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저는 나가노현 마츠모토시에서 온 곤도 이즈미라고 합니다. <마츠모토 강제노동 조사단>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강제노동 실태를 조사하고 있는 시민입니다. 박창희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듣고 1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1주기 추도회에 참석하게 되어 뜻깊게 생각합니다. 저는 젊은 시절부터 한국ㆍ조선에 대해 동경과도 같은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에는 선배들로부터 마츠시로 대본영(松代大本営은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정부와 황실, 군사 사령부를 이전하여 최후 항전을 벌이기 위해 나가노현 마츠시로에 건설했던 거대한 극비 지하 벙커, 필자 주) 지하호 공사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실태 조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이 저지른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조선인과 중국인에게 강요했던 고난과 강제노동의 역사를 동료들과 함께 오랜 시간 조사해 왔습니다. 박 선생님과 처음 만난 것은 선생님이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마츠시로에 오셨을 때였습니다. 그 뒤 선생님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셨을 때, 일본에서도 석방 요구 운동이 전개되었고 저 역시 그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 일본과 한국·조선을 잇는 무지개가 되기를 바라며- 박창희 선생 1주기 추도사 중 일부 - 곤도 이즈미 (日本と韓国・朝鮮を繋ぐ虹にならんことを願って, 朴昌熙先生一周忌追悼の辞. 近藤 泉)- 이는 지난 7일(화) 낮 2시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회관 2층 강연실에서 열렸던 ‘역사와 함께 민족과 더불어, 박창희 교수 1주기 추모 심포지엄’에 참석한 일본인 곤도 이즈미(近藤 泉) 씨의 추모글이다. 곤도 이즈미 씨(75살)는 자신이 살고 있는 나가노 지역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및 외국인을 연구한 책 《본토결전과 외국인강제노동(本土決戦と外国人強制労働)》(2023, 일본 ‘高文硏’ 출판)을 쓴 <마츠모토 강제노동 조사단> 단원이다. 이날 추모 행사는 2부로 나뉘어 진행되었는데 심규호 (전 제주산업정보대학 총장, 제주국제대 교수)의 개회사로 시작되었다. 이어 ‘역사와 함께 민족과 더불어’라는 심포지엄의 주제를 살린 발표 곧 1) 박창희의 민족 문제 인식과 논리(제주국제대, 심규호), 2) 박창희의 세종연구: 세종에게 국가의 길을 묻다(원광대 조성환), 3) 박창희의 고려사 연구의 학술적 의의(한국외대 여호규), 4) 외대 학보 기록으로 보는 박창희(한국외대 변선영), 5) 국민학교 개명 운동의 성과와 역사적 의의(한성대, 유영초) 등 모두 5개의 주제 발표 시간을 가졌으며 박창희 교수의 제자 등 80여 명이 참석하여 그 유업을 기렸다. 곧이어 2부 순서는 유영초 교수의 사회로 ‘ 박창희와 나, 그리고 한일연대와 우정’이라는 주제로 곤도 이즈미(마츠모토 강제 노동 조사단): 박창희 선생님과의 추억, 채승곤 (중남미 정보센터 LAIC대표): 외대 가면극연구회와 박창희 교수, 박종관(외대 사학과 86): 박창희 교수와 외대 사학과 교수에 관한 주제로 대담이 이어졌다. 대담 뒤에는 이날 자리를 함께한 류리수 박사 등 몇몇 제자들의 추억담과 제언 등이 있었다.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1주기 추모제에서 박창희 교수님의 심오한 학문의 세계와 투철한 역사의식, 따스한 인간미를 다시 돌아볼 수 있는 뜻깊은 시간이었다. 