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제대로 된 한옥 사진집을 발견했다. 월간 《행복이 가득한 집》의 사진기자였던 이동춘과 경희대 주거환경학과 교수였던 홍형옥이 합작한 사진집, 《한옥ㆍ보다ㆍ읽다》가 그 책이다. 한옥의 멋과 매력을 한껏 담은 사진은 물론이고, 사진에 담긴 한옥을 설명하는 글 또한 으뜸이다. 모르고 보면 ‘한옥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싶을 수 있지만, 알고 보면 한옥만큼 다채롭고 개성이 살아 있는 우리 문화도 없다. 월간지 기자로 일하며 전통문화를 지키는 이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던 글쓴이는 자유기고가로 독립한 뒤, ‘내 것’을 찍기 위해 고심하다가 마침내 전통문화를 화두로 삼았다. 그때부터 전국 방방곡곡의 한옥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월간지 시절 찍었던 한옥 사진과 자유기고가 시절 찍은 사진, 그리고 홍형옥 교수의 설명에 어울리는 한옥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 찍은 사진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이 되었다. 공들여 찍은 사진이 많은 만큼,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풍부한 사진과 자세한 해설이다. 내용이 알차면서도 편집을 공들여 한 덕분인지 잘 보이고, 잘 읽힌다. 한옥이란 어떤 집이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오늘날에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천 원권 지폐의 앞면에 나오는 도산서원의 주인공, 퇴계 이황. 그가 17살의 어린 임금을 걱정하며 마지막 충정으로 바친 책이 있으니, 바로 《성학십도》다. 이 책은 성학(性學), 곧 성리학을 잘 깨우칠 수 있는 열 개의 그림을 엄선한 것으로, 어린 임금도 쉽게 그 이치를 살펴 바른 정치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성리학 인포그래픽(데이터 시각화 인포메이션 그래픽)’쯤 될까? 퇴계 이황은 성리학의 주요 내용을 도표로 정리한 것은 물론, 형이상학적인 관념 체계를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성껏 그림을 그렸다. 퇴계 이황 같은 성리학의 대가가 평생 쌓아 올린 학문적 성취를 열 장의 그림으로 압축한 ‘족집게 과외’를 받을 수 있었던 선조는 운이 좋은 임금이었다. 성학은 한마디로 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수양하고 닦아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사단칠정(士端七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단은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를 일컫고 칠정은 희, 로(노여움), 애(슬픔), 락, 애(사랑), 오, 욕의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천변만화하는 마음을 다스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공부(工夫). 이 단어 하나에 무수한 애환이 녹아있다. 공부는 예로부터 한국인에게 숙명 같은 존재였다. 공부에 울고 웃는 한국인, 그 ‘공부 DNA’를 추적해보면 선비의 공부가 있다. 선비에게 공부는 응당 해야 하는 것이었고, 평생 갈고닦아야 하는 거울 같은 것이었다. 이 책, 《선비들의 평생 공부법》은 이런 선비들의 공부법을 정리한 책이다. 중요한 내용은 옮겨 쓰며 공부했던 정약용의 초서 공부법, 거울을 닦듯 매일 꾸준히 공부했던 이황의 반복 공부법, 스스로 생각하고 이치를 구하며 사색을 중요시했던 서경덕의 사색 공부법 등 오늘날 적용해도 무리가 없을 많은 공부법이 유형별로 잘 정리되어 있다. 지은이가 분석한 선비들의 공부법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공부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누구나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고, 둘째, 공부는 배움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지 출세의 수단이 될 수 없으며, 셋째, 공부한 것을 반드시 실천하여 앎과 행함이 어우러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누구나 배움의 기쁨을 누리고, 또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 선비의 공부법이라는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워낙 과거제도가 치열했던 만큼…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팔천(八賤)! 조선에는 흔히 ‘팔천(八賤)’이라 불리는 여덟 가지 낮은 신분이 있었다. 바로 사노비, 승려, 백정, 무당, 광대, 상여꾼, 기생, 공장이었다. 