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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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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독특하고 탁월한 ‘광대’ 임진택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66]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운동’을 수행하고자 전공인 외교관의 길도, 좋은 직장인 KAL(대한항공)도 뿌리쳤으며, 전두환 군부 때인 KBS PD시절 청와대에 불려 갔을 때 면전에서 ‘국풍81’ 행사 지시를 거부했던 겁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정통성을 끝내 견지한 민족ㆍ민중예술의 귀감을 창출함으로써 세간으로부터 최초로 ‘우리 시대의 광대’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인물이다. 한국 현대 ‘창작판소리’의 독보적인 존재임은 물론 우리 시대가 낳은, 참으로 독특하고 탁월한 ‘광대(廣大)다.“ 이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우리 시대의 광대’ 임진택 소리꾼을 두고 한 말입니다. 내일 7월 13일 저녁 5시,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7 노무현시민센터 다목적홀에서는 소리꾼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50돌을 기리는 토크콘서트 <소리의 내력>이 열립니다. 임진택은 1974년 7월, 서대문구치소 감방 안에서 담시(譚詩) 운율에 맞춰 읊은 소리내력을 시작으로 김지하 시인의 담시 3부작 소리내력, 똥바다, 오적을 판소리로 작창하여 새로운 창작판소리의 시대를 열었는데 올해가 그 50돌 되는 해지요. 임진택은 소리내력, 똥바다, 오적뿐만 아니라 오월광주,

여성 전문직업인이었던 활인서의 무녀(巫女)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65]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활인서는 조선시대 도성 밖 동ㆍ서쪽에 설치하여 돌림병의 치료와 백성에 대한 구휼활동을 담당하였으며, 도성 안으로 유입되는 돌림병의 전파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동활인서는 혜화문에서 광희문으로 한 차례 장소를 이전하였으며, 서활인서는 19세기 후반까지 서소문에 있었지요. 지난 2022년 서울역사박물관은 도시 한양을 여성의 시각으로 처음 조명한 서울기획연구 9 《한양의 여성 공간》 보고서를 펴냈는데 여기에는 활인서 얘기도 들어있습니다. 나라에서는 한양도성에 거주하는 무당들을 도성에서 나가게 하거나 관리하기 위해서 무적(巫籍, 무당의 명부)에 등록한 뒤 활인서에 적절하게 배정하여 구료 업무를 맡게 하였으며, 또한 동과 서 양서(兩署) 인근에 계획된 주거공간인 무녀촌(巫女村)을 만들어 이들을 살게 하였지요. 이들이 살았던 곳에는 활인새 뒤골, 신당동(神堂洞), 무원교(巫院橋) 등이 지명이 남아있습니다. 무녀들은 활인서를 없앨 때까지 무보수로 환자들의 구료ㆍ구휼활동을 책임지고 활인서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무세(巫稅)의 형태로 상납하였는데 무녀들의 활인서 활동은 마땅히 져야 하는 부역에 응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활

세종, 공법 시행에 앞서 국민투표 하다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64]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세종실록》 47권, 세종 12년(1430) 3월 5일에 보면 "정부ㆍ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직 벼슬아치들과 각도의 벼슬아치들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세종임금이 토지에 관한 세금제도 곧 공법(貢法)을 시행하기 전 백성들에게 의견을 묻는 지금으로 말하면 국민투표를 1430년 3월 5일부터 무려 5달 동안 시행한 것입니다. 이에 호조가 공법 시행에 관한 투표의 결과를 보고했는데 17만 여명의 백성이 참여해 9만 8천여 명이 찬성하고, 7만 4천여 명이 반대했으며, 전라도와 경상도는 찬성이 많았고, 평안도나 함경도는 반대가 많았습니다. 그때 인구를 생각할 때 17만 명의 투표 참여는 노비나 여성을 빼고 거의 모든 백성이 참여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모든 정책은 백성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임금의 뜻대로 행해진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을 끔찍이 사랑했던 세종임금은 이렇게 벼슬아치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그 뜻을 묻고 그 결과에 따라 공법도 시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전화나 인터넷으로 쉽게 여론조사를 할 수 있지만, 그

