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편지 178] 심산 김창숙 선생께 드리는 글 -최재성-

2014.01.14 06:32:45

[그린경제/얼레빗 = 이한꽃 기자]

100년 편지에 대하여.....

100년 편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2019년)을 맞아 쓰는 편지입니다. 내가 안중근의사에게 편지를 쓰거나 내가 김구가 되어 편지를 쓸 수 있습니다. 100년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역사와 상상이 조우하고 회동하는 100년 편지는 편지이자 편지로 쓰는 칼럼입니다. 100년 편지는 2010년 4월 13일에 시작해서 2019년 4월 13일까지 계속됩니다. 독자 여러분도 100년 편지에 동참해보시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매주 화요일 100년 편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문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02-3210-0411

 

효창 공원에 / 스산한 바람 불고 / 처절한 비 내리는데 / 통곡하며 부르노라 / 일곱 선열의 영혼을.
땅속에 묻힌 말라버린 뼈 / 일찍이 무슨 죄를 졌기에 / 멋대로 공병대의 / 괭이 아래 파헤쳐지는가.
 
저 남산 / 저 탑골 공원을 보라 / 하늘을 찌르는 동상이 / 사람의 넋을 빼앗는구나.
독재의 공과 덕이 / 지금은 이렇듯 높을지나 / 두고 보시오 / 桑田碧海 / 일순간에 뒤집힐 것을.

19565월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그 무렵 이승만 정권 지시에 따라 효창원에 있던 김구, 윤봉길, 이봉창 등 일곱 열사 묘를 이장하고 운동장을 개설하기 위해 공병대가 공사에 착수하자 선생께서 이를 저지하고, 신문에 게재하신 시입니다. 독립 운동가들을 홀대하고 독재자를 숭배하던 당시 세태를 비판하고, 독재자에게 경고를 발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문은 칠언율시 한시로서 195669일자 동아일보에서 볼 수 있음)
 
   
▲ 김창숙 선생 동상 (성균관대)
선생께서 하신 상전과 벽해 일순간에 뒤집힐 것이라는 예언이 현실이 된 것은 만 4년이 지나지 않은 때였습니다. 19604월 독재자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가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맞아 권좌에서 쫓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난 시민들은 탑골 공원과 남산에 있던 이승만 동상을 철거했습니다. 이로써 이승만은 국민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후 강산이 다섯 번 변할만한 세월이 흐른 뒤에 또 한 번 상전 벽해현상이 나타났습니다. 2011, 남산 중턱에 황금 빛을 뽐내는 이승만 동상이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그로부터 2년이 흘러 2013년에는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보는 한 무리 사람들이 이승만을 칭송하는 내용을 서술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가 정부 검정을 통과하여 큰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선생께서 살아 계셔서 이것을 보셨다면, 얼마나 참담하셨을까요.
 
  심산 선생의 생애를 두고 흔히 반외세 반독재로 점철돼 있다고들 합니다. 1879년 경북 성주 땅에서 동강 김우옹의 13대 종손으로 태어나신 선생은 국권수호운동에 참가하여 반외세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 1909합방청원운동을 벌이던 일진회를 성토하는 건의서 작성 등이 대표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곧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선생께서는 이제 민족해방투쟁에 투신하게 됩니다. 1919년 파리에서 열리는 강화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유림 130여명의 서명을 받은 파리 장서주도(‘1차 유림단 사건’),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운동을 벌여 나석주 의사 의거 지원(‘2차 유림단 사건’) 등이 그것입니다.
   
▲ 김창숙 선생 재판 기사
이 일이 있고 난 뒤 선생께서는 1927년 상해 공동조계 병원에서 체포되어 국내(대구)로 압송되었고, 고문으로 앉은뱅이(벽옹)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살인 미수, 치안유지법·폭발물 취급령 위반이란 혐의로 14년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이후 병세 악화로 인한 임시 석방과 재 구금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해방을 맞으셨습니다. 철저하게 항일의 길을 걸으신 것입니다.
 
