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유산청은 공주시와 함께 지난 6월 14일 충남 공주시 마곡사에서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의 국보 승격 지정을 기리는 행사를 열었습니다.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은 고려후기에 조성된 5층 석탑으로, ‘풍마동(風磨銅)’이라고도 불리는 길이 1.8m의 금동보탑을 옥개석 위에 올려 이른바 ‘탑 위에 탑’을 쌓은 매우 특수한 양식을 갖췄습니다. 특히, 금동보탑은 중국 원나라 등에서 유행했던 불탑 양식을 재현하고 있으며, 제작기법이 정교하고 기술적, 예술적 완성도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석탑에서는 유일한 것으로, 당시 불교문화의 국제적인 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서 값어치가 매우 크다는 평가입니다. ‘풍마동(風磨銅)’은 금보다 귀하고 바람에 마모되면 더욱 빛나는 까닭에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조선후기 문신 이의봉(1733~1801)이 1761년 북경의 궁궐을 방문한 뒤 쓴 《북원록(北轅錄, 북경 견문록)》에는 “십자각에는 금정(金頂, 금빛으로 빛나는 정수리)을 더해 놓아 빛이 유난히 찬란했는데, 이는 금이 아니요 이른바 풍마동(風磨銅)으로 외국의 소산이었다. 우리나라 마곡사(麻谷寺)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바라옵건대 여러 책 가운데에서 일상에 가장 절실한 것, 이를테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ㆍ《여계(女誡), 여자의 생활과 처신에 관한 계율》ㆍ《여측(女則)》과 같은 것을 한글로 뒤쳐 찍어서 나눠주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궁액(宮掖, 궁에 딸린 하인)으로부터 조정 벼슬아치의 집에 미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 없이 다 배우게 해서, 온 나라의 집들이 모두 바르게 되게 하소서.” 우리는 흔히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을 조선시대 동안 홀대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위의 《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1517년) 6월 27일 기록을 보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과 같이 일상에 절실한 것들은 한글로 뒤쳐 찍어서 나눠주어 온 백성이 공부하게 하자고 임금에 아룁니다. 이에 중종은 그렇게 하라고 윤허를 내릴 정도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정조가 만 3~4살부터 46살인 정조 22년(1798년)까지 큰외숙모인 여흥민씨(驪興閔氏)에게 보낸 한글편지 16점을 모아 묵은 편지첩인 《정조국문어필첩(正祖國文御筆帖)》이 있을 정도였으며, 2010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펴낸 《명성황후 한글편지와 조선왕실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즘 이재명 정부는 파격적으로 장관을 인선하여서 화제입니다. 세상사 특히 나랏일에는 인사가 정말 중요한 일이고 인재등용에 있어서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이런 고민은 조선시대 세종 때도 있었습니다. 특히 세종은 자신보다 30여 살이 더 많은 아버지 태종 때의 재상들 곧 황희ㆍ허조ㆍ맹사성 등을 재등용하고, 관노 출신 장영실을 곁에 두는 정말 파격적인 인사를 하였습니다. 양반 사대부가들이 온갖 나랏일을 떠맡던 시대에 관노 장영실을 곁에 두고 당시 중국도 만들지 못한 자명종시계 곧 자격루를 만들게 한 세종의 인재 등용술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 자격루는 그동안 전해지지 않았는데 지난 2007년 자격루연구회 이사장 남문현 건국대 교수와 국립고궁박물관 서준 학예사를 중심으로 한 천문과학자와 국가무형문화재 기능장 등 30여 명이 함께 하여 무려 570년 만에 보루각 자격루는 제 모습을 찾아 국립고궁박물관에 공개되었습니다. 이 자격루는 한쪽에 대파수호에서 중파수호, 소파수호로 물을 흘려보내 시간을 가늠케 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한쪽에선 자축인묘...(子丑寅卯) 등 12지신 글씨 팻말을 쥔 인형들이 나와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