이들은 갖은 설움을 받으며 인간보다 못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억울해도 호소할 곳도 없이 그저 타고난 신분을 탓하며 울분을 삼켜야 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태어나면 양반, 중인, 양인, 천민 이렇게 네 가지 신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신분제도는 상당히 유동적이었고 신분 간 이동도 빈번했으나 점차 제도가 굳어지면서 한 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 한 번 천민은 영원한 천민이 되었다. 이 책, 《나도 조선의 백성이라고!》는 천민으로 태어나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여덟 부류의 천민을 각각 짧은 동화와 설명으로 보여준다. 흔히 조선시대를 떠올릴 때 열심히 농사짓는 농부나 글을 읊는 선비를 생각하기 쉽지만, 이들이야말로 그런 양민들의 삶을 죽을힘을 다해 떠받친 조선의 백성이었다. 특히 천민 가운데 가장 수가 많았던 사노비는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주인에게 짐승 취급을 받기 일쑤였고, 어떤 때는 말이나 소보다 싼값에 매매되기도 했다. 승려 또한 조선이 유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한글은 어떤 점이 우수할까? 일상에서 늘 쓰는 한글이지만, 한국인이라도 막상 이 질문을 받으면 서너 개도 말하기 어렵다. 배우기 쉽고 소리내기도 쉬운데, ‘뭔가 머리로는 아는데 말로 설명이 안 되는’ 느낌이다. 이 책, 《한글이 우수할 수밖에 없는 열두 가지 이유》를 보고 나면 그 까닭을 열두 개나 말할 수 있게 된다. 한글의 우수함을 어린이들도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작가가 정성스럽게 만든 이 그림책은, 우수한 것은 알지만 왜 우수한지 선뜻 말하지 못했던 어른들에게도 꽤 유용한 책이다. 한글이 우수한 까닭은 첫째, 세종 대왕이 만든 글자다. 세종대왕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만든 우리 글자, 그것이 바로 한글이다. 전 세계의 많은 글자 가운데 임금이 백성을 위해 직접 만든 글자는 한글밖에 없다. 둘째,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정확하게 아는 글자다. 알파벳이나 한자, 다른 나라의 글자는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한글은 세종대왕이 1443년에 창제하고, 2년 9개월의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만백성에게 반포한 것이 명확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한글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창제자, 창제 동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9)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 만년에 큰 경복일레라. -《시경》- 이렇게 좋은 의미를 지닌 집에서 사는 인생은 어땠을까? 하루하루 술에 취하고 덕을 베풀며, 큰 복을 누리며 살았을까? 이 집의 주인이 되어 하루하루를 보내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조선의 법궁, 경복궁에서 일상을 보내던 임금들이다.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중국의 시집인 《시경》에 있는 말을 따서 지은 것으로, 임금의 큰 은혜와 어진 정치로 만백성이 아무 걱정 없이 잘 살아간다는 뜻이다. 이 책, 《경복궁에서의 왕의 하루》는 경복궁에서 흘러가는 임금의 일상을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정겹고도 다정하게 들려준다. 어린이용 책답게 내용이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잘 담아냈고, 풍부한 그림도 함께 실려있어 우리 궁궐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임금의 하루는 익선관포를 갖추어 입고 차림새를 단정히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아침 수라에 해당하는 자릿조반을 먹은 뒤, 어머니인 대비가 기거하는 자경전으로 가서 아침 문안을 드린다. 경복궁의 자경전은 고종 때 조대비(익종의 비 신정왕후)를 위해 지은 건물로, ‘자경’은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조선 국왕은 모두 나라를 경영하는 경영자였다. 그리고 정조는 썩 훌륭한 최고경영자(CEO)였다. 조선 임금들 가운데서도 나라를 잘 경영했다고 상당히 높게 평가받는 군주다. 물론 어느 임금이나 그렇듯 정조 치세도 명(明)과 암(暗)이 있지만, 그가 조금 더 살아서 조선을 지탱했더라면 조선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 책, 《CEO, 정조에게 경영을 묻다》는 정조의 국가경영 방식에서 시사점을 도출해 오늘날 경영자들에게도 많은 지혜를 주는 책이다. 경영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만큼, 정조의 경영방식 가운데는 오늘날에도 취할 것들이 꽤 많다. 그의 경영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그는 기본적으로 적을 강하게 키워 적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하는 상생경영을 펼쳤다. 