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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시사 합작시 70. 도(道)와 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도(道)와 길 도가 진리면 길은 삶의 방향 (돌) 도가 추상이면 길은 구체 삶 (심) 로고스와 통하니 길 넓어져 (달) 넓은 길엔 드나들 문 없다네 (빛) ... 25.2.3. 불한시사 합작시 “도(道)”를 단순히 “길”로 번역하는 문제는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이해의 문제이다. 길은 분명 인간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방향이며, 실천의 방식이고, 선택의 궤적이다. 그러나 도(道)는 그러한 길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 질서이자, 모든 길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진리와 법칙에 가깝다. 이 점에서 “길”은 경험적이고 구상적이며, “도(道)”는 초경험적이며 근원적이다. 길은 걸어가야 비로소 생겨나지만, 도는 걷기 이전에도 이미 그러한 길이 가능하게 하는 바탕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도를 길이라 옮기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을 지상적 차원으로 끌어내려 이해하게 되며, 그 본래의 심연적 의미는 일정 부분 가려지게 된다. 이는 곧 노자의 도덕경 제1장의 말,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의 문제와 직결된다. 도를 말할 수 있는 순간, 그것은 이미 고정된 개념이 되어버리고, 그러한 개념화된 도는 더 이상 “상도(常道)”일 수 없다는 선언이다. 여기서 상도(常道)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드러나면서도 결코 완전히 규정될 수 없는 근원적 섭리의 흐름을 뜻한다. 따라서 “도(道)”와 “길”은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다르지도 않다. 길은 도의 한 국면이며, 도는 길의 총체적 근거다. 길은 도의 나타냄이며, 도는 길의 근원이다. 이 둘은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심물철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무형즉유형 유형즉무형 (無形則有形 有形則無形)"의 쌍즉적 관계 속에 있다. 다시 말해, 도는 보이지 않는 길이며, 길은 드러난 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는 문자에 대한 이해로도 이어진다. 한자는 단순한 표기 수단이 아니라, 형상과 의미가 결합한 뜻글로서 세계를 구조적으로 사유하는 도구다. 특히 갑골문 이래 동이문자의 형성 과정은 인간이 자연과 사물을 어떻게 직관적으로 포착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며, 이는 단순한 음성기호를 넘어선 세계 인식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한글은 음성의 구조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만든 소리글로서, 인간의 발성과 음운 체계를 가장 정밀하게 반영한 문자다. 이 둘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음양처럼 상보적인 관계에 있다. 한자는 의(意)의 문자, 곧 형상과 의미의 결절점이며, 한글은 음(音)의 문자, 곧 소리와 호흡의 흐름이다. 앞으로 통일시대의 어문정책은 어느 하나를 배제하거나 단일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오히려 두 체계를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는 단지 전통문화 보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유의 폭을 넓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최근 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한류(韓流)와 더불어 한국어 학습 열풍은 이러한 가능성을 더욱 현실적인 것으로 만든다. 한국어는 한글이라는 과학적 문자 체계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동이문자의 결과인 한자를 통해 축적된 동아시아 사유의 깊이를 동시에 품고 있다. 이중적 구조는 오히려 약점이 아니라, 세계 언어사에서 보기 드문 독창적 자산이다. 따라서 미래의 언어 환경은 단순히 “한국어의 확산”을 넘어서, 한글과 한자가 함께 작동하는 복합적 사유 체계의 확산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때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새롭게 여는 통로가 될 것이다. 결국 ‘도(道)’와 ‘길’의 문제에서 출발한 철학적 물음은, 존재와 표현, 그리고 문자와 문명의 문제로 확장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드러난 것을 다시 근원으로 되돌리는 이 순환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말 이전의 말, 길 이전의 길에 다가서게 된다. 결구의 의미처럼 그 길은 이미 열려 있으되, 정해진 문은 없다.(북경에서 라석) 불한시사(弗寒詩社)는 문경의 불한티산방에서 만나는 시벗들의 모임이다. 여러 해 전부터 카톡을 주고받으며 화답시(和答詩)와 합작시(合作詩)를 써 왔다. 합작시의 형식은 손말틀(휴대폰) 화면에 맞도록 1행에 11자씩 기승전결의 모두 4행 44자로 정착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정형시운동으로 싯구를 주고받던 옛선비들의 전통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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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美)에 대칭되는 말, 오(惡)는 미가 부족한 것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난주에 공대 학장인 ㅂ 교수가 미녀식당에 와서 미스 K와 차를 마시는 중에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가 나왔단다. 