1995년에 간첩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가면서 해임되신 스승의 1주기 추모식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본격적인 학술 심포지엄의 서막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박창희 교수님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제자들의 사무치는 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매우 기뻤다. 교수님께서도 오늘 우리들의 추모제를 보시고 같은 마음이셨을 것 같다." 이는 곤도 이즈미 씨를 안내하여 스승의 병문안을 다니던 제자 류리수 박사의 소회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이자 시대의 참 지식인이었던 박창희 교수는 한국 사학계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을 뿐 아니라 올곧은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왜곡되고 뒤틀어진 한국사를 바로잡기 위해 앞장서 왔던 분으로 유명하다. 그 대표적인 업적의 하나를 든다면,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에서 유래한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꾼 노력을 꼽을 수 있다. 지난한 노력 끝에 1996년 오늘날의 초등학교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이고 보면 새삼 박 교수님의 역사 인식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박창희 교수는 1950년대 일본 유학 시절,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폭로한 고마쓰가와 사건(이진우 사건)을 접한 뒤 사형을 앞둔 이진우의 구명 운동과 재일동포 처우 개선을 위해 힘썼으며, 귀국 뒤에는 독도연구회 지도 교수,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 조사연구회장 등을 역임하며 일본의 역사 왜곡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한편, 양심 있는 일본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한일 사이의 발전적 교류의 지평을 넓혔다. 이날 직접 추모회에 참석한 곤도 이즈미 씨도 한일 사이의 연대와 관련있는 인연이었다. 곤도 이즈미 씨의 추모글 가운데 다음 대목에 기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국을 방문하여 이동하는 차 안에서 선생님은 식민지 지배의 아픔을 담담히 들려주셨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절 국민학교에서 우등생이었던 모습, 봉안전 청소를 솔선수범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깊은 고뇌와 슬픔을 담아 고백하셨습니다.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이 조사 여행을 통해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마음 깊이 되새기게 되었습니다. (중략) 선생님 댁을 방문 했을 때 ‘여기는 산수유 마을이랍니다. 꽃이 만발할 때 오세요’라며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재작년, 선생님의 병세가 안정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댁을 찾았을 때, 마침 산수유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마을 전체가 마치 노란 구름 속에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만남일지도 모른다'라는 예감이 들어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돌이켜보면 선생님께 아직도 배우고 싶은 것들이 참 많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라며 삶과 연구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곤도 이즈미 씨의 추모글이 가슴을 친다. 