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 = 전수희 기자] 청춘! 헤르만헤세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청춘’이란 낱말은 눈부시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그 눈부신 ‘청춘’ 일 때는 그걸 잘 모른다. 눈부시기는커녕 어렵사리 나온 대학에 걸맞은 직장도 구하기 어려운 시대다. 직장이 없으니 하루하루 불안한 나날의 연속인 것이 오늘 한국 청춘들의 현주소다.
|
 |
|
▲ 다닥다닥 붙은 신림동 고시촌의 입주자들을 찾는 광고들 |
|
 |
|
▲ "월식합니다" 시림동 고시촌에서 한달씩 밥을 먹는 식당 풍경 |
그래도 청운의 꿈을 품은 청춘들이 있다. 열심히 공부 하면 사법시험에 턱허니 붙어서 번듯한 직함과 함께 사회적 신분상승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젊은이들은 신림동 고시촌으로 몰려들었다. 이른바 ‘고시촌 청춘!’. 그들의 삶을 살펴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어 다녀왔다. 지난 9월 11일부터 시작되어 11월 8일까지 전시한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신림동 고시촌 시내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그 정류장 담벼락에는 빈방이 있다는 작은 쪽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좁은 골목 안 하숙집에 책상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볕도 들지 않는 눅지고 좁은 방 형광등 불빛 아래 법학 책이 빼곡하게 꽂힌 그 책상에 앉았던 사람은 누구일까?
|
 |
|
▲ 신림동 고시생의 책상 |
|
 |
|
▲ "오로지 공부"라 쓰인 글이 고시생들의 애환을 말해준다. |
|
 |
|
▲ 방값, 밥값, 독서실비 등 해서 고시생의 한달 생활비가 편균 137만원 들어간다. |
“포기하자는 결심은 수십, 수백 번도 더 했어. 그때마다 5년 동안 책만 파고 살아온 내가 공부 말고 뭘 할 수 있을까? 6년 동안 책만 파고 온 내가 사회에 적응 할 수 있을까? 7년 동안 한 우물만 파고도 실패한 내가 다른 일이라고 잘 할 수 있을까? 10년 동안 날 믿고 기다려준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할까? 시간이 흐를수록 결심은 수월해지는데 실행에 옮기기는 그만큼 더 힘들어지더라. 그렇게 마음먹을 때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하고 답답하고 겁나더라.” 김용철의 <느닷없이 타임머신>이라는 글귀가 전시장 벽면을 채우고 있다.
도림천 건너편 신림9동(현 대학동)에는 이른바 ‘신림동 고시촌’이 자리하고 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이전해오면서 이곳은 대학생들의 주거공간이자 고시공부를 하는 이들의 하숙촌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 80년대 말 이곳에 ‘고시학원’이 등장하고 법조인을 대거 선발하던 90년대가 되자 전국의고시생들이 꿈을 향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고시원은 지금의 고시촌을 이루었다.
|
 |
|
▲ 1980년대 서울대가 신림동에 들어오면서 고시촌도 시위 열풍에 휘말리게 된다. |
신림동의 역사는 시대의 흐름을 연속적으로 반영하며 이곳에 머물렀던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다. 이는 1960~70년대 도시개발에 밀려 정착한 철거민의 삶과 80년대 희뿌연 화염 속에서 민주화를 갈망하던 젊은이들의 패기, 90년대 1평짜리 작은 방에서 꿈을 향해 숨죽이던 고시생들의 공간, 그리고 2000년대 방황하는 ‘1인 가구’의 긴 한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로스쿨 제도의 도입과 2017년 사법시험 폐지 등으로 인해 많은 고시생들이 고시촌을 떠났다. 때문에 이들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시설들이 폐업을 하거나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대신 1인가구로 대표되는 다양한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들고 있다. 타 지역보다도 저렴한 주거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고시촌은 또 다른 이들에게 삶의 터전이 되고 있다.
|
 |
|
▲ 현재 고시촌도 고시생들이 떠나고 빈방 있다는 광고만이 외롭다. |
|
 |
|
▲ 한 아이와 아버지가 다정하게 신림동의 과거 영상을 보고 있다. |
|
 |
|
▲ 벽에 빼곡히 붙은 신림동 과거 사진들과 이를 관람하는 사람들 |
고시생들의 애환을 느껴볼 수 있는 '고시촌 청춘' 전에서 ‘청춘’의 고민을 엿보는 것도 이 가을 좋을 일이다.
*서울역사박물관: 무료 관람(매주 월요일 휴관),
* 11월 8일까지
*전화:02-724-0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