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출신 명창 김세종과 판소리

2013.07.22 12:10:17

동편제 판소리 전북 순창지역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 1

[그린경제=양병완 기자]  순창에는 조선시대를 풍미하였던 판소리 명창이 네 사람이나 있다. 그러나 어떤 명창을 막론하고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헌종, 철종, 고종 때 판소리 명창의 귀중한 흔적을 찾아서 대한민국 판소리의 아름다움을 승화 시켜야만 할 것이다. 

먼저 순창에는 김세종(金世宗) 명창이 너무나도 유명(有名)하다. 그 김세종 명창을 백과사전들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 전북 남원시 운봉면 야지당 터의 만석꾼 별장 운악정(1928년 6월 12일) 전경 모습. 운봉 운악정은 지리산 동편제 판소리의 산실이었다. 아래에 서 있는 네 사람은 운악정 뜰에 있는 자그마한 둠벙에서 송만갑 명창이 소리꾼들과 여유롭게 뱃놀이하는 모습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동서문화 출판사 발행) 112692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김세종(金世宗) 조선 후기 명창. 전라북도 순창(淳昌) 출생. 신재효(申在孝)의 제자. 동편제 소리를 이어받은 판소리의 명창으로 창극(唱劇)에 대한 이론과 비평에 일가견을 가졌으며 판소리의 이론가(理論家)의 제일인자(第一人者)였다. 춘향가(春香歌)<천자 뒷풀이>가 가장 뛰어 났다.” 

국어대사전(1991 금성출판사 발행) 468쪽에는 김세종(金世宗). 전북 순창 출생. 조선 철종 때의 판소리 명창. 이론가(理論家). 동편제(東便制) 판소리를 이어 받은 명창으로 신재효(申在孝)의 지도를 받아 판소리 이론(理論)의 제일인자(第一人者)가 되었음. 춘향가의 천자 뒷풀이가 그의 특기임.” 

동아원색대백과사전(1982년 동아출판사 발행) 6372쪽에는 김세종(金世宗). 조선 철종 때의 판소리 명창. 판소리의 이론가(理論家). 전라도 순창(淳昌) 출신. 동편제(東便制) 판소리를 이어받은 명창으로서 신재효(申在孝)의 지도를 받아 판소리 이론의 제일인자(第一人者)가 되었다. 판소리는 판소리 사설(辭說) 이면(裏面)인 내용(內容)과 발림이 일치해야하고 상성(上聲)과 하성(下聲)을 쓰는 것도 사설 이면(裏面)에 따라야 하고, 어단성장(語短聲長)이라하여 낱말은 짧게 붙이고 말의 끝은 길게 소리하라는 이론(理論)을 주장하였다. <춘향가의 천자 뒷풀이>가 그의 특기로 전한다.” 

학원세계대백과사전(1993년 학원 출판공사 발행)5348쪽에는 김세종(金世宗). 조선 철종 때의 명창. 전라북도 순창(淳昌) 출신(出身). 집안에서 전승(傳承)되는 동편제(東便制)를 어려서부터 읶혔고, 신재효(申在孝)로부터 판소리의 이론적(理論的)인 지도를 받았다. 학식(學識)이 높고 판소리를 학문적(學問的)으로 공부하였기 때문에 창극에 대한 이론(理論)과 비평(批評)에도 뛰어났다. 그의 이론은 송만갑(宋萬甲), 전도성에 의해 전수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특기로 춘향가 중에서 천자 뒷풀이는 당대(當代)의 독보적(獨步的)인 존재였다. 그 의 판소리 이론 중에서 대표전인 것이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한국인명대사전(1986년 한국 인명 대사전 편찬실, 신구 문화사 발행) 119쪽에는 김세종(金世宗). 조선 철종 때의 광대(廣大). 전라도 순창(淳昌) 출신(出身). 신재효(申在孝)의 제자. 창극에 대한 이론(理論)과 비평(批評)에 일가견(一家見)을 가졌으며, 춘향가중 천자 뒷풀이에 가장 뛰어났다.” 