필자가 박창희 교수님의 역사 강의를 수강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년 전 일이다. 일본어 전공인 필자가 교양필수 과목 수강을 위해 첫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적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 보도듣도 못한 교재인 《주해 사료국사》>라는 아주 두꺼운 책에 한 번 놀랐고, 교수님의 신념에 찬 역사 인식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러면서도 형용할 수 없이 빛나던 교수님의 눈동자는 지금도 잊히지 않고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 그때 역사 강의는 모두 잊어버렸지만, 그동안 필자가 친일파 청산 단체에 관여하고 한편으로는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추적하면서 집필 작업을 해오고 있는 것도 돌아보면 모두 그때 교수님께서 '역사인식'에 불을 지펴준 덕이 아닌가 싶다. 지난해 이천에 사시는 교수님께서 위독하시다는 말씀을 후배에게 들었음에도 찾아뵙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올해 1주기 추모제에도 부득이 참여하지 못해 여간 죄스러운 마음이 아니다. 대신 추모제에 참석차 내한한 곤도 이즈미 씨를 안내하고 있는 류리수 후배를 통해 이번 추모제의 소상한 전모를 들었고, 사진을 제공받아 이 글을 쓴다. 내년 2주기 추모제 때는 꼭 참석하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고 박창희 교수의 제자로서 스승님께 드리는 헌시로 이날 추모제 기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시대의 어둠을 밝힌 겨레의 횃불 - 박창희 교수님 타계 1주기에 부쳐 세월의 강물은 쉼 없이 흘러 어느덧 교수님 가신 지 한 해가 되었습니다. 민족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껴안고 굽힘 없는 올곧은 목소리로 진리의 강단에 서 계시던 그 모습이 오늘따라 더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교수님께서 심어주신 웅장한 겨레의 혼은 이제 수많은 제자의 가슴 속에서 등불이 되어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습니다. 지식의 파편을 가르치기보다 역사의 거대한 맥박을 읽게 하신 교수님! 강단 너머 서늘한 시대의 양심으로 부끄러움 없는 삶을 몸소 실천하신 그 뚝심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교수님! 이제는 우리가 교수님의 뒤를 따라 뒤틀린 역사를 바로 세우고 이 겨레가 나아갈 길을 밝히겠습니다. 교수님께서 남기신 고결한 가르침을 저희가 다시 잇고 닦아 꺼지지 않는 겨레의 횃불로 이어가겠습니다. 그날 강의실에서 듣던 우렁찬 교수님의 목소리는 깊은 울림으로 오늘의 우리를 다시 일깨우고 있으니 부디 우리의 정진을 지켜봐 주십시오. 교수님! 사랑합니다. 【박창희 교수는 누구인가!】 박창희 교수(1932.12.6~2025.7.8)는 경남 밀양 출신으로 도쿄도립대학 석사와 히토쓰바시대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l, 이화여자대학교 조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용비어천가』에서의 ‘천’과 ‘민’의 관념》(1991), 《주해 사료국사》(1981), 《한국사의 시각》(1984), 《야스쿠니 신사와 그 현주소》(2007), 《역주 용비어천가》 상ㆍ하(2015) 등이 있으며 특히 역사학적 연구에서 고대ㆍ중세 사료의 엄밀한 주해뿐만 아니라 야스쿠니 신사와 일제 강제동원의 실체를 날카롭게 파헤치는 독창적인 한일관계사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시민사회 활동에서도 학술적 고증을 바탕으로 마쓰시로 대본영 지하호 조사, 국민학교 명칭 개정, 독도 수호 등 일제 잔재 청산과 영토 주권 회복을 실천으로 이끈 행동하는 양심, 참 지식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 (韓国文化新聞=李潤玉(イ・ユノク)記者) 「私は長野県松本市から参りました近藤泉と申します。