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재털어 교육사업, 초가종택의 청빈한 삶

2013.10.03 11:35:33

[한국 종가의 철학을 찾아서 12] 서천 이하복 종가

   
▲ 이하복 선생
[그린경제=김영조 기자]  충남 서천 이하복 종가를 찾아가는 날, 서둘러 용산에서 무궁화 열차를 탔다. 얼마 만에 기차를 타보는 것인가?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들판이 시야에 들어오기도 전에 나는 오늘 방문하는 청암 이하복(靑菴 李夏馥, 1911~1987) 선생에 대한 자료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청암 선생의 삶의 발자취를 떠나는 길은 미리 친절하게 교통편을 알려준 종부 이옥진 여사 덕에 헤매지 않고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취재를 요청하느라 전화를 건 기자에게 종부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서천역에 내려 택시를 탔다 그리곤 이내 동강중학교로 방향을 잡았다. 학교 행정실장님의 안내로 아담한 학교 전경을 찍었다. 이곳은 청암 선생이 세운 학교이다. 50여명이 채 안 되는 작은 학교지만 교정에서 만난 학생들은 기자를 보자마자 너나없이 해맑은 인사를 한다. 이하복 선생의 철학이 전해졌을까? 학생들에게 설립자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무슨 일을 하셨는지 자세한 설명은 주저했지만 설립자가 이하복 선생님으로 대단히 훌륭한 분이었음은 알고 있었다. 취재의 시작이 정말 기분 좋다.
 

10대 때 소작인 아이들에 야학
어른들 반대에도 여동생 몰래 소학교 입학 시켜
와세다 유학뒤 보성전문서 교편
학생들 전쟁터 내모는 일제에 항거 교사직 내던져 

청암 이하복 선생은 8살까지 서당에서 맹자까지 공부를 했다. 그런데 교육에 타고난 철학을 가지고 있었을까? 선생은 이미 10~15살의 나이에 신학문을 배우면서 소작인 아들들에게 야학을 열었다고 한다. 기막힌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들의 교육에 부정적이셨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몰래 여동생을 소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드러눕는 평지풍파가 일었다. 그럼에도 선생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니 남녀노소, 귀천 없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철학이 이미 십대에 분명해졌다는 증거이리라 

   
▲ 와세다 제2고등학교 졸업기념 교장 선생님과 함께(맨 왼쪽이 이하복 선생)

   
▲ 이하복 선생이 설립한 동강중학교 전경

이후 선생은 일본 와세다대학 경제과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1944년 일본이 학생들을 강제로 제국주의 전쟁터로 내모는 것에 격분해 교편을 내던지고 고향인 서천으로 내려와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특히 선생은 농한기인 겨울, 사랑방마다 노름으로 시간을 보내던 청년들을 설득해 가마니를 공동으로 짜서 판매하는 가마니조합을 만들었고, 청년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운동을 펼쳤다.  

해방이 되자 선생은 학교에 다니기 힘든 학생을 위해 1946년에는 동강고등공민학교, 1949년에는 동강학원과 동강중학교를 설립해 교이제민(敎而濟民), 곧 가르침으로 어려운 이를 구한다는 것과 교육보국 곧 교육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청암의 청빈한 삶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울지언정 자신의 초가를 기와로 덮고 확장하는 일은 죽을 때까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근·현대 격동기를 거치며 사회계몽운동에 모든 것을 바친 이 청렴한 청암은 무덤가의 비석조차도 세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생가는 지금도 여전히 초가집이며 화려하지 않은 그의 집 앞에는 소원대로 왔다, 사랑했다, 갔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소박한 빗돌만이 말없이 서 있어 찾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해방 뒤엔 학교 다니기 어려운 아이들 위해 동강학원 설립으로 교육보국 실천
왔다, 사랑했다, 갔다생가 앞 소박한 빗돌‧‧‧무덤가 비석조차 못 세우게 해 

   
▲ 이하복 생각 앞에 세워진 빗돌

   
▲ 모두 초가인 중요민속문화재 제197호 서천 이하복 가옥(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막로 57번길 32-3)

   
▲ 이하복 가옥 위채

왔다, 사랑했다, 갔다가 새겨진 빗돌 뒤로 초가 네 채가 서 있다. 기자는 지금까지 취재한 열한 군데 종택은 물론 그 어디도 초가로 된 종택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다만, 나주 박경중 가옥에 박준삼 선생이 마음이 우울한 때면 잠을 자면서 마음을 다스린 편안한 방이라 부르는 초가가 한 채 있을 뿐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97호 서천 이하복 가옥(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막로 57번길 32-3)200여 년 전 한산이씨(韓山李氏)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 선생의 18대손 이병식 선생이 처음 안채 3칸을 짓기 시작한 뒤 그 아들이 20세기 초 사랑채, 아래채, 위채(웃채) 를 지었다고 한다. 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초가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나란히 자형으로 배치되어 있고, 사랑채 오른쪽 중문을 사이에 두고 아래채와 위채가 마주보고 있다.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전통 초가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 

