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여름내 눅눅해진 몸과 마음 은혜로운 가을 햇살에 포쇄하고 발길 뜸했던 조상 묘 찾아 큰절로 후손 도리 다 하더라 모진 무더위에 지쳤을세라 미꾸리 꼬리 치는 추어탕에 애호박 숭덩숭덩 칼국수로 온 가족 둘러앉은 밥상머리 대풍일세 오늘은 24절기의 열네 번째 절기로 입추와 백로 사이에 드는 ‘처서(處署)’입니다. 아직 불볕더위가 수그러들지 않고 있지만 여름이 지나 더위도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 처서라 한 것처럼 가을 하늘은 멀지 않았습니다. 위 김철이 시인이 <처서>라는 시에서 노래했듯이 이날은 여름내 눅눅해진 몸과 마음을 은혜로운 가을 햇살에 포쇄 곧 말리는 날입니다. “처서에 창을 든 모기와 톱을 든 귀뚜라미가 오다가다 길에서 만났다. 모기의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귀뚜라미가 그 사연을 묻는다. ‘미친놈, 미친년 날 잡는답시고 제가 제 허벅지 제 볼때기 치는 걸 보고 너무 우스워서 입이 이렇게 찢어졌다네.’라고 대답한다. 그런 다음 모기는 귀뚜라미에게 자네는 뭐에 쓰려고 톱을 가져가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긴긴 가을밤 독수공방에서 임 기다리는 처자낭군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술과 퇴선(退膳)ㆍ약봉(藥封, 종이에 싼 약)을 하사하였다.” 이는 《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1593년) 8월 12일 기록입니다. 여기 나오는 ‘퇴선’은 임금이 들고 남은 음식을 신하나 아랫사람들에게 내려주어 먹을 수 있게 한 곧 ‘상물림’을 말합니다. 또 ”오늘 음식을 하사하고 그릇을 나눈 일을 알게 하여 대대로 내 자손을 보필하게 하라’고 일렀다.”라는 《영조실록》 13년(1737) 8월 14일의 기록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수라상이 12첩 반상이라 하여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엄청나게 차려진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임금이 혼자 먹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이 상물림은 궁궐뿐 아니라 감영 등 관아에서도 있었지요. 예를 들면 감사가 밥을 먹고 나면 이 물림상은 이방, 호방 등 6방과 비장(무장), 수청기생이 번갈아 차례를 정해가며 받아갑니다. 우리 겨레의 아름다운 풍습이었지요. 《표준국어사전》에서 ‘물림’을 찾아보면 “물려받거나 물려주는 일”이라고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림 가운데는 상물림 말고도 큰상물림, 대물림, 안방물림, 밥물림 따위도 있습니다. 큰상물림은 혼인 때 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찜통더위 여전히 한창인데 도둑같이 찾아온 입추(立秋). 여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가까스로 마련되는 가을의 거점. 위는 정연복 시인의 <한여름의 입추>라는 시 일부입니다. 시인은 “찜통더위 여전히 한창인데 도둑같이 찾아온 입추(立秋).”라고 노래합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3번째 입추(立秋)로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날입니다. 해가 지나가는 길인 황경(黃經)이 135°에 도달하는 때지요.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종요로운 때이므로 비가 내리지 않고 맑은 날씨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입추가 지난 뒤 비가 5일 이상 계속되면 비가 멎기를 바라는 기청제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는 비가 오기는커녕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위 시 <한여름의 입추> 뒷부분에는 “여름의 끝 아직 저만치 있어도, 가을 또한 첫발을 내디뎠으니. 익을 대로 푹 익어버린 한여름 속에, 머잖아 아기같이 가을은 생겨나리.”라고 언어의 농축을 합니다. 지금 불볕더위기 기승을 부려 열대야로 몸살을 앓고 온열환자가 목숨을 잃는 일이 잦지만, 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본격적인 여름을 맞아 전통사회 사람들이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쉬었던 다양한 방식을 소개한다. 오늘날과 같은 연차 휴가는 아니었지만, 관료에게는 제도화된 휴일과 휴가가 있었고, 선비는 독서와 교유로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농민들은 농사일이 한고비를 넘으면 호미를 씻어 걸어 두고 마을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며 쉬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쇄미록(瑣尾錄)》과 《해주일록(海洲日錄)》에는 무더위와 고된 노동 속에서 잠시 일손을 놓고 재충전했던 옛사람들의 모습이 남아 있다. 관료에게도 휴일과 휴가가 있었다 신라시대에도 관인의 휴일과 휴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더욱 구체적인 규정이 마련됐다. 