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장준하 추모공원을 다녀오다

2013.10.07 06:54:14

[그린경제 = 이한꽃 기자]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 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음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자유로를 달리다 마주치는 통일전망대 인근에 조성된 장준하공원 돌비석에 새겨진 말이다. ‘젊음이라는 무기’를 거머쥔 채 조국 광복을 위해 뛰었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등산로에서 의문의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는 불운을 겪었다.

   

▲ 장준하 선생 무덤으로 오르는 계단, 글귀가 적혀있는 낮은 돌 담장 같은 곳 뒤 계단을 오르면 무덤에 이른다.

   
▲ 추모공원의 양쪽 돌 담장 모양 사이의 공간으로 들어서서 계단 위로 오르면 무덤이 나온다.

 

   
▲ 장준하추모공원 전체 모습, 돌담장 모습으로 이 돌판에 해적이(연보)를 적어 두었다.

  장준하추모공원은 2012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88번지에 조성된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조촐하고 소박한 모습이다. 추모공원이 반드시 커야 할 필요는 없지만 선생을 기념할 만한 기념관이나 자료관 같은 것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 무덤 옆의 비석

 장준하 선생 추모공원과 바로 위의 무덤은 통일전망대나 파주헤이리예술마을을 찾는 이들이 간간이 찾고 있는 듯 했다. 무덤은 보통의 봉분과 달리 검은 돌베개 모양의 돌로 마감처리를 했는데 왠지 좀 무겁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도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선생의 죽음에 대한 속시원한 진상이 밝혀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추모공원을 둘러보았다. 

   
▲ 봉분을 돌베개 모양으로 꾸민 장준하 선생 무덤

추모공원에는 헤이리마을에 사시는 이이화 역사학자와 일본 '관동대진재시 조선인학살 90년 가나가와 실행위원회 대표 야마모토스미코 씨, 일본 미에현 '재외외국인 교육연구회' 시마즈타케오 씨 등과 함께 했다. 

*장준하(1918-1975) 선생은 누구인가?

 평안북도 선천 출생. 장로교 고려신학파(高麗神學派) 목사 석인(錫仁)의 아들이다.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예과를 거쳐 동경의 니혼신학교(日本神學校)에 다니다가 1944년 일본군 학도병으로 중국에 파병되었다. 입영 6개월 만에 일본군을 탈출하여 중국 임천(臨泉)에 있던 중국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 임천분교 한국광복군 훈련반에 입대하였다. 이곳에서 김준엽(金俊燁)과 ≪등불≫이라는 필사본 잡지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이 그 해 11월 30일 이곳을 떠나게 되어 잡지 발간이 중단되자, 혹한 속에 도보로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重慶)으로 출발, 만 2개월 만인 1945년 1월 30일 도착하였다. 서안광복군(西安光復軍) 제2지대 이범석(李範奭) 휘하에 들었다가, 유엔군 중국전구사령부(中國戰區司令部)웨드마이어(Wedemeyer,A.C.) 휘하에서 미군 전략정보처(OSS)유격훈련을 받았다. 이곳에서 교포들의 친목지로서 잡지 ≪제단 祭壇≫ 초판 300부를 펴냈다.

 광복이 되자 8월 18일에는 광복군의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 선발대로 여의도 비행장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1945년 12월 환국하였다. 1946년 조선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교무처장으로 정계에 잠시 몸담았으나, 그 동안 못다 한 학업을 마치기 위하여 한국신학대학을 다녔다.

 1·4후퇴 때 부산에 피난한 뒤, 1952년 9월 문교부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에서 ≪사상≫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으며, 1953년에는 피난지에서 무일푼으로 ≪사상계 思想界≫를 창간하였다. 1962년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막사이사이상 언론 부문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대통령명예훼손혐의로 검거되어 복역 중 1967년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공천으로 옥중출마하여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1년 신민당을 탈당하고 사상계사장에 복귀하였으며, 1973년 통일당 최고위원이 되었다. 1974년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되었다.

민권투쟁으로 10여 회나 투옥되었으며, 가석방이 되어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에도 민권운동을 전개, 1975년 개헌청원백만인서명운동본부의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하였다.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해서 완전한 민주헌법을 만들고 그 헌법에 따라 자신의 거취를 정할 것과 긴급조치로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의 무조건 즉시석방, 자유언론의 보장 등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생애가 끝날 즈음에는 정당활동보다 민주회복국민회의를 통한재야운동에 전념하였다. 1975년 8월 등산길에서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하였다. 저서로 ≪돌베개≫가 있다.

 출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한꽃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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