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를 민비, 조선을 이조로 불러서는 안돼

  • 등록 2014.07.23 06:4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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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2804]

[그린경제/얼레빗=김영조 기자] 주한영국총영사 힐리어는 “왕비는 복도 아래로 달렸지만, 추적당해 쓰러졌다. 그녀의 암살자는 그녀의 가슴 위에 반복적으로 그의 칼로 그녀를 찔렀다.”고 기록했다. 베베르는 “왕비는 복도를 따라 도망쳤고, 그 뒤를 한 일본인이 쫓아가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왕비를 바닥으로 밀어 넘어뜨리고, 그녀의 가슴으로 뛰어들어, 발로 세 번 짓밟아, 찔러서 죽였다.”고 보고했다.

 

위는 동북아재단 김영수 연구위원이 쓰고 경인문화사가 펴낸 ≪미텔의 시기(을미사변과 아관파천)≫에 나오는 명성황후 시해에 관한 당시 외교문서를 확인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국모를 시해당해야 했습니다. 그때 주한일본공사 미우라는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암살의 주범이며, 대원군의 요청에 따라 일본군이 도와준 것이다. 조선은 왕이 무능하고 왕비가 폭정이 심해 백성들이 수탈을 당하고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조선을 도와준 것이고, 명성황후의 죽음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합니다. 이후 식민사관이 지배한 우리 역사는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인 말로 도배되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연구들에 따르면 명성황후를 뒤덮은 부정적인 시각은 대부분 일본과 식민사학자들이 만든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일본은 당시 조선을 점령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으로 보았던 명성황후 제거를 “여우사냥”이라 하여 일본 정권의 일로 추진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명성황후를 민비라는 말로 비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고종실록》 37년(1900년) 11월 12일 기록에 보면 고종이 “올해는 바로 명성 황후(明成皇后)의 나이가 만 50이 되는 해이므로 짐의 슬픈 마음은 다른 해보다 다르다. 탄신일에 경효전(景孝殿)에서 전작례(尊酌禮, 제의(祭儀)를 갖추지 않고 술만 올린 채 임금이 몸소 지내는 제사)를 친행(親行)하겠으며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 명성황후 영정

그렇다면 당시 고종 임금과 대한제국의 조정은 “명성황후”라는 시호를 올리고, 그렇게 불렀던 것이 분명합니다. 더구나 조선의 관례는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다음에는 시호가 정식 호칭이 되었음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민비”라는 말은 쓰는 것은 우리가 일제의 흉계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조선을 낮춘 말로는 “민비”말고도 “조선”을 “이조(李朝)”라고 한 것과 고종황제 역시 '덕수궁 이태왕(德壽宮 李太王)'으로 부른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아직도 지식인이라는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와 “민비”라고 하는 것을 보며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김영조 기자 pine99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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