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
조선시대 금주령, 양반은 마시고 백성은 잡혀가고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내친김에 K 교수는 술에 관하여 여러 가지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K 교수는 술을 많이는 못 마셔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매우 즐기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성(詩聖) 두보는 “사람의 마음을 너그럽게 해 주는 데는 술이 제일이요, 사람을 흥겹게 해 주는 데는 시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라고 했다. 시선(詩仙) 이태백은 “술 석 잔이면 대도(大道)에 통하고 술 한 말이면 자연과 합일하는 경지로 접어들 수 있다”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술에 관한 기록은 부여시대 영고라는 제천의식에서 술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 이미 소주가 등장했고, 조선시대에는 180종의 술이 있었다. 현재까지 전하는 민속주로는 문무백관과 사신접대용으로 쓰인 경주 법주를 비롯한, 말술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도 석 잔을 못 넘기고 취한다는 면천 두견주, 대동강 물로 빚어야 제맛이 난다는 문배주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주이다. 외국의 유명한 술을 보면, 마시면 천일 동안 깨지 않는다는 중국의 천일주, 55도인데도 순하게 느껴지는 달고 아름다운 마오타이주, 위스키의 자존심 부캐넌스, 빈 병값만 7만 원 하는 코냑 루이13세 등이 유명한 술에 속한다. 술을 마시는 풍습도 민족에 따라 시대에 따라 매우 다르다. 서양에서는 자기가 마시고 싶은 만큼 따라 마시는 자작문화가 발달해 있고, 중국에서는 건배를 자주 외치며 모두 함께 마시기를 권하는 대작문화가 발달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술잔을 서로 주고받는 수작(酬酌) 문화가 일반적인 주도다. 해동잡록에 보면 옛날 사람들은 풍류의 결사나 시 모임 그리고 계꾼들이 모여서 우의를 다질 때 연종음(蓮鍾飮)을 했다고 한다. 널따란 연잎으로 잔을 만들어 술을 돌려 마시는 운치있는 풍습이다. 옛날 스파르타인들은 연회가 열릴 때마다 술을 잔뜩 먹인 한 무리의 노예를 끌고 들어와 청소년들에게 구경을 시켰다고 한다.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관찰한 뒤 스파르타 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첫잔은 갈증을 면하게 해 준다. 둘째 잔은 유쾌하게 만들어 준다. 셋째 잔은 발광을 시작하게 한다.”라는 교훈을 얻고 술에 대한 자제력을 키웠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1920년 1월부터 금주법이 시행됐다. 알코홀 중독 남편의 폭행에 시달린 한 주부의 탄원이 계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법거래가 성행하였으며 비싼 밀주와 관련된 범죄조직이 기승을 부렸다. 술을 숨어서 마셔야 하므로 담소하면서 여유 있게 마실 수가 없었다. 빨리 마시고 술병을 치워 버려야 하므로 독주가 유행하였다. 엉뚱하게도 인접한 카나다의 위스키 업체들이 급격히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음주가 특권층과 부유층의 상징으로 간주되었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좀처럼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밀주 제조업자들은 산업용 주정을 사서 술을 만들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산업용 주정에 유해 색소를 타서 유통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불법 주정으로 만든 술이 여전히 유통되고 1926년에는 수천 명이 사망하는 사고까지 나타났다. 이를 보고 시민들은 정부가 합법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술로 스트레스를 풀 수 없게 된 저소득층의 폭력이 늘어나서 금주령 폐지에 대한 논란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결국 1933년에 금주령은 폐지되었고 오랫동안 인류가 즐겨왔던 술을 법으로 금지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재미난 것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금주령’이란 말이 304차례 나온다. 조선시대에도 술이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그 탓에 영조 등 많은 임금이 금주령을 내렸지만, 희생당하는 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다.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백성은 술을 빚어 팔았다고 잡혀가고, 몰래 술 마셨다고 잡혀가지만, 금주령이 내려진 대낮에도 양반들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신 것은 물론 술을 마시고 대로를 활보했다고 한다. 결국 영조 임금은 ‘금주령을 없애고 술주정하는 것만 금하도록 하라.’ 하라는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뿐만이 아니라 근대에 와서도 우리나라는 금주가 국민운동으로 시행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22년 물산장려운동과 함께 자급자족과 소비절약의 일부로서 기독교단체에서 시작한 금주운동이 추진되었으나 2년 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기독교의 일부 보수 교단에서는 신도들에게 아직도 금주를 엄격히 요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일 인당 술 소비량은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1996년 통계로는 그 비싸다는 발렌타인 30년짜리 생산량의 1/3을 한국에서 수입하고, 로얄 살루트(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을 기리기 위하여 1953년부터 시바스 브라더스에서 생산하는 위스키)도 1년 생산량 12만 병 가운데 1/3인 4만 병이 우리나라에서 소비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술에는 인색하지 않은 우리나라 사람이 책값으로는 술값의 1/10 정도밖에 지출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이러한 통계는 모든 국민이 분수를 모르고 외국 빚 얻어다가 잔치를 벌였던 IMF 이전의 부끄러운 수치이다. 2014년 통계를 보면 한국은 술 소비 10대 국가에 끼지 못하였다. 2024년 발표된 세계보건기구의 최신 통계를 보면 대한민국의 1인당 연간 술 소비량은 세계 51위 수준이다.) 