<松本・強制労働調査団>という市民グループを立ち上げ、強制労働の実態調査に取り組んでいる一市民です。朴昌熙(パク・チャンヒ)先生が世を去られたという悲報に接してから早いもので1年が経ちました。本日、このように一回忌の追悼会に参列できましたことを、深く感慨を覚えております。私は若い頃から、韓国・朝鮮に対して憧れにも似た親近感を抱いておりました。大学時代には、先輩方から松代大本営地下壕(※太平洋戦争末期、日本政府や皇室、軍事司令部を移転して本土決戦に備えるために長野県松代に建設された巨大な極秘地下要塞。筆者注)の建設工事に、多くの朝鮮人労働者が強制動員されたという実態調査の話を伺いました。 これを機に、日本が引き起こした侵略戦争と植民地支配、そして朝鮮や中国の人々に強いた苦難と強制労働の歴史について、仲間たちと共に長年にわたり調査を続けてまいりました。朴先生と初めてお会いしたのは、先生が韓国外国語大学の学生を連れて松代を訪ねてこられた時でした。その後、先生が国家保安法で拘束された際には、日本でも釈放を求める運動が広がり、私もその活動に加わりました」―― 日本と韓国・朝鮮を繋ぐ虹にならんことを願って、朴昌熙先生一周忌追悼の辞。近藤 泉 ―― これは、去る7日(火)午後2時から韓国外国語大学・教授会館2階の講演室で開かれた「歴史とともに、民族とともに――朴昌熙教授一回忌追悼シンポジウム」に出席した日本人、近藤泉(こんどう いずみ)氏(75)の追悼の言葉である。近藤氏は、自身が暮らす長野県内に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や外国人の足跡を研究し、著書『本土決戦と外国人強制労働』(2023年、高文研刊)を出版した<松本・強制労働調査団>のメンバーである。 この日の追悼行事は2部構成で行われ、シム・ギュホ(元済州産業情報大学総長、現済州国際大教授)の開会の辞で幕を開けた。続いて「歴史とともに、民族とともに」というシンポジウムのテーマにふさわしい5つの研究発表が行われた。1) 朴昌熙の民族問題認識と論理(シム・ギュホ、済州国際大)、2) 朴昌熙の世宗研究:世宗に国家のあり方を問う(チョ・ソンファン、円光大)、3) 朴昌熙の高麗史研究における学術的意義(ヨ・ホギュ、韓国外大)、4) 外大学報の記録から見る朴昌熙(ピョン・ソニョン、韓国外大)、5) 国民学校改名運動の成果と歴史的意義(ユ・ヨンチョ、漢城大)。会場には朴教授の教え子など約80名が集まり、その偉大な足跡を偲んだ。 続く第2部では、ユ・ヨンチョ教授の司会のもと「朴昌熙と私、そして日韓の連帯と友情」をテーマに鼎談が行われた。近藤泉氏(松本・強制労働調査団)が「朴昌熙先生との思い出」を、チェ・スンゴン氏(中南米情報センターLAIC代表)が「外大仮面劇研究会と朴昌熙教授」を、パク・ジョングァン氏(外大史学科86年入学)が「朴昌熙教授と外大史学科」について語り合い、その後は出席したリュ・リス博士ら教え子たちからも、在りし日の思い出や今後の提言が寄せられた。 「教え子たちが自発的に開いたこの一回忌の追悼の場で、朴昌熙教授の深い学識、透徹した歴史意識、そして温かい人間味に改めて触れることができ、胸が熱くなりました。1995年にスパイの濡れ衣を着せられて投獄され、大学を追われた恩師の追悼式は、単なる別れの場ではなく、本格的な学術シンポジウムへの第一歩のように感じられました。何よりも、朴教授を愛し、慕い続ける教え子たちの切ないほどの思いがひしひしと伝わってきて、胸がいっぱいです。先生もきっと、大空の上から私たちのこの姿を、同じ温かな眼差しで見守ってくださっているに違いありません」これは、近藤泉氏の案内役を務め、生前は恩師の病床へ何度も見舞いに通った教え子、リュ・リス博士の言葉である。 韓国外国語大学の史学科教授であり、時代を先導する知識人であった朴昌熙教授は、韓国の史学界に偉大な足跡を残しただけでなく、歪められた歴史を正すために生涯を捧げたことで知られる。その代表的な業績の一つが、日帝の皇国臣民化政策に由来する「国民学校(クンミンハッキョ)」という名称を、現在の「初等学校(チョドゥンハッキョ)」へと改めさせた運動である。粘り強い闘いの末、1996年に現在の名称が実現したことを思えば、朴教授の歴史に対する信念がいかに不変のものであったかが身に染みてわかる。 朴教授は1950年代の日本留学中、在日同胞への差別と偏見を浮き彫りにした「小松川事件(李珍宇事件)」を目の当たりにし、死刑囚となった李珍宇(イ・ジヌ)の助命運動や在日同胞の処遇改善に奔走した。帰国後は、独島研究会指導教授や松代大本営地下壕調査研究会会長などを歴任し、日本の歴史歪曲に正面から立ち向かう一方で、良識ある日本人との連帯を築き、日韓草の根交流の新たな地平を切り拓いた。