이런 귀한 초가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하나로 농촌 주택개량사업이 추진될 때도 이 집만은 절대 훼손할 수 없다고 완고하게 버텼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고집은 결국 이 시대에 문화유산 보존이라는 훈장을 다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되어 문화재청이나 지자체에서 훼손되거나 노후된 부분을 보수해 준다고 하지만 초가를 관리하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해마다 계속되는 초가지붕 이엉 잇기, 집안 곳곳에 산재해 있는 각종 생활용품과 유물들을 보존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데 이하복 종가의 분명한 철학이 아니면 가능한 일이 아닐 터이다. 

그래도 명색이 종가라면 어느 정도 재산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청암 선생 집은 왜 초가였을까? 집만 초가가 아니었다. 청암의 장남 이기원 선생과 손자인 현 종손 이세준 선생은 등록금을 내주지 않는 가풍에 학교 다니는 동안 학비까지 벌어야 했기에 쉽지 않은 학창생활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집을 초가로 유지하고 자식들 학비조차 주지 않았던 데는 다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청암 선생이 동강학원을 설립하고 나서야 가족들은 청암 선생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되었다 

종손 이세준 선생은 말한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마도 자연이나 문화재 보호에 투철한 생각을 가지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원래의 것이 지속가능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데 유념했던 것이지요. 또 이 지역에서는 짚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을 활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후손 이세준 선생 경제적 빨강화폐, 정신적 파랑화폐 공존하는 세상 꿈꿔 

   
▲ 종손 이세준 선생

   
▲ 할아버지(이하복 선생)가 이세준 종손에게 보낸 편지(구구절절 사랑이 담겼다)

종손은 지금 여의도에서 치과의사로 개업 중이다. 병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약속을 했다. 온화한 모습의 종손과 종부는 기자를 따뜻하게 맞아준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처럼... 

어릴 땐 제대로 뒷받침을 해주지 않으시는 아버님이나 할아버님을 원망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바라보니 아버님이나 할아버님은 자신이 가진 철학을 지켜내기 위해 버티신 건 아닌지 못난 자식으로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 세대와는 환경이 많이 달라진 지금 저는 한 가지 업그레이드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들은 사명감에 이를 악물고 버텼을 것이지만 이제 웃으면서 즐길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만이 지치지 않고 훌륭한 가치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으리란 생각입니다.” 

21세기 지식인다운 문화유산 보존법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 종손은 빨강화폐, 파랑화폐가 공존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다시 말하면 기존 화폐대로 경제적 가치를 따지는 돈은 여전히 필요할 것이지만 정신적, 철학적 가치를 지니는 파란돈이 통용된다면 이 세상은 훨씬 의미 있는 곳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역시 21세기 종손다운 훌륭한 생각이다.  

초가 종택으로 시집 와 오랜 세월 함께 한 종부도 자신의 생각을 얘기해준다.

저는 시집와서 책에서만 보던 그런 집안을 만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돈이란 가치에 대해서 다시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가끔 초가 마루에 걸터앉아 있으면 시간이 멈춘 듯합니다. 물질적으로 생각하면 초가는 불편하고 현대에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오히려 지금은 초가가 남아 있는 게 별로 없기에 그 가치는 점점 더 올라갈 것입니다.” 

종손의 아버님 이기원 선생은 다음 세대에 계속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청암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 재단에 들어오는 전입금이 없기에 참으로 어려운 실정이라 한다. 그래서 종손은 뭔가 수익사업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먼저 1단계로 먹거리를 활용할 고민을 하고 있다. 그런 다음 요즘 인기인 올레길이나 둘레길처럼 문화를 누리며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을 만들겠다고 말한다. 

이하복 종가는 종손의 증조할아버지 대에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 서천군 한산은 예부터 모시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역 특산품인 모시를 일본에 수출하여 번창했다. 그 부를 이하복 선생은 교육을 통한 나눔 실천으로 아낌없이 썼다. 한번 주머니에 들어가면 내놓을 줄 모르는 요즘 재벌들에게 큰 가르침이 아닐까? 

요즘 젊은 세대들은 우리문화도 모르고 민족정신도 없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이런 이하복 가옥만 잘 활용해도 젊은이들에 대한 훌륭한 정신 교육을 할 수 있음이다. 

이미 십대에 야학을 펼쳤던 이하복 선생, 그 선생의 정신을 올곧게 보존하고 전하려는 종손 이세준 선생을 만난 기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들을 통해 또 하나의 새로운 철학을 얻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여 서천을 아는가? 서천은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과 교육 나눔을 실천한 이하복 선생이 있기에 빛나는 고장이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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