한가한 오후, 네 사람은 미녀식당 베란다에서 포도주를 마시며 술을 주제로 재미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미스 K는 간간히 오는 손님 때문에 자리를 계속 지키지 못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도 끝까지 합석하였다. 다음에 또 만나서 스파게티를 먹기로 약속을 하고서 세 교수는 미녀식당을 나섰다. (계속)
-
원오리 절터, 흙으로 빚은 부처님 형상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소조 불상은 흙으로 빚은 부처님의 형상입니다. 원오리(元五里) 절터에서 출토된 소조 불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고구려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소조 불상의 특징 부처님의 형상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재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소조(塑造) 불상,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목조(木造) 불상, 돌로 만든 부처님은 석조(石造) 불상이라고 합니다, 동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고 표면에 도금한 금동(金銅) 불상, 그리고 흙으로 부처님을 만들어 삼베[麻]로 감싼 뒤 옻칠을 하고 칠이 굳으면 다시 흙을 제거하는 건칠(乾漆) 불상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소조 불상은 조형 재료로 점토를 사용하는데 재료의 특성상 물기가 마르면 수축하여 변형과 균열이 생기고 결국에는 부서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약점 탓에 지금까지 완성된 형태로 전하는 소조 불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출토 사례가 적지 않은 점을 보면 부처님 형상을 만들 때 흙을 널리 이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흙은 우리 주변에서 비교적 손쉽게 구하는 경제적인 재료였기 때문에 소조 불상은 값싸고 빠르게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소조 불상은 한반도에 불교가 전해지는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졌는데, 이는 부처님 형상을 가장 쉽게 만들 수 있고 실패에 대한 부담감도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고구려 소조 불상의 발견 1932년 평양 서북쪽에 있는 만덕산 서남쪽 기슭에서 이불(泥佛), 곧 소조 불상이 발견되었습니다. 1937년, 이 근처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고구려 절터가 확인되었으며 많은 소조 불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원오리 절터입니다. 이 발굴로 고구려 절터가 처음으로 확인됩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원오리 절터에서 출토된 부처님 204점, 보살 108점 합쳐서 312점의 소조 불상 조각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으므로 실제로는 더 많은 소조 불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표면에 흰색으로 바탕칠을 한 흔적이 남아 있어서 채색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불상 파편을 자세히 관찰하면 부처님과 보살의 형태나 크기가 거의 비슷한데, 틀을 사용하여 대량으로 찍어내는 틀 찍기 기법이 활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대동강가에 있는 평양 토성리에서 소조 불상을 찍었던 틀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원오리 절터에서 이용한 불상의 틀로 보이는 거푸집[范] 파편이 평양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흙이 재료이기에 가능한 불상 제작 방법이었습니다. 원오리 소조 불상의 값어치 원오리 절터 소조 불상의 아래쪽에는 나무젓가락 같은 막대기를 꽂을 수 있는 구멍이 있습니다. 아마도 바닥과 불상을 고정하기 위한 장치로 추정됩니다. 또한 바닥에는 대량 생산된 불상의 수량을 헤아리기 위한 표식 같은 명문도 새겨져 있습니다. 소조 불상이 절의 어느 공간에, 어떻게 모셔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원오리 절터 소조 불상은 고구려 불교문화를 엿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앞으로 평양 인근 고구려 절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고구려 불교문화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봅니다. 소조 불상의 또 다른 장점은 실패해도 언제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형상을 만드는 사람(조각가)에게 소조 불상은 다른 재료보다 부담이 적고 자신의 조각 솜씨를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최고의 재료가 아니었을까요? 고구려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원오리 절터 소조 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조각실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김지호)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