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산송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 오랜 산송의 원인과 발단은 무엇이며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지금 현재 윤관 묘가 자리잡고 있는 묘역은 17세기만 해도 비석도 없이 오래된 산소로 거의 방치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윤관의 묘는 1111년에 조성됐고 1662년 심지원의 묘를 조성할 때는 550여년이나 지난 후라 풍상 속에서 비석도 어디론가 묻혀져 버린 오래된 고총이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동네 노인들이나 젊은이나 모두 그 묘는 윤관장군 묘이며 그 아래 동그란 흙더미는 윤관장군이 타던 가마묘라고 누구나 일컫고 있었고 파평윤씨 집안에서는 묘비나 묘표가 없어 확인을 못하고 있었지만 동국여지승람에 '윤관의 묘가 분수원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연히 윤관 묘이거니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 심지원과 할아버지 심종침의 묘를 이장하기 전 청송심씨 문중에서 고유제를 지냈다

그러던 중 1658년 영의정 심지원이 국가로부터 이 일대 땅을 하사받아 청송심씨 문중 묘역을 조성하기 시작하여 할아버지·할머니, 부모님의 묘를 안장해놓았다. 그리고 심지원도 1662년 사망 후 이곳에 묻혔는데 그 위치가 윤관장군 묘라고 일컬어지던 오래된 산소 3m쯤 위였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 파평윤씨 문중에서 윤관장군 묘라 일컫던 그 산소에 이씨 묘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고 어찌된 일인지 확인하고자, 그 묘를 관리하고 있다는 이씨 후손 이형진의 집을 찾아가 연유를 캐묻고 동의를 얻어 그 묘의 광속을 파보았다.
 
   
▲ 심지원의 묘곽을 해체하는 과정. 부인 해평윤씨와 안동권씨의 묘곽이 양옆에 있다

그러자 청송심씨 집안에서는 심지원의 묘 망주석이 서 있는 곳까지 파들어와 남의 묘를 훼손하였다고 격분해 윤씨 문중사람들을 구타하여 쫓아내고, 심지원의 손자 심정최가 1763(영조 39) 5월 윤씨 가문의 처벌을 당시 고양군수에게 요구함으로써, 두 집안의 묘지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었다.

그러나 고양군수 신희(申暿)는 심씨문중의 고발로 세밀한 조사까지 하였지만 개인적으로 파평윤씨와 인척관계에 있다하여 산송담당을 기피하였고 이에 경기감사가 파주목사 조덕상(趙德常), 교하군수 홍정유(洪鼎猷)에 해결을 지시하였으나 이들 역시 윤씨집안의 외손이 된다하여 판결을 기피하고 사건을 도()에 반송하고 만다.
 
사실 묘의 주인공 심지원도 윤관장군의 외손이 된다. 윤관장군이 600년전의 사람이니 그 자손들이 수없이 많고, 파주의 양반가문 대부분은 파평윤씨와 혼인으로 엮어져 있었다.
 
   
▲ 심지원의 할아버지 심종침의 묘곽을 해체하는 과정

또한 당시 중앙권력의 실세로 자리잡고 있던 파평윤씨와 청송심씨의 분쟁에 대해 지방관아 수령이 판결을 내린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산송은 중앙으로 이첩되어 윤씨 심씨 두 문중에서 번갈아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임금 영조의 판결을 청하게 된다.

영조임금은 이 산송에 대하여 신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청송심씨와 파평윤씨는 다 같이 당대 명문벌족일 뿐만 아니라 두 집안이 모두 왕실과 혼사가 가장 빈번했던 집안이요, 더욱이 윤관장군은 전 조정의(前朝)의 혁혁한 부국공신이며, 심지원 정승은 이번 조정(今朝)의 덕망높은 명상이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로 해서 어느 한쪽이 억울하게 여긴다든지 두 집안에 불화가 생겨서는 안될 일이라고 본 것이다.
 
영조는 즉시 한성부에 명하여 분수원 현지를 답사하여 상세한 지도를 그려오게 하고 한편 풍덕에 사는 이씨를 문초하여 심정승 묘 아래에 있는 묘가 자기 선조의 묘라고 모시게 된 경위, 비석을 세운 경위 그리고 윤씨들과 같이 그 묘의 광중을 파헤친 경위 등을 낱낱이 조사하였다.
 
   
▲ 이장하기 위해 관을 비닐로 덮어놓고 석물은 짚과 비닐로 감싸놓았다.

파주 분수원 산송재판을 이렇게 신중하고 면밀하게 진행시킨 영조임금은 마침내 1763(영조39) 1013일에 양쪽 가문을 화해시키고자 이후 윤씨 집안과 심씨 집안은 마땅히 분란을 그치고 각기 선조의 묘를 잘 지키도록 하라.”는 최종판결을 내렸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40(1764) 614일자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시중(高麗侍中) 윤관(尹瓘)과 고 상신(相臣) 심지원(沈之源)의 묘에 사제(賜祭)를 명하였다. 당초에 윤관·심지원의 묘가 파주(坡州)에 있었는데, 윤씨가 먼저 입장(入葬)하였으나 해가 오래되어 실전(失傳)하니 심씨가 그 외손으로서 그 산을 점령하고 묘를 썼었다. 이때에 이르러 윤씨 집 자손들이 산 아래에서 비석 조각을 습득하여 심씨 집 자손과 쟁송(爭訟)하여 끝이 나지 않자, 임금이 양쪽을 모두 만유(挽留)하여 다툼을 금하게 하고 각기 그 묘를 수호하여 서로 침범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윤관은 전조(前朝)의 명상(名相)이고 심지원은 아조(我朝)의 명상이라 하여 똑같이 치제(致祭)한 것이다
 
영조임금은 이와같이 판결을 내리고 두 문중에게 각각 어제문(御祭文)을 지어 승지를 보내 윤관장군 묘와 심지원 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로부터 두 집안에서는 별다른 분규없이 각각 자신의 조상 묘를 잘 지키고 받들어 모셔왔다. 그러다 1969년 양측 집안에서는 이 오래 묵은 두 집안의 산송분쟁을 마무리 짓는다는 의미에서 두 분묘 사이에 곡장을 쌓고, 화해증서를 작성하여 각기 보관하였다. 하지만 이후 청송심씨 집안에서는 그 곡장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고 분묘에 그늘이 진다고 하여 불만을 터뜨려왔고, 다시 두 집안 사이에는 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 새로 조성된 심지원의 묘

이 후 2005년 청송심씨와 파평윤씨 두 문중은 회의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윤씨 측 문중에서 윤관장군 묘역 바로 옆 산줄기에 새로운 묘역부지 8천여를 제공하고 심씨 측 묘소를 이장을 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에 따라 2008519기의 심씨 집안 묘가 경기도 박물관의 발굴조사 과정을 거쳐 모두 이장함으로써 245년 전 발단이 되어 영조임금조차 명쾌히 해결하지 못한 분수원 산송이 마침내 그 결말을 보게 된 것이다.
필자는 당시 파주시지편찬실의 연구원으로 근무할 때 이 산송분쟁이 해결되어 심씨집안의 묘가 이장해 가는 과정을 직접 현장에서 볼 수 있었기에 좀더 생생하게 이 역사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그린경제/한국문화신문 얼레빗=권효숙 기자]
 
권효숙기자 jeenin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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