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편지<173> 최남선 선생님에게 -박덕진-

2013.10.22 23:55:36

[그린경제/얼레빗 기자 = 이한꽃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선생님.

10월 10일입니다.

56년 전 오늘입니다. 선생님이 타계하셨지요.

 

육당 최남선

  육당 (六堂), 1907년 한국최초의 잡지 <소년>지 창간,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창작, 기미독립선언문 기초...

중학교 국어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 하노라...”로 시작되는 기미독립선언문은 시험에 반드시 출제되는 지문이었습니다.

밑줄을 그어가며 읽고 또 읽던 기억이 납니다.

교과서에 실린 지문 전체를 줄줄 외우던 친구도 있었지요.

사학자이자 문인.

전통문화와 신문화의 과도기를 살았던, 신문화운동의 선구자.

선생님은 그렇게 ‘대단한’분으로 청소년기, 제 기억에 남았습니다.

 

  1928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위원회’ 편수위원, 1937년 매일신보에 ‘조선문화의 당면과제’를 연재하여 ‘내선일체’ 강조, 1940년 만주지역 항일무장세력에 대한 귀순 및 투항공작, 1943년 조선인 학생들의 일본군 학병참여 독려 강연...

나이를 먹어가며 선생님의 행적에 대해 더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었습니다.

조선화보 대담(왼쪽 육당, 가운데 춘원, 오른쪽 마해송)

<조선화보> (1944년 1월호)에 선생님과 춘원 이광수의 대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춘원이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하자, 선생님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하셨더군요.

두 분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천재’라고 불리시는 분들이셨습니다.

이런 두 분이 조선청년들에게 전쟁에 나가 장렬하게 전사하라고 독려하셨고, 그 강연에 대해 후일담을 나누셨던 겁니다.

황당했습니다.

소름끼치는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1949년 1월, 반민특위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생님을 체포합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지만 곧 병보석으로 풀려나셨구요.

반민특위가 이승만 대통령의 탄압으로 와해되면서 사실상 처벌을 면하십니다.

1949년 3월, 선생님은 <자유신문>에 글을 쓰십니다.

문제의 ‘학병참여 독려강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학병문제가 일어났을 때 나는 독자(獨自)의 관점에서 조선청년

이 다수히 나가기를 기대하는 의를 가지고 이것을 언약한 일이 있었 더니 이것이 일본인의 가거(可居)할 기화가 되어서 그럴진대 동경 일

행을 하라는 강박을 받게 된 것이었다.

당시 나의 권유 논지는 차차(此次)의 전쟁은 세계역사의 약속으로

일어난 것이매 결국에는 전 세계 전 민족이 여기 참가하는 것이요,

다만 행복한 국민은 순연(順緣)으로 참가하되 불복한 민족은 역록

(逆綠)으로 참가함이 또한 무가내하(無可奈何)한 일임을 전제로 하여

우리는 이 기회를 가지고 이상과 정열과 역량을 가진 학생 청년층이

조직, 전투, 사회 중핵체 결성에 대한 능력 취위성(取爲性)을 양성하

여 임박해오는 신운명에 대비하자 함에 있었다...“

 

독립국의 출범에 대비한 ‘실력양성’의 관점에서 조선학생들에게 학병

참여를 독려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선생님께 묻고 싶었습니다.

전쟁에 나가 황국을 위해 죽는 것이 실력양성입니까?

학병에서 탈출해 광복군에 합류한 이들은 실력양성의 책무를 던져버린 사람들이었습니까?

 

  선생님.

요즘 대한민국에는 ‘뉴라이트’라고 불리우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분들의 ‘식민지 근대화론’ 주장과 선생님의 논지는 정확하게 부합합니다.

모를 일이지요.

이분들의 활약으로 선생님이 역사 속에 화려하게 부활하실지.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학병참여 독려강연’을 했던 춘원 이광수는 <나의 고백>에서 이렇게 썼더군요.

선생님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구절입니다.

 

  “…과거 7,8년간 내 길...내가 조선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고야마 고로’ 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 내가 죽어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문학평론가 고 김현은 “최남선이나 이광수의 친일은 만지면 만질수록 덧나는 상처”라고 했습니다.

상처, 우리 모두의 상처.

 

 

  선생님.

파란 가을하늘이 마냥 파랗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10월 10일, 오늘 말입니다.

                                                                      
              박덕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이사, 연구실장

 

이한꽃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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