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편지. 174] 매헌 윤봉길 의사님께 -김상기-

2013.11.05 13:02:34

[그린경제/얼레빅 = 이한꽃 기자]  

   
 
의사(義士)님께서 이승을 하직하신지도 어언 81년이 되었습니다. 의사님의 육신은 일본의 가나자와에서 암장되었다가 해방된 다음 해에 고국으로 모셔졌습니다. 의사님께서 도쿄 우에노역에 도착하였을 때 이봉창의사와 백정기의사께서 마중 나오셨습니다. 의사님을 포함한 세분께서는 도쿄의 우리 청년들의 등에 업혀 이봉창의거 현장인 앵전문까지 모셔졌습니다. 청년들은 의사님의 귀에 들리게 하기라도 하듯이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했습니다. 

의사님의 장례식은 원래는 1946년 6월 30일 치르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너무나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원통함을 빗물로 씻겨내기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1주일이 지난 7월 6일에 서울 시민 모두가 참석한 가운데 효창공원에서 국민장이 거행되었습니다. 의사님의 옆에는 이봉창의사와 백정기의사도 함께 모셨습니다. 의사님이 존경하던 백범 선생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의사님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때 의사님 고향을 갔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태어난 서산시 운산면과 의사님의 고향인 덕산과는 가야산을 서로 마주보는 지척의 거리입니다. 의사님께서 수덕사에 자주 오르셨죠. 저도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갔었는데, 의사님과는 달리 몸이 약했던 저는 코피를 흘렸던 기억만 납니다. 수덕사에서 정혜사에 오르는 도중에 만공탑이 있습니다. 이 탑에는 만공스님이 해방의 소식을 듣고 무궁화 꽃을 꺾어 ‘세계일화 世界一花’라고 일필휘지한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대학원 시절 그곳을 오르다가 탁본하던 스님을 도와주고 얻어 온 그 글씨는 지금도 저의 연구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 4월 29일, 의거 한 시간전에 백범에게 건넨 시계

저는 대학원에서 한국독립운동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홍주의병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홍주의병은 목숨을 건 투쟁을 두 차례나 했습니다. 저는 도대체 그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저는 남당 한원진의 사상을 계승한 김복한 등 남당학파 유학자들이 위정척사론에 입각하여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의병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복한의 활동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의사님께서 그의 의병 정신의 영향도 받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김복한은 의사님께서 17살 되던 1924년 홍성에서 작고하셨습니다. 그때 의사님의 스승이신 성주록은 김복한의 죽음을 애도하는「만지산장(輓志山長)」이라는 만시를 지어 김복한이 춘추의 의리를 다하였으며, 그의 티 없는 굳은 절개를 다시 보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습니다. 의사님께서 성주록 선생의 손에 이끌려 홍성의 유교부식회에 참여하신 것이 17살 때 쯤인 걸로 압니다. 유교부식회는 바로 김복한의 뜻에 따라 조직된 그 문인들이 조직한 유교진흥운동 단체입니다. 그곳에서 의사님께서는 김복한의 의병 정신에 대하여 많은 말씀들을 들으셨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의사님께서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난 다음 해 23살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부모님과 처자에게 살아서 돌아오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집을 나오셨습니다. 부인 배씨에게는 ‘물 좀 한 그릇 주오’라는 말로 영원한 이별을 고하셨습니다. 둘째 아기가 배여사의 몸 속에 잉태되어 있는 것도 몰랐다니 무심한 남편이셨군요. 도대체 가족을 버리고 떠날 만큼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요? 의사님께서는 혼자 방바닥을 치면서 ‘사람이 왜 사느냐’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결국 ‘부모처자의 사랑보다 한층 더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면서 상해 행을 결심하셨죠. 의사님이 모친께 보낸 편지에서 그렇게 밝히셨더군요. 

의사님께서는 고생 끝에 청도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상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었고, 김구 주석을 비롯한 안창호 선생 등 애국지사들이 계셨습니다. 의사님께서는 백범 선생을 만나 ‘마음의 폭탄’을 가슴 속에 지니고 왔다면서, 이봉창의사와 같은 임무를 맡겨줄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태극기 앞에서 백범 선생과 사진을 찍을 때 이미 죽음을 각오하신 듯 했습니다. 가족 사항을 적으면서 ‘유족’이라고 쓰셨더군요. 의사님께서는 죽을 것을 알면서 폭탄을 품고 홍구공원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시라카와 대장과 일본군 제9사단장 우에다를 비롯하여 상해점령의 승리를 외치던 침략의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져 천벌을 내리셨습니다. 의사님의 빛나는 의거는 정의의 심판이었습니다. 의사님의 대의거는 만보산사건 때문에 뒤틀려있던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을 풀리게 하였습니다. 또 장개석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최대의 지원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한 개인으로서 이렇게 영향력 있는 행위를 한 인물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 윤의사의 안경집

의사님, 당신의 아들 모순이는 아비 없이도 훌륭하게 성장하였습니다. 부인께서는 당신이 보낸 편지를 장롱 속에 넣어두었다가 아들에게 자주 읽어주면서 당신의 뜻을 잊지 않도록 했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의사님의 의거일을 처음 맞이한 날인 1946년 4월 29일에 아드님 모순이는 윤종(尹淙)의 이름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들어, 훌륭한 국민이 되겠습니다”라고 감격에 넘치는 답사를 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의사님 같은 분들의 희생으로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북아시아 지역은 여전히 패권주의적 경향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지나친 영토욕으로 동북아시아는 또 다시 긴장감이 맴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지각한 이들은 친일적인 교과서를 편찬하고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도 의외로 많습니다. 의사님께서는 자신의 길이 정의를 밝히는 길이며, 민족의 지상명령이라고 여기셨습니다. 저희 역시 의사님의 뜻에 따라 정의의 역사를 길이 계승해 나가겠습니다. 의사님의 고귀한 피는 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찬양될 것입니다.

 

   
 

   김상기 / 충남대 교수

 

 

 

이한꽃 기자 59yoon@hanmail.net
Copyright @2013 우리문화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영등포구 영신로 32. 그린오피스텔 306호 | 대표전화 : 02-733-5027 | 팩스 : 02-733-5028 발행·편집인 : 김영조 | 언론사 등록번호 : 서울 아03923 등록일자 : 2015년 | 발행일자 : 2015년 10월 6일 | 사업자등록번호 : 163-10-00275 Copyright © 2013 우리문화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ine996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