この日、はるばる追悼会に駆けつけた近藤泉氏もまた、そうした日韓の絆が生んだ尊い縁の一人であった。近藤氏の追悼の言葉の中で、記者が思わず目頭を熱くした一節がある。 「韓国を訪れ、移動する車中で、先生は植民地支配の痛みを淡々と語ってくださいました。日本の植民地時代、国民学校で優等生だったこと、奉安殿の掃除を進んで行っていたご自身の少年時代の姿を、深い苦悩と悲しみをにじませながら吐露されたのです。何も知らなかった私は、この調査旅行を通じて、日本が過去に犯した過ちを心の底から深く省みるようになりました。(中略)先生のご自宅を訪ねた際、『ここはサンシュユの里なんですよ。花が満開の季節にまた来てください』と温かく迎えてくださいました。 一昨年、先生の病状が落ち着いたと聞いて再びご自宅を訪ねた時、ちょうどサンシュユの花が咲き乱れ、村全体がまるで黄色い雲に包まれているかのようでした。その時、『もしかしたらこれが最後の別れにな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予感がよぎり、尽きぬお話を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が、今振り返っても、先生から学びたかったことがまだまだ山のようにあります。先生もまた、『まだやりたいことがたくさんある』と、生きること、そして研究への強い意志を語っていらっしゃいました」 近藤氏のこの言葉が、深く胸に突き刺さる。 筆者が朴教授の歴史の講義を受けたのは、今から45年も前のことだ。日本語を専攻していた私が、一般教養の必須科目として初めてその教室に入った時の衝撃は、今も鮮明に覚えている。それまで見たことも聞いたこともない『註解 史料国史』という分厚いテキストに圧倒され、続いて、教授の信念に満ちた熱い歴史講義に魂を揺さぶられた。あの時、言葉では言い表せないほど強く輝いていた教授の眼差しは、今も私の心から消え去ることはない。月日が流れ、講義の細かな内容は忘れてしまったかもしれないが、今、私が親日派清算の活動に関わり、女性独立運動家たちの生涯を追う執筆活動を続けているのも、振り返ればあの教室で、教授が私の心の中の「歴史へのまなざし」に火を灯してくださったからにほかならない。 昨年、利川(イチョン)にお住まいの教授が危篤であるとの報を後輩から受けながらも、ついに最期のお見舞いに伺うことができなかった。そればかりか、今回の一回忌追悼祭にも諸事情で参列できず、申し訳なさで胸が潰れそうな思いでいる。代わりに、追悼祭のために来韓した近藤泉氏を案内していた後輩のリュ・リスを通じて式の様子を詳細に聞き、写真を提供してもらってこの稿を起こした。来年の二回忌には必ず参列することを心に誓いつつ、故・朴昌熙教授の教え子の一人として、恩師に捧げる献詩をもって、この追悼の記事を締めくくりたい。 時代の闇を照らしし 民族の灯火 ―― 朴昌熙教授のご逝去一回忌に寄せて ―― 歳月の河は 淀みなく流れ恩師が旅立たれて はや一年が経ちました 民族の痛ましき歴史を その身に抱き不屈の、まっすぐな声を響かせ真理の教壇に立たれていた あの日の姿が今日ほど 切なく慕われる日はありません 先生が私たちに植え付けてくださった 雄大なる民族の魂は今、数多の教え子の胸の内でともしびとなり 絶えることなく燃え盛っています 断片的な知識を 授けることよりも歴史の巨大な脈動を 読み解かせようとした先生! 教壇を超え 厳冬のごとき時代の良心として恥じることなき生を 自ら体現されたその不屈の意志を私たちは 永遠に記憶にとどめます 先生!これからは 私たちがあなたの後ろ姿を追い歪められた歴史を 正しこの民族の進むべき行く手を 照らしてまいります 先生が遺された 高潔なる教えを私たちが再び受け継ぎ 磨き上げ絶やすことなき 民族の松明へと繋いでまいります あの学び舎で響いた 先生の朗々たる声は深い残響となり今もなお 私たちを呼び覚ましています どうか 私たちの精進を 天上より見守り給え 先生! 心より愛しております。 【朴昌熙教授の歩み】朴昌熙教授(1932年12月6日~2025年7月8日)は、慶尚南道密陽(ミリャン)出身。東京都立大学で修士号、一橋大学で博士号を取得した後、梨花女子大学助教授、韓国外国語大学史学科教授を歴任した。主な著書に『「龍飛御天歌」における「天」と「民」の観念』(1991)、『註解 史料国史』(1981)、『韓国史の視角』(1984)、『靖国神社とその現在地』(2007)、『訳註 龍飛御天歌』上・下(2015)などがある。 その歴史学的研究においては、古代・中世史料の厳密な註解にとどまらず、靖国神社や日帝による強制動員の真相を鋭く糾弾し、独創的な日韓関係史の地平を切り拓いたと高く評価されている。また市民活動の面でも、学術的考証を礎としながら、松代大本営地下壕の実態調査、国民学校の名称変更運動、独島(トクト)守護活動など、歴史の爪痕の清算と領土主権の回復を実践によって牽引した。「行動する良心」であり「真の知識人」の象徴として、今なお深い敬意を集め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