교육세계대백과사전(1986년 교육서관 발행) 4313쪽에는 김세종(金世宗). 조선 이조시대, 철종 시대의 광대. 동파(東派)의 명창. 전라북도 순창(淳昌)사람. 신재효(申在孝)의 문하생으로 창극에 대한 이론(理論)과 비평(批評)이 투철(透徹)하였고, 그의 특기(特技)로 춘향가의 천자 뒷풀이는 당대(當代)의 독보적(獨步的)이었다.” 

음악 대사전(1982년 세광음악 출판사 발행) 192쪽에는 김세종(金世宗). 전북 순창(淳昌) 출생 명창(名唱).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 3대간에 걸쳐 동편제(東便制)의 대가(大家)로 활약 하였으며, 송우룡, 박만순과 동배이며, 이조(李朝) 말기(末期)의 가인(歌人) 신재효(申在孝)의 문하에서 다년간 연마(硏磨)한 관계로 다른 명창들에 비하여 그의 문식(文識)이 뛰어 났고, 특히 창극(唱劇)에 대한 이론적(理論的)인 학식(學識)은 당대(當代)에 있어서 독보적(獨步的)인 존재였다.” 

국악대사전(1984년 세광음악 출판사 발행) 179쪽에는 헌종(憲宗), 철종(哲宗), 고종(高宗) 때의 판소리 명창. 전북 순창(淳昌) 출생. 동편제(東便制). 신재효(申在孝)의 문하생으로 문식(文識)이 있어 판소리를 부를 때, 어단성장(語短聲長)이 분명하고 특히 발림을 잘하였다. 춘향가에 특출나게 뛰어 났고 그 중에서도 천자 뒷풀이가 더늠으로 전하여 오고 있다.<정노식 1940년 조선 창극사 63쪽에서 68쪽 기록>” 

동아세계대백과사전(1982년 동아 출판사 발행) 6372쪽에는 김세종(金世宗). 조선 철종 때의 판소리 명창. 판소리의 이론가(理論家). 전라도 순창(淳昌) 출신(出身). 동편제 판소리를 이어받은 명창으로서 신재효(申在孝)의 지도를 받아 판소리 이론의 제일인자(第一人者)가 되었다. 판소리는 사설 이면(裏面) 내용(內容)과 발림이 일치(一致)해야 하고, 상성(上聲)과 하성(下聲)을 쓰는 것도 반드시 사설(辭說)에 충실하게 따라야 하고 어단성장(語短聲長)이라 하여 낱말은 짧게 붙이고 말의 끝은 길게 소리하라는 이론(理論)을 널이 주장하였다. <춘향가 중에서 천자 뒷풀이>가 그의 특기(特技)로 전하여 오고 있다.

   
▲ 국악인의 후원자 운봉 만석꾼 승지 박정규가 뜰 앞에 있는 운악정에서 명창을 꿈꾸며 소리를 배우는 여성 소리꾼과 여유롭게 뱃놀이 하는 모습

판소리라는 말은 판놀음에서 부르는 소리(노래)이다. 옛날 문헌에는 이러한 의미의 판소리를 잡가(雜歌), 타령(打令), 창가(唱歌), 극가(劇歌), 본사가(本事歌)등으로 표현하였다. “판놀음이란 원래 넓은 마당을 놀이판으로 하여 판을 짜서 놀이를 벌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판놀음에는 판소리, 농악, 줄타기, 소고놀이, , 염불 등인데 판놀음으로 놀 때는 ()를 붙여서 판소리, 판굿, 판줄, 판소고, 판춤, 판염불이라고 불렀다.  

판소리는 원래 창우(唱優), 광대(廣大)등으로 부르던 소리와 재담(才談)과 춤과 곡예를 연희(演戱)하던 노릇바치가 부르는 소리에서 나온 말이다. “노릇바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광대 역시 그 솜씨에 따라서 소리 광대, 대광대, 줄광대, 어릿광대 등으로 나누어 부르기도 한다. 판소리는 여기에서 소리광대의 소리를 가리킨다.  