일본이 약탈해 간 우리 문화유산 6만 점 넘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63]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십여 년 전 도쿄국립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오구라컬렉션(小倉 Collection)이 기증한 우리나라 문화유산들이 버젓이 전시되고 있었지요. 오구라는 1922년부터 1952년까지 조선에서 무려 1,100여 점의 문화유산을 약탈해 갔는데 이 가운데 39점은 일본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의 수준 높은 문화유산들입니다. 이 문화유산들은 오구라 사후인 1982년 그의 아들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그 가운데는 견갑형 청동기, 금관 따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름이 비슷한 ’오쿠라 컬렉션‘은 명치시대의 실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가 만든 것으로 초대총독 테라우치와 가까이 지내 부를 축적하면서 조선의 문화유산을 다량으로 약탈, 수집하여 일본 처음으로 ’오쿠라 슈코칸(大倉集古館)‘이란 개인 미술관을 만들었지요. ’오쿠라 컬렉션‘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이천 오층석탑과 평양 율리사터석탑 따위가 있습니다. 일본은 12세기부터 1868년 메이지유신 때까지 일본 정치를 지배했던 ’사무라이‘ 탓에 문화가 꽃 피울 수 없었기에 문화 콤플렉스를 가졌고, 문화유산이 돈이 된다는 생각으로 우리 문화유산을 마

가구에 조개껍데기를 오려 붙이는 <나전장>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62]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유산청의 국가무형유산 가운데는 <나전장(螺鈿匠)>이 있습니다. 나전장은 옻칠한 기물 위에 무늬가 아름다운 전복이나 조개껍질을 갈고 무늬를 오려서 옻칠로 붙이는 기술이나 그 장인을 말하는데 ‘나전칠기장’ 또는 ‘나전칠장’이라고도 부르지요. 고려시대 이래 중앙 관서에 소속되어 왕실과 조정에 필요한 나전칠기를 만들었습니다. 조선 후기부터는 나전칠기가 대중화하면서 관서에 소속되지 않은 개인 장인도 생겼습니다. 나전칠기를 만드는 과정은, 나무로 기본 틀인 백골(옻칠을 하지 않은 목기)을 짜고 그 표면을 사포로 문지르거나 틈새를 메워 고르게 한 다음 자개를 붙입니다. 그 뒤 연마, 옻칠, 그리고 광내기 과정을 거쳐 완성하지요. 자개로 무늬를 만드는 방법에는 자개를 실처럼 잘게 자른 '상사'로 기하학적인 무늬를 만드는 끊음질 기법과, 자개를 문질러 얇게 만들어 국화, 대나무, 거북이 등 각종 도안 무늬를 만드는 줄음질 기법이 있습니다. 나전 무늬는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는 모란ㆍ국화ㆍ연꽃 등의 식물무늬가, 조선 중기에는 화조(꽃과 새)ㆍ쌍학ㆍ포도ㆍ사군자 등의 무늬가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나전칠기를 만드는 데 가장

《소학》,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한글로 뒤쳐라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61]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소학(小學)》은 일상생활에 절실한 것인데도 일반 서민과 글 모르는 부녀들은 스스로 공부하기가 어렵습니다. 바라옵건대 여러 책 가운데에서 일상생활에 가장 절실한 것, 이를테면 《소학》이라든가 《열녀전(列女傳)》ㆍ《여계(女誡, 여자의 생활과 처신 등에 관한 내용이 담긴 책)》과 같은 것을 한글로 뒤쳐(번역) 인쇄, 반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위로는 궁액(宮掖, 궁에 딸린 하인)으로부터 조정의 재상집에 미치고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사람 없이 다 배우게 해서, 온 나라의 집들이 모두 바르게 되게 하소서.“ 위는 《중종실록》 28권, 중종 12년(1517) 6월 27일 기록입니다. 어린아이들 또는 유교 입문자에게 초보적인 유교 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만든 수신서(修身書,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하는 책)인 ‘소학’ 등을 한글로 뒤쳐 조정의 재상은 물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공부하여 모르는 사람 없도록 하자는 홍문관(궁중의 경서-經書와 문서 따위를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하던 관아)의 뜻에 중종은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조선은 대부분 공식 문자 생활이 한문으로 이루어졌기에 언문(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