  해방을 맞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38 이남과 이북에 두 개의 정부가 세워지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선생께서는 반독재 운동에 나서시게 되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1951년 대통령의 실정과 독재를 비판하는 이승만 대통령 하야 경고문발표였습니다. 이 일로 선생께서는 부산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하셨습니다. 19526월에는 반독재 호헌 구국선언 대회를 주도하셨다가 40일간 구금되셨습니다(‘국제구락부 사건’)
 
사사오입 개헌1956년 제3대 정·부통령선거를 통해 이승만은 3선 취임을 합니다. 이에 선생께서는 대통령 삼선취임에 일언을 진함이란 글을 발표하여 부정 선거를 비판합니다. “각하의 행정 전후 8년 동안에 많은 실덕(失德)이 있었으나 과거는 모두 덮어두기로 하고 만근(輓近) 선거를 통하여 드러난 각하의 실덕은 천하인의 이목을 엄폐치 못할 사실입니다. 5·15 선거를 비롯하여 8·8 8·13 거는 이것을 선거망국이라 단언합니다.”라고 하시고 각료 중 간신배 축출, 자유당 해체, 부정선거 무효화 및 재선거 실시를 촉구하셨습니다.
 
1957년에는 시 <경무대에 보낸다>를 지어 최남선 죽음에 이승만이 조사를 지어 기린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정부 구성 이전에 친일파 숙청을 주장하셨던 선생께서는 친일의 거두최남 을 용납할 수 없었는데, 그의 노제에 대통령이 조사를 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5918일에는, 전 해 있었던 보안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을 위한 전국민 총궐기 연합체 구성을 제창하셨습니다. 이어 116일에는 보안법은 이 민족을 억압하는 망국법이요, 이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경찰국이며, 따라서 이 대통령은 국민 앞에 사과하고 하야하라.’라는 내용의 보안법 반대 및 대통령 하야 성명서와 자유당 성토 성명서를 발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1960년 이승만 정부는 4월 혁명을 맞아 붕괴되었습니다. 이승만 자신은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었습니다. ‘독재의 공과 덕이 일순간에 뒤집히고, ‘하늘을 찌르는 동상이 땅바닥에 뒹굴게 되었습니다. 반 독재 투쟁으로 일관하신 선생께서 이승만 독재에 승리하신 것입니다.
 
   
▲ 1950년대의 김창숙 선생 모습
그러나 반 세기가 지난 지금, 다시 선생을 패배자로 만들고, 이승만을 승리자로 기록하려는 역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숨죽여 있던 이승만 찬가가 다시 이 땅을 가득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이승만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이 현실 권력을 빌려 강력한 조직을 갖춰가고 있습니다. ‘독재의 공과 덕이 다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떠나신 지 50여 년. 이 땅에는 다시 분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일흔 해 가까운 옛적 한반도에는 극심한 좌우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남북 분단으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남쪽 땅마저 두 동강이 나려 합니다. 이 두 가지 현상의 배경에서 공통적인 일은 분열의 아이콘이란 평가를 받는 이승만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인류 보편 가치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독재자 이승만 수법을 본받은 무리들이 활개를 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정권 안보를 위해 국가보안법을 만들고, 자신에 반대하는 정적을 간첩으로 몰아 목숨을 빼앗고, 3·15 부정 선거에 저항하여 일어난 국민들을 향해 공산당 사주를 받은 것이라 호도했던 것은 선생께서도 생전에 보셨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그들 생각과 다른 사람들은 좌익 빨갱이’, ‘종북으로 몰리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은 국민을 상대로 편 가르기를 강요하는 일이고, 그들이 즐겨 쓰는 말인 국론 분열행위입니다. 아마 선생께서 1950년대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여 벌이신 일에 대해서도 그들은 좌빨종북딱지를 붙이려 들 것입니다.
 
자유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인류 보편 가치를 심하게 훼손시켰던 이승만을 두고서 단지 초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만을 가지고 존경해야 한다는 일부 주장을 이제 10대 학생들에게 강제로 주입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디에서 아버지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인물을 이토록 강제로 아버지로 부르도록 만들까요. 아마 휴전선 이북 땅이 아니면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입니다. 퇴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공부해 온 저는 이 시도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일시적 퇴보는 있을지언정 결국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향해 진보할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최재성                         
     성균관대학교 초빙교수

이한꽃 기자 59yoo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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