고려의 관인들은 매월 1일ㆍ8일ㆍ15일ㆍ23일, 대략 7일마다 하루씩 쉬는 ‘칠가(七暇)’를 누렸다. 자신이 병들거나 부모를 간병할 때, 멀리서 사는 부모를 찾아뵙거나 부모의 묘를 돌볼 때에도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혼례ㆍ상례ㆍ제사ㆍ질병ㆍ부모 봉양 등을 위한 ‘급가(給暇)’가 운영됐다. 세종은 젊고 재능 있는 문관들이 공무에서 벗어나 독서에 전념하도록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무더위의 한가운데인 중복(中伏)입니다. 여기서 ‘복(伏)’ 자는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있는 모양으로, 가을철의 금(金) 기운이 땅으로 내려오다가 아직 더운 여름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복종한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이 복날을 '서기제복'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서기제복에서 '복(伏)'은 꺾는다는 뜻으로 써서 복날은 더위를 피하는 피서가 아니라 정복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중복은 삼복의 둘째 날인데 하지 뒤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初伏), 넷째 경일을 중복(中伏), 입추 뒤 첫 경일을 말복(末伏)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또는 삼복이라 합니다. 천간(天干: 갑-甲ㆍ을-乙ㆍ병-丙ㆍ정-丁ㆍ무-戊ㆍ기-己ㆍ경-庚ㆍ신-辛ㆍ임-壬ㆍ계-癸) 가운데 ‘경(庚)’이 들어간 경일을 복날로 삼은 까닭은, 경(庚)이 계절로 가을을 상징하는데 이날을 복날로 정해 더위를 극복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복날은 열흘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립니다. 그러나 올해처럼 해에 따라서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걸리기도 하는데, 이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두째인 대서(大署)입니다. 이때는 대개 중복(中伏) 무렵으로, 올해는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아 사람들은 무더위(물+더위)로 고생합니다. 장마 때의 이 후텁지근한 더위를 우리는 무더위 말고 찜통더위 또는 가마솥더위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장마가 지나면 습도가 낮은데 더위가 몹시 심해 이를 된더위, 마른 더위, 강더위라고 하며, 더 심해지면 불더위, 불볕더위가 됩니다. “염소 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더위가 가장 심한 때죠. “쇠를 녹일 불볕더위에 땀이 마르지 않으니 가슴 헤치고 맨머리로 소나무 난간에 앉았노라. 옥경의 신선 벗이 나를 지성스레 생각해 주어 맑은 바람 한 줄기를 나누어 보내주었구려” 이 시에서 불볕더위가 쇠를 녹인다는 말은 한여름 더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1940년에 펴낸 옥담 김위원(玉淡 金偉洹, 1864-1925)의 시문집 《옥담고(玉淡稿)》에 나오는 한시 ‘부채선물에 화답’입니다. 조선시대 옷을 훌훌 벗어 던질 수 없었던 선비들은 냇가에서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하거나 소나무 그늘이 진 정자에서 솔바람 맞으며 시를 읊는 것으로 더위를 피하기도 했습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평생을 토박이말 연구에 바치다 지난 2018년 세상을 뜬 고 김수업 전 우리말대학원장은 장마가 지나 볕만 쨍쨍 내리쬐는 더위를 ‘무더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이라고 짚었습니다. “장마가 지나 습기가 없이 한창 더울 때는 ‘한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하거나 더욱 뜨거우면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라고 해야 올바른 우리말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때가 마침 초복ㆍ중복ㆍ말복 사이라면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린다’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이 흔히 쓰는 ‘무더위’라는 말은 한마디로 ‘물+더위’ 곧 ‘물’과 ‘더위’가 함께 어우러졌다는 뜻으로 생긴 낱말입니다. ‘무더위’는 ‘물더위’에서 ‘ㄹ’이 빠져 ‘무더위’가 된 것으로 후텁지근한 느낌을 줍니다. 더워서 땀이 나기도 하지만 습기 때문에 축축하기도 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장마철처럼 습기가 많아 후텁지근한 더위일 때 ‘무더위’라는 말을 써야 하는 것이지 강렬한 불볕더위를 무더위라 부르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뜻이지요. 여기서 더위를 나타내는 말들을 두 종류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장마철에 습도가 매우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는 무더위
