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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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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에서 도ㆍ개ㆍ걸ㆍ윷ㆍ모가 뜻하는 것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5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동방의 풍속이 예로부터 세시를 중히 여겨 / 흰머리 할아범, 할멈들이 신이 났네 / 둥글고 모난 윷판에 동그란 이십팔 개의 점 / 정(正)과 기(奇)의 전략전술에 / 변화가 무궁무진하이 / 졸(拙)이 이기고 교(巧)가 지는 게 더더욱 놀라우니 / 강(强)이 삼키고 약(弱)이 토함도 미리 알기 어렵도다. / 늙은이가 머리를 써서 부려 볼 꾀를 다 부리고 / 가끔 다시 흘려 보다 턱이 빠지게 웃노매라.” 위는 고려말~조선초의 학자 목은 이색이 쓴 《목은고(牧隱藁)》에 나오는 시로 이웃 사람들의 윷놀이를 구경하면서 쓴 것입니다. 이 윷놀이를 할 때 던져서 나온 윷가락의 이름, 도ㆍ개ㆍ걸ㆍ윷ㆍ모는 원래가 가축의 이름을 딴 것으로 봅니다. 곧 도는 돼지를, 개는 개를, 걸은 양을, 윷은 소를, 모는 말을 가리킵니다. 특히 도는 원말이 ‘돝’이 변한 것으로 어간(語幹) 일부의 탈락형인데 돝은 돼지의 옛말로 아직도 종돈(種豚)을 ‘씨돝’이라 부르고, 돼지고기를 ‘돝고기’라고도 부릅니다. 또 윷은 소를 뜻하는데 소를 사투리로는 “슈ㆍ슛ㆍ슝ㆍ중ㆍ쇼”라고도 하는데 여기의 “슛”이 윳으로 변하였다가 윷으로 된 걸로 보입니다. 마지막

선조, 사서오경을 우리말로 뒤치라 했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5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릇 글을 풀어내는 것을 어떤 이들은 소소한 일이어서 꼭 관심을 둘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지만 성현들의 하신 말씀이 ‘글 뜻을 알지 못하고서 정밀하고 자세한 내용을 통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하였다. 지금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 한문의 한 구절 끝에 다는 토)과 뒤침(번역)은 경이 정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경의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함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사서와 오경(五經)의 구결과 뒤침을 경이 모두 자상하게 정해 놓았으니, 하나의 국(局)을 설치할 만하다.“ 위는 《선조실록》 8권, 선조 7년(1574년) 10월 10일에 있는 기록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의 임금으로서 너무 많은 오명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을 더듬어보면 다시 평가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선조가 한문의 권위가 절대적이던 시절, 지식은 모든 사람이 나눠야 한다는 생각에 위처럼 경서를 우리말로 뒤치는 일을 추진한 것입니다. 특히 선조가 경서를 우리말로 뒤치는 일을 한 것은 무엇보다도 세종이 만든 훈민정음의 격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요. 이한우가 펴낸 《조선사 진검승부》에서

조선시대 왕명으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5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이 말하기를, "승지가 술을 즐기므로 원례(院隷, 조선시대, 승정원에 딸려 있던 하인)도 취하여 액속(掖屬, 궁중의 궂은일을 맡아하던 사람)에게 모욕을 주기까지 하는데, 나라의 기강과 관계가 되므로 엄히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이에 더욱 행실이 나빠 뉘우침이 없는 사람은 볼기를 치고고 유배(流配)하였다. (가운데 줄임) 이후 형조(刑曹)로 하여금 술을 많이 빚은 자에게 볼기를 치고, 또 주등(酒燈, 술집임을 알리려고 문간에 다는 등) 키는 것을 금하였으나, 끝내 금할 수가 없었다.“ 위는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1770년) 1월 26일 자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금주령을 내리고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왕명을 내리곤 하였지만 희생당하는 건 양반이 아닌 일반 백성이었습니다. 입에 풀칠도 제대로 못 하는 백성은 술을 빚어 팔았다고 잡혀가고, 몰래 술 마셨다고 잡혀가지만 금주령이 내려진 대낮에도 양반들은 거리낌 없이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특히 이름을 날렸던 조선의 많은 유명 화가가 술에 취해야만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외눈의 자화상을 그린 호생관 최북은 눈밭에서 술에 취해 얼어 죽었다고

사백여 명의 일경과 싸운 김상옥 의사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5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102년 전(1923년) 오늘은 김상옥 의사가 천여 명의 일제 경찰을 상대로 싸우다 순국한 날입니다. 의사는 당시 일제 경찰력의 중심부이자 독립운동가 검거와 탄압의 상징이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뒤 신출귀몰한 모습으로 경찰을 따돌립니다. 그 뒤 삼판동(오늘의 후암동)에서 일전을 치른 다음 또다시 포위망을 뚫고 효제동 동지의 집에 숨었습니다. 이후 의사의 은신처를 찾은 일경은 경기도 경찰부장의 지휘 아래 시내 4개 경찰서에서 차출한 사백여 명의 무장경찰을 동원하여 1월 22일 새벽 5시 반 무렵 김 의사가 숨은 집을 겹겹이 포위하였지요. 이에 김상옥 의사는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집들의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무장결찰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조국독립의 염원을 담은 의사의 총구는 쉴 새 없이 불을 뿜었고 대한 남아의 기백을 여지없이 떨친 의사에게 일경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3시간여의 치열한 전투 끝에 10여 명의 일경을 사살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지자, 마지막 탄환이 든 권총을 머리에 대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결 순국하였지요. 당시 나이 34살이었던 김상옥 의사는 일제 경찰과 총격

조선시대 외국어 학습서, 노걸대⋅첩해신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505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어를 배우는 것은 큰 나라를 대하는 데 있어 먼저 처리해야 할 요긴한 일지만 책이 드물어 학자가 쉽게 얻어 보지 못하니, 청컨대 우선 《박통사(朴通事)》와 《노걸대(老乞大)》를 각각 1벌씩 황해도와 강원도에 나누어 보내어 판각하게 하고, 교서관(校書館)에 보내어 찍어서 널리 반포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는 《세조실록》 세조 4년(1458년) 1월 19일 기록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외교관의 한 사람인 역관이 있어서 외국과 교역하고 소통했습니다. 그리고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사역원(司譯院)에서는 4대 외국어인 중국어, 몽골어, 만주어, 일본어를 가르쳤고 외국어 학습교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조 4년 당시 외국어를 가르치는 책이 드물어 이에 대한 대책을 낸 모양입니다. 조선시대 중국어 교재는 《노걸대(老乞大)》와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가 있고, 일본어는 《첩해신어(捷解新語)》, 몽골어는 《첩해몽어(捷解蒙語)》, 《몽어노걸대(蒙語老乞大)》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노걸대의 ‘노’는 우리말의 ‘씨’, 영어로 하면 ‘미스터’쯤 되는 말이고 ‘걸대’는 몽골인이 중국인을 가리킬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