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망령이 되살아났나?

2013.07.04 11:09:35

[실록으로 배우는 소통 9]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결정을 걱정하며

[그린경제=김기섭 기자]  조선시대에서 임금과 신하의 말과 행동을 적는 사관(史官)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먼저 문과 시험 급제자 중에서 젊고 기개가 높아야 하며 재주와 학식이 뛰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기혼자에다 가문이 훌륭해야 가능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인척에 따라 어떤 정치집단에 가입할지 모르므로 직서(直書) 정신이 훼손될 우려가 있다고 보았고, 훌륭한 가문의 자제는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존심을 가지고 직필(直筆)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직서과 직필은 사관에게 생명과도 같은 가치였습니다.  

사관들이 쓰는 사초는 단순히 왕이나 대신의 말과 행동을 적는데 그치지 않고,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하는 유교사회 조선에서 당장의 잘못은 어떻게든 모면할 수 있지만 사초는 나중에 실록이 되어 남으니, 후세의 비판과 평가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한 마디 말, 하나의 행동도 쉽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지요. 그런 점에서 사관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태조도 세종도 실록 보려 했으나 실패하다 

   
 
태종은 사관과 자주 충돌한 임금 중 한 명입니다. 사사건건 입시하여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는 사관들이 밉상스러웠던 모양입니다. 왕위에 오른 지 채 여섯 달이 되지 않은 1323. 태종은 다섯 승지(承旨)와 시독(侍讀) 김과(金科)에게 사관의 필요성을 묻습니다. 이때 김과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늘은 형상이 없으나, 착한 것은 복을 주고, 음란한 것은 화를 주며, 사필(史筆)은 시정(時政)의 좋고 나쁜 것과 행동의 잘잘못을 곧게 쓰지 않음이 없는데, 만세에 전하여 효자와 자손이 능히 고치지 못하니, 두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태종은 이후 말과 행동을 공손히 하고 조심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태종은 정사를 볼 때는 모르지만 편안히 쉬는 곳에까지 사관이 들어오는 것은 불편해 합니다.  

이곳(편전)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사필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殿]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그러자 사관이 이렇게 응수합니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58일 경연에서도 이 일이 거론됩니다. 이 때 사관 민인생은 전하께서 비록 편전에 앉아 정사를 들으실 때라도 사관으로 하여금 입시(入侍)하여 아름다운 말[嘉言]을 기록하게 하소서.” 라며 허락을 구합니다. 그러나 임금 측근들이 고려의 예를 들어 반대하고 임금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6월 어느 날 민인생은 편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자, 문밖에서라도 엿듣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태종은 화가 나서 이렇게 명령합니다. “이제부터 사관이 날마다 예궐(詣闕)하지 말라.” 결국 민인생은 휘장을 걷고 엿보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등 예를 잃고 불경한 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귀양을 갑니다.  

이렇듯 태종 집권 초기에는 사관과의 대립과 갈등을 다룬 내용이 자주 나옵니다. 감시받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임금과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사실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고집스런 사관과의 줄다리기인 셈입니다. 

한편, 그러다보니 사관의 기록은 임금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습니다. 임금 자신은 물론 그의 치세가 후세에 어떻게 그려질까에 궁금해 하면 할수록 그 관심은 더하게 됩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또한 자신이 즉위한 이후의 기록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관 신개의 상소를 듣고 곧바로 의사를 철회합니다.  

창업한 군주는 자손들의 모범이온데, 전하께서 이미 이 당시의 역사를 관람하시면 대를 이은 임금이 구실을 삼아 반드시, ‘우리 선고(先考)께서 한 일이며 우리 조고(祖考)께서 한 일이라.’ 하면서, 다시 서로 계술(繼述)하여 습관화되어 떳떳한 일로 삼는다면, 사신(史臣)이 누가 감히 사실대로 기록하는 붓을 잡겠습니까? 사관이 사실대로 기록하는 필법이 없어지게 되어 아름다운 일과 나쁜 일을 보여서 권장하고 경계하는 뜻이 어둡게 된다면, 한 시대의 임금과 신하가 무엇을 꺼리고 두려워해서 자기의 몸을 반성하겠습니까?”(태조실록 7612) 

성군으로 칭송받는 세종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태조실록을 본 바 있는 세종으로서는 태종실록을 보는 것이 문제가 안 된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세종 13, 20년 두 번에 걸쳐 실록을 보려 시도합니다. 그러나 모두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쳐 보지 못합니다([실록으로 배우는 소통 1]을 참조). 이때 신하들이 반대한 한결같은 이유는 후세의 왕들이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만약 보게 된다면 사관은 위축되어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지 못해 진실을 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통령 기록이 없는 나라에 살게 됐다 

   
▲ 연산군이 사초를 보고 뜯어고쳐 누더기가 된 연산군일기
그럼에도 사초를 본 임금이 있는데, 바로 연산군입니다. 연산 655일 치 기록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시정기(時政記)를 조사하여 죄 주고 거의 다 없앴으며, 또한 과오와 악이 후세에 전할 것을 염려하여 춘추관에 명하여 자신의 허물이 시정기에 쓰여 있으면 모두 삭제하고 불태웠다. 그렇게 하고도 추가하여 조사하기를 말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여 사관에게 부탁하여 모두 없애버렸다.”  

여기서 시정기는 사초를 뜻하는 말입니다. 심지어 연산 1128일에는 시정기를 상고하여 전 대간(臺諫)들이 논의하고 알린 내용을 토대로 조정대신들을 잡아들이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뼈를 부쉈는지 상고하라”, “잡아와서 국문하라”, “이처럼 말한 것은 그 마음에 다른 뜻이 있는 까닭이다. 그 자손에게 죄를 가하라”, “실정을 고할 때까지 형신(刑訊)하라는 엄혹한 주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의 대표적인 필화사건이 바로 무오사화입니다. 사관 김일손이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意帝文)을 실록에 실으려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사림파가 모조리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여하튼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의 횡포는 극에 달합니다.  

엄한 형벌로 아랫사람들을 억제하매, 선비의 기개가 날로 꺾여 감히 정언(正言) 극론(極論)을 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임금이 더욱 꺼릴 것 없어 멋대로 방탕해졌다.”(연산 12912) 

지난 2일 국회는 국가기록원이 보관하고 있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회의록이 정쟁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대통령 지정 기록물은 15년이 지난 뒤에 열람할 수 있고, 정상회담의 경우 미국은 30년이 지나 상대방의 의견을 구해 공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회의록 공개로 여야가 어떤 정치적 이익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되, 실록정신에 비추어 볼 때 실망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종 이후 실록을 보지 못하도록 관례로 정한 연유는 간단합니다. 후대의 역사적 평가를 견디려면 올바른 정치를 하라는 언명입니다. 연산군의 사례는 최악의 본보기입니다. 이제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습니다. NLL에 관한 시시비비가 가려지겠지만 이 같은 실익보다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역사적 실책을 범했다는 사실은 언제 깨닫게 될까요? 한국 기록학회장 명지대 이승휘 교수가 CBS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대통령 기록이 없는 나라에 살게 됐다.”고 탄식했습니다. 이 절망적인 탄식의 의미를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김기섭 기자 youlight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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