본래 광대(廣大)는 첩리(帖裏)에 초립(草笠)을 쓰나 소리 광대는 두루마기에 갓을 썼고 명창으로 뽑히게 되면 판소리 창()옷에 통영갓을 쓰기도 하였다. 판소리는 가객(歌客) 한 사람이 긴 서사적(敍事的)인 사설을 아니리(대화체의 말, 소리(판소리), 발림(몸짓으로 연출하는 극적인 음악의 하나를 말하며 고수(鼓手) 한 사람이 가객(소리꾼)의 왼쪽에 비스듬하게 앉아서 소리북으로 북 장단을 치면서 장단을 받쳐 준다. 

판소리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文獻)으로는 영조 30(1754) 유진한(柳振漢)이 쓴 만화집(晩華集)가운데 춘향가이다. 그러나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라는 말이 초선 초기(初期)부터 판놀음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판소리를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판소리 여섯 마당만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윤달선(尹達善)이 쓴 광한루악부(廣寒樓樂府)아국창우지희(我國倡優之戱) 일인립일인좌이립자창(一人立一人坐而立者唱) 좌자이고절지(坐者以鼓節之) 범잡가십이강향낭(凡雜歌十二腔香娘) 가즉일야(歌卽一也)”라는 대목이 나오는 것을 보면 판소리에는 원래 열 두 마당이 있었던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판소리 열 두 마당 가운데 일제강점기 때 정노식이 펴낸 조선창극사에는 가짜 신선타령대신 숙영낭자전이 들어가 있는 것이 흥미롭다. 조선 중기(中期)까지만 해도 판소리는 서민(庶民)들의 판놀음 가운데 다른 놀이에 끼어서 연출 되었다. 그러므로 서민들의 생활 감정에 알맞은 이야기들이 여러 갈래의 판소리로 짜여 공연 되었다.  

탈출구가 없었던 시절에 서민들로부터 엄청나게 많은 사랑과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수많은 백성들이 좋아하는 판소리가 점진적으로 상류층의 방안 놀이로 변모하게 되면서 인기가 양분될 수밖에 없었다. 상류층으로 옮겨진 판소리는 계속하여 발전을 하였지만, 그렇지 못한 판소리는 도태되고 말았다.  

조선 판소리는 원래 열 두 마당이었다. 지금은 여섯 마당만 전해지고 있다. 판소리를 제일 어려운 것부터 적어 보면 첫 번째 적벽가(화용도), 두 번째 수궁가(별주부가, 토끼타령), 세 번째 춘향가(성춘향가), 네 번째 흥부가(박타령), 다섯 번째 심청가(심봉사 타령), 여섯 번째 변강쇠 타령(가루지기 타령), 일곱 번째 배비장 타령(애랑가), 여덟 번째 옹고집 타령(옹고집가), 아홉 번째 장끼 타령(까투리 타령), 열 번째 강릉매화 타령(매화가), 열한 번째 무숙이 타령(왈자 타령), 열두 번째 가짜 신선타령(가짜 신선가)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나 지금은 여섯 바탕 소리만 전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궁리 끝에 2002718일 국립국악원 국악교육 연구논문 공모 부분에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잃어버린 판소리 여섯 마당 복원(復元)에 관한 연구(硏究)(The Research of Sixth-Madang Restored on Lost Pansori in Korea) - 동편제 판소리 순창(淳昌) 지역(地域)을 중심(中心)으로 - " 라는 논문(論文)을 제출(提出) 하였다.  

심사 과정에서 보기 좋게 탈락하고 말았다. 예상된 결과였다. 본인의 얄팍한 판소리 상식으로 도전한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전문 국악인들의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기도 했다. 판소리 논문을 감투욕심이 나서 어떠한 상을 받기 위해서 제출 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조용히 지나갔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전문 국악인들이 어느 때인가는 잃어버린 판소리 여섯 마당을 복원하여 주실 것을 믿고 있다. 쉬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잃어버린 여섯 마당의 판소리를 복원하여 주실 것을 국악을 아끼고, 좋아하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외치고 있다. 늦지 않도록 독려하는 마음에서 어설픈 논문을 제출하였다. 물론 잘 알지도 모르는 미천한 사람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려서 얻은 자료를 모았다. 판소리 눈대목 하나 제대로 똑소리 나게 부르지 못하는 또랑광대가 논문을 제출하였으니 밀려 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양병완 기자 ybw267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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