조선시대 많은 당쟁의 역사에서 보듯 ‘나 살고 너 죽자’ 식으로 반대편의 씨를 말리는 그런 섬멸전법을 구사하지 않았다. ‘호적수’를 만났다 싶으면 오히려 그 사람을 크게 키워 견제세력으로 활용했다. 이는 어찌 보면 적이 강해도 내가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매사에 자신의 의견에 순응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시인 연산군! 흔히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연산군에게, 시인이라는 표현은 좀 낯설다. 조선에서 글을 배운 선비라면 누구나 필수 교양으로 시를 짓곤 했지만, 임금은 좀 달랐다. 이성적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군주에게 감성적인 시 짓기는 그다지 권장되는 덕목이 아니었다. 그래서 임금이 어제시(御製詩)를 지을 때마다 신하들은 삼갈 것을 권하곤 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달랐다. 그는 보위에 오른 뒤에도 80여 편에 달하는 어제시를 지을 만큼 시를 좋아했다. 그 내용은 대체로 감상적이고 즉흥적이며 자기애가 충만한 것들이었으나, 때로는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살벌한 시도 있다. 연산군은 자신이 지은 시를 비서실 격인 승정원에 내리고, 승지들에게 답시를 지어 올리게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책, 《조선국왕 연산군》은 ‘88편의 시로 살피는 미친 사랑의 노래’라는 부제에 걸맞게 연산군이 남긴 88편의 시로 그의 내면에 흐르는 광기와 고독, 사랑을 보여주는 책이다. 소설과 해설을 절묘하게 섞어 쓰는 작가의 필력 덕분인지 재밌게 술술 읽힌다. 중간중간 들어가는 어제시가 연산군의 심리 상태와 광기를 잘 드러낸다. 연산군은 잘 알려진 것처럼 조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김란사! 언뜻 듣기에도 몹시 이국적인 이 이름은, ‘낸시(Nancy)’라는 세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다. 김란사는 구한말 태어나 1919년 숨을 거둘 때까지, 조선 여성 교육과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헌신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화학당의 교사로 많은 여성을 깨우치고, 또 고종의 비밀문서를 갖고 파리강화회의로 향했던 중요한 업적에 견줘 오늘날 거의 아는 이가 없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아마 파리강화회의로 향하던 중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아까운 삶을 일찍 마쳤기 때문이리라. 이 책, 《김란사, 왕의 비밀문서를 전하라!》의 지은이 황동진은 서울교육박물관에서 학예연구사로 활동하는 그림작가다. 2017년 김란사 특별전을 기획하고, 전시가 끝나서도 김란사를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에 이 책을 펴냈다. 김란사는 1872년, 평양의 한 유복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청나라에 오가며 무역한 덕분에 남부러운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에는 혼인을 10대 시절에 일찍 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녀는 스물한 살에 경무청에서 일하던 하상기와 혼인했다. 여느 여성들과 다르게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 일을 적극적으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훈맹정음’. 척 보아도 그 뜻이 짐작이 간다. 바로 맹인을 위한 한글점자다. 눈이 보이는 이는 일상적으로 읽는 한글도 맹인에겐 큰 산이다. 점자를 통해 세상을 보는 그들에게 한글점자, ‘훈맹정음’의 존재는 세상을 밝히는 등대요, 촛불이다. 1926년, 이렇게 소중한 ‘훈맹정음’을 만드는 큰일을 해낸 이가 있으니, 바로 박두성이다. 지은이 최지혜는 박두성이 나고 자란 강화도 어느 산자락에서 바람숲그림책도서관을 운영하며 그림책 《훈맹정음 할아버지 박두성》을 썼다. 박두성은 강화도보다 더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섬, ‘교동도’에서 1888년 가난한 농부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였던 박두성의 집안은 교동교회에 봉사하며 신실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어릴 때는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지만, 여덟 살부터는 강화도에 있는 학교에서 공부했다. 졸업하고 나서는 얼마간 농사를 짓다가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처음엔 일반 초등학교에서 보통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스물다섯 살이었던 1913년, 조선총독부 제생원에 속한 맹아학교 선생님이 되어 처음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