우리나라 라면 업계에서 3위를 유지하고 있는 대기업 회장의 아들인 ㅂ 교수는 일찍이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유명 공대에서 미사일 유도 기술을 공부한 그는 졸업한 뒤 바로 무기 관련 미국 회사에 취업하여 잘 나갔다. 그러다가 나이 50을 넘게 되자 고향 생각도 나고 친구들도 만나고 싶어서 귀국했는데, S대 총장이 학장으로 초빙하여 뒤늦게 교수가 되었다. 외국 여행이 취미인 ㅂ 교수는 방학만 되면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ㅂ 교수는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파스타 요리를 좋아한단다. 몇 년 전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여행 갔다가 우연히 책방에서 영어로 쓰인 파스타 요리책을 한 권 사왔다. 그런데 미스 K가 파스타 요리를 연구한다는 것을 알고서 그 책을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아름다움, 곧 미(美)에 관한 것이었다. ㅅ 학장이 미스 K에게 물었다. “K 사장님은 40대라고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름다운 몸매를 유지할 수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20대로 보여요.” “호호호. 아름답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비결을 좀 공개해 주세요. S대 남자 교수들이 모두 궁금해하는 사항입니다.” “호호호. 비법은 따로 없는데...” ㅂ 학장도 비법을 공개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나도 궁금합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을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 있나요? 대답해 보세요. 입을 열지 않으면 파스타 요리책을 회수하겠습니다.” 공대 학장님까지 나서자 미스 K는 건강미를 유지하는 자신만의 비결을 소개했다. 아름다운 몸을 유지하기 위한 비법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온몸의 세포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세포는 하나하나가 생명체라고 볼 수 있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을 움직여 준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몸의 각 부분을 바라보면서 “세포야 안녕?”이라고 인사를 해 준다. 발톱의 세포에도 관심을 가지면 발톱이 두꺼워지거나 갈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피부 세포에 관심을 가지면 피부 세포가 늙지 않는다고 한다. 피부가 탄력을 유지한다고 한다. 그녀가 걸을 때는 아랫배에 힘을 주고 씩씩하게 걷는다. 동양식으로 말하면 단전에 힘을 주고 걷는다는 것이다. 팔굽혀펴기할 때도 단전에 힘을 주면 오히려 잘 된다. 기운의 중심을 단전에 두고 걸으면 몸이 가볍고 다리가 피곤해지지 않는다. 그렇게 걸으면 소화도 잘되고 장기의 모든 기능이 좋아진다. 장기의 기능이 좋아지니 혈색도 좋고 피부는 탄력을 유지하고, 자연스럽게 건강미를 유지할 수가 있다고 한다. ㅅ 학장이 물었다. “젊었을 때는 아무리 아름다워도 사람이 늙으면 추해지지 않겠어요?” 미스 K가 이의를 제기했다. “늙는다고 반드시 추해진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곱게 늙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ㅇ 학장이 모처럼 끼어들었다. “어느 정도까지겠지요. 요즘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100살 먹은 노인이 고울 수가 있을까요?” ㅅ 학장이 다시 말했다. “100살까지 살고 싶지 않아요. 자식들에게 추한 모습 보이지 말고 적당히 살다가 죽어야지. 노인이 추하지 않게 늙을 수가 있을까요?” 대화의 주제는 아름다움에서 시작하여 추함이란 무엇인가로 전개되었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의 팬인 K 교수가 미추(美醜)에 관한 도올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도올 김용옥은 1987년에 초판이 나온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작은 책에서 미와 추에 관하여 예리한 분석을 하였다. 노자(老子)는 미(美)에 대칭되는 말로서 추(醜)를 쓰지 않고 오(惡)라는 글자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오(惡)는 미의 대립이 아니고 미가 부족한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발견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미인과 대비되는 말은 추녀가 아니다. 못생긴 여자는 구제불능이 아니고 노력하면 미인으로 변할 수도 있다. 추녀는 미가 부족한 여자로 보아야 한다. 중국인들의 사상에 따르면 미와 추가 대립적으로 존재하지 아니한다. 이러한 논리는 선악 개념에도 적용된다. 도올의 설명에 따르면 윤리적인 선과 악도 대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악은 선의 대립이 아니고 선의 부족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한다. 선의 대칭은 악이 아니라 선의 부정적인 형태로서 불선(不善, 선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계속)









![[새책]호랑이는 숲에 살지 않는다](http://www.koya-culture.com/data/cache/public/photos/20260416/art_17765523444903_9a6ddb_90x60_c0.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