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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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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차림을 더욱 우아하게 하는 ‘노리개’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98]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노리개는 조선 여인네들의 한복 저고리 겉고름 또는 치마허리에 차는 꾸미개(장신구)입니다. 모양이 다양하면서도 화려하고 섬세한 노리개는 궁중 사람들은 물론이고, 백성에 이르기까지 두루 즐겨 찼습니다. 몸에 차는 꾸미개는 원래 칼이나 숫돌 같은 삶에 필요한 물건을 허리에 찼던 북방 유목민들의 풍속이 전해진 것이라 하지요. 서긍의 《고려도경》에는 “고려시대 귀족 부녀자들이 허리띠에 금방울금향낭(金香囊, 향주머니)을 찼다.”라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게 허리띠에 달았던 꾸미개들은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 대신 고름에 달게 되었지요. 노리개는 대삼작, 중삼작, 소삼작으로 나뉘는데 대삼작노리개는 궁중이나 양반가의 혼례용으로 쓰였고, 중삼작노리개는 궁중과 양반들의 일상에서, 소삼작은 젊은 여성이나 아이들이 차던 것입니다. 특히 대삼작은 옥나비, 밀화불수(密花佛手, 밀랍 느낌의 천연호박으로 만든 꾸미개), 산호가지, 은장도 따위로 꾸며 매우 화려하지요. 노리개는 띠돈, 끈목, 꾸미개, 매듭, 술의 5가지로 나뉘는데 먼저 띠돈(帶金)은 노리개의 맨 윗부분에 달린 고리로서 노리개 전체를 옷끈에 달 수

나주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 보물 지정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9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4월 21일 문화재청은 나주 정촌고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을 보물 제2125호로 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5~6세기 무렵 영산강유역에는 복암리고분군, 정촌고분, 영동리고분군 등 대형 고분이 축조되었는데, 그중 정촌고분은 1,500여 년 전 백제ㆍ마한 문화를 가장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고분이면서 도굴 피해를 보지 않아 매장의 원형을 알 수 있어 고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무덤입니다. 정촌고분 1호 석실 제3목관에서 발견된 이 금동신발은 좌우 신발 한 쌍이 거의 훼손되지 않은 채 완벽한 모습으로 출토되었으며, 특히, 발등 부분에 붙은 용머리 꾸미개(장식)는 현존 삼국 시대 금동신발 가운데 유일한 사례로 주목을 받았는데 국립나주문문화재연구소의 최근 과학적 분석 결과에 따르면 신발의 주인은 40대 여성인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이 금동신발은 형태와 제작기법, 무늬 등에서 고창 봉덕리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매우 비슷합니다. 얇은 금동판 4장으로 바닥판과 좌우 옆면판, 발목깃판을 만들어 서로 작은 못으로 연결하였고 무늬를 뚫새김(투각)해 세부를 선으로 묘사한 방식 등 고대 금속공예 기법이 잘 반영되어 있지요. 아울러 육각무

‘결혼’에 안방 자리를 내준 ‘혼인’이란 말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9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는 엉뚱한 말에 밀려 본래의 우리말이 잊혀 가는 것이 있는데 그 가운데 바로 “혼인(婚姻)”도 그 하나로 지금은 모두가 “결혼(結婚)”이란 말을 쓰고 있지요. 뭐가 문제일까요? 먼저 혼인이란 말을 살펴보면 혼(婚)은 혼인할 "혼"이기도 하지만 "아내의 친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姻)은 "사위의 집"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혼인이란 말은 아내와 사위 곧 “남녀가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結婚)”이란 말은 인(姻)이 없으므로 남자가 장가간다는 뜻만 있고 여자가 시집가는 것에 대한 의미는 없습니다. 따라서 “혼인”에 견주면 “결혼”은 남녀차별이 담긴 말이라 할 수 있지요. “혼인”이란 말뿐이 아니라 우리 겨레는 혼인하는 시각도 양을 대표하는 해와 음을 대표하는 달이 만나는 시각(해와 달은 하루에 새벽과 저녁 두 번 만난다) 가운데 저녁 시간인 유(酉)시 곧, 5시에서 7시 사이에 치렀는데 이는 음과 양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하려는 철학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함께 남녀의 짝을 배필(配匹)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酉)시에 나(己)의 짝(配)을 맞이