[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열한째로 하지와 대서 사이에 든 소서(小暑)입니다. 하지 무렵까지 모내기를 끝낸 벼는 소서 때쯤이면 김매기가 한창이지요. “소서가 넘으면 새 각시도 모를 심는다.”, “7월의 늦은모는 행인도 달려들고, 지나는 원님도 말에서 내려 돕는다.”라는 속담이 전합니다. 소서가 되어도 모내기를 끝내지 못했다면 새색시건 원님이건 달려들어 도와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요즈음은 농약을 치면서 농사를 지어 예전처럼 김매기, 피사리하는 모습은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예전 방식대로 농약 없이 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허리가 휘고 땀범벅으로 온몸이 파김치가 되기도 합니다. 이때 솔개그늘은 농부들에게 참 고마운 존재이지요. 솔개그늘이란 날아가는 솔개가 드리운 그늘만큼 작은 그늘을 말합니다. 뙤약볕에서 논바닥을 헤매며 김을 매는 농부들에겐 비록 작은 솔개그늘이지만 여간 고마운 게 아닙니다. 거기에 실바람 한 오라기만 지나가도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힐 수 있지요.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소서, 남을 위한 솔개그늘이 되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때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철이므로 푸성귀(채소)나 과일들이 풍성해집니다. 특히 초여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조선 광해조 때 문인 유몽인이 지은 《어유야담》에는 과거를 보러 한양에 왔던 한 선비가 인적이 끊긴 종가 곧 현재의 종로에서 장정 네 명에게 보쌈을 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딘지도 모르게 끌려가 예쁜 여인과 동침할 수밖에 없었던 선비는 그 여인을 잊을 수가 없어 다시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올 때 밤마다 그 종가를 서성였으나 그 장정들을 또 만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때는 과부가 된 여인은 죽을 때까지 개가를 못 한다는 법이 있어 이런 일도 벌어질 수가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납치 형식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과부의 친정 식구들과 미리 합의를 보고 진행하는 일종의 '기획 재혼'도 많았습니다. 가문의 체면을 구기지 않으면서 과부에게 새 삶을 열어주기 위한 사람들의 슬기로운 편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난해서 장가를 가지 못하던 노총각들이 밤거리를 지나가다가 우연히 보쌈 작전에 휩쓸려 혼인에 성공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연산군 4년(1498년) 송헌동이라는 사람이 이 법을 폐하고 개가를 허락해달라고 임금께 청하였지만 대다수 대신이 반대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보쌈’에는 여자집에서 외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의 넷째 ‘춘분(春分)’으로 해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적도를 통과하는 점 곧 춘분점(春分點)에 왔을 때입니다. 이날은 음양이 서로 반인 만큼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습니다. 음양이 서로 반이란 더함도 덜함도 없는 중용의 세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24절기는 단순히 자연에 농사를 접목한 살림살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세계를 함께 생각하는 날이기도 하지요. 춘분에 특이한 것은 겨우내 두 끼만 먹던 밥을 세 끼를 먹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지금이야 끼니 걱정을 덜고 살지만 먹거리가 모자라던 예전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식사가 고작이었죠. 그 흔적으로 “점심(點心)”이란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 먹는 간단한 다과류를 말합니다. 곧 허기가 져 정신이 흐트러졌을 때 마음(心)에 점(點)을 찍듯이 그야말로 가볍게 먹는 것이지요. 우리 겨레가 점심을 먹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하지만, 왕실이나 부자들을 빼면 백성은 하루 두 끼가 고작이었습니다. 보통은 음력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는 아침저녁 두 끼만 먹고, 2월부터 음력 8월까지는 점심까지 세 끼를 먹었는데, 낮 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