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읍성에 지었던 제주신사 터를 찾아서 <5>

2013.10.03 19:23:27

황국화 상징 조선의 신사(神社) 돌아보기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제주신사가 들어서 있던 곳을 말하려면 먼저 제주측후소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1923년 일제는 옛 제주읍성의 쾌승정을 헐어버리고 그 터에 제주측후소(현 제주기상청)를 지었다. 제주읍성은 석성(石城)으로 1105년(고려 숙종 10년)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처음으로 축성되었는데 1599년 성유문 등 여러 제주 목사들이 증개축을 하여 구한말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1910년 총독부의 읍성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점차 훼손되었다.
 

   
▲ 제주측후소 바로 옆 제주읍성 자리에 제주신사를 지었다.

일제는 1920년대 후반에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공사를 벌였는데 당시 바다 매립을 위한 용도로 역사적인 제주읍성을 헐어냈다. 제주읍성이란 요즘으로 치자면 제주시청과 같은 구실을 하는 곳으로 제주시의 핵심 행정관청인 것이다. 이러한 행정관청을 조선총독부는 마구잡이로 헐어 버리고 난데없는 기상관측 시설을 지어 버린 것이다. 
 

   
▲ 제주지방기상청 앞에서 바라본 제주신사 터(제주중앙감리교회 자리)

뿐만 아니라 일제는 현재 제주기지방상청과 제주중앙감리교회 사이에 내선일체의 동화정책을 펴기 위해 1928년 제주신사(濟州神社)를 지었다. 2009년 1월 5일치 한라일보에 따르면 제주신사는 1945년 광복을 맞아 그 해 10월 건입동 청년들이 부숴 버렸고, 그 뒤 적산관리업무를 맡았던 세무서가 이 터를 분할해 나누면서 지금의 감리교회가 들어섰다고 한다.

제주신사 터를 찾아 가던 날은 마침 산지천 축제가 열리고 있었고 왼쪽에 흐르는 산지천을 끼고 제주기상청을 오르는 언덕은 꽤 경사가 져 있었다. 원래 신사란 그 지역에서 가장 신성시 되는 높은 곳에 짓게 마련인데 제주신사가 있던 제주기상청으로 오르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 지금은 감리교회가 서 있지만 이 자리가 제주신사 터다
제주기상청 정문으로 들어서니 기상 관측용 설비들이 마당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설비들 너머로 감리교회 탑이 높이 솟아 있었다. 마당 끝으로 가서 감리교회 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교회당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어 왕래는 할 수 없었다. 일설에는 감리교회와 제주기상청 사이의 공터에 제주신사가 있었다고도 하고 감리교 터가 제주신사처였다고도 했는데 마침 기상청 직원이 마당가에서 서성이는 기자를 보고 “어디를 찾느냐?”고 해 잘 됐다 싶어 직원에게 물어보니 "제주신사 자리는 감리교회 터가 맞다”고 했다.

아쉬운 것은 제주기상청과 감리교회 두 곳을 샅샅이 뒤져도 그곳에 제주신사가 있었다는 팻말하나 없었다. 지난번에 찾아간 전주신사가 있던 자리에 세워두었던 안내판이 불현듯 생각난다. 쓰라린 역사든 좋은 역사든 기록해주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크리스천투데이신문의 2009년 5월 21일치 기사이다. “신사참배와 부일협력 결의로 하나님과 민족 앞에 범한 죄를 회개합니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좀 더 보면 “한국기독교장로회 제주노회(노회장 최금일 목사)는 지난 16일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에 대한 죄책고백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노회는 1938년 4월 제9회 정기회에서 ‘신사참배와 조선인 지원병 축하식에 축하전보를 치기로 한 결의’를 한 바 있는데, 올해 제87회 정기노회에서 그 결의를 취소했다.

   
▲ 이 계단을 오르면 제주기상청과 감리교회가 나오지만 지금은 폐쇄되었다. 가장 높고 신성한 자리에 제주신사가 있었음을 증명한다
제주노회는 노회원 및 교회 일동의 명의로 발표된 이 선언문에서“제9회 제주노회 신사참배 결의는 우리의 신앙을 배신하는 잘못이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잘못을 시인하고 참회하기보다는 책임을 회피해 온 것을 고백한다”면서 △신사참배의 죄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죄 △신사참배와 부일협력의 죄를 참회하고 청산하지 못한 죄 등을 회개한다고 밝혔다”는 내용의 기사이다.

이 기사대로라면 1938년 무렵에 교인들은 제주신사에 열심히 드나들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자세에 손뼉을 쳐주고 싶다. 그러나 선량한 조선인들에게 강제로 궁성요배와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면서 이에 불응하던 조선인을 가두고 형벌을 가했던 일제의 만행은 용서할 수 없다. 가증스러운 것은 그러한 사실을 일본이 반성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어두운 역사의 현장을 헐어버린 것까지는 좋지만 작은 안내판이라도 설치하여 그날의 악몽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한 역사의 교훈 터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역사란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남이 기억해 주지 않는 것이며 제주신사 터는 제주인이 그 사실을 기록해줘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가파른 기상청 언덕길을 내려오는 데 산지천 쪽에서 불어오는 바닷내음이 비릿하다. 그 언덕 그 자리에서 피맺힌 한을 삭이며 나라 잃은 설움을 어떻게든지 이겨내고 다시 광복을 찾기 위한 각오를 새로 했을 불굴의 조선인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 전주시에서는 전주신사 터에 이와 같은 안내판을 세워두고 있다.

*위치: 제주지방기상청과 나란히 있는 제주지방감리교회 자리가 제주신사 터다.
  참고로 제주지방기상청 주소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동문로 9길 13-1번지다.

 

이한꽃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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