산중 시냇물 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9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雨後山中石澗喧(우후산중석간훤) 비 온 뒤 산중 바위틈에 시냇물 소리 요란한데 沈吟竟日獨憑軒(침음경일독빙헌) 시 읊으며 종일 홀로 난간에 기대있네 平生最厭紛囂地(평생최염분효지) 평생에 가장 싫은 것은 어지럽고 시끄러운 곳인데 惟此溪聲耳不煩(유차계성이불번) 오직 이 시냇물 소리는 귀에 거슬리지 않네 이 시는 조선 성리학의 큰 맥을 이루는 대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작품 <산중즉사(山中卽事)>로 산중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 한시입니다. 비가 온 뒤라 산속의 바위틈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요란한데, 온종일 시를 지어 읊조리며 홀로 난간에 기대어 여유로움을 즐깁니다. 회재가 평생에 가장 싫어하는 것은 어지럽고 시끄러운 곳인데, 이 시냇물 소리는 시끄러워도 귀에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회재는 이 시에서 자신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것은 사람이 부귀ㆍ공명을 얻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종 때 사림의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 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회재는 조광조의 뒤를 이어 도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퇴계 이황의 주리론에 큰 영향을 미친 조선 전기의 큰 학자입니다. 생전에는

양반과 상놈이 함께 이룬 성취, 《자산어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9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달빛이 휘엉청 밝은 밤, 초가삼간 마루에 앉아 흑산도 밤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다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정약전 선생, 영화 <자산어보>의 한 장면은 그림 같아 보이지만 실은 58년의 생애 가운데 16년이란 세월을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이어갔으며 끝내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불운의 선비입니다. 그러나 유배생활을 하면서 우리나라 첫 수산학 연구서인 《자산어보(玆山魚譜)》 등을 남긴 정약전 선생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 <자산어보>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정약전 선생은 영조 34(1758)년에 태어나 전형적인 성리학자로 문과에 급제해 병조좌랑 등의 벼슬을 살게 됩니다만 그의 운명을 갈라놓은 계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서양 학문과 천주교 등의 사상을 접하고 있던 이벽 등의 남인 인사들과의 교유를 꼽을 수 있습니다. 정약전 선생은 이벽의 권유로 《천주실의》, 《칠극》 등의 천주교 관련서적을 시작으로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예수회 신부들이 번역한 유클리드의 《기하원본》 등을 읽으면서 그간 길들어 있던 성리학을 벗어나 서양의 사상에 눈뜨게 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천주교

북벌은 실패했지만, 대동법 시행했던 효종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59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청강(淸江)에 비 듣는 소리 그 무엇이 우습건대 만산홍록(滿山紅綠)이 휘드르며 웃는구나. 두어라 춘풍(春風)이 몇 날이리 웃을 대로 웃어라. 위 한시는 조선의 제17대 임금 효종(孝宗, 1619-1659)의 칠언절구입니다. 초장에서 맑은 강물 위에 떨어지는 봄비 소리를 들으며 누군가 웃고 있다고 합니다. 중장에서 웃는 것은 온 산에 붉고 푸르게 피어나는 꽃과 잎들이라고 했습니다. 흐드러지게 피는 꽃과 잎들이 마치 사람처럼 봄비를 반기며 웃고 있다는 것이지요. 종장에서 따뜻한 봄바람이 얼마나 가겠느냐며, 꽃과 잎들이 봄날을 마음껏 즐기도록 놓아두라고 합니다. 효종의 여유 있는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효종은 병자호란이 나자 강화에 피난했다가, 이듬해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동안 억류돼 있다가 돌아왔지요. 그런데 갑작스럽게 소현세자가 죽자 세자로 책봉되어 32살(1649년)에 즉위했습니다. 효종은 오랜 볼모생활의 원한과 아버지 인조의 삼전도 치욕을 갚고자 은밀히 북벌계획을 세웠지만, 즉위한 지 9년 만인 1659년 5월 4일 죽어 중단되고 말았지요. 그러나 효종은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 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