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98년 10월 29일 가을빛이 완연한 종로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양반과 천민, 선생과 학생, 양가 부인과 기생, 선비와 승려, 갓바치, 백정 등등 금방 수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다. 앞에 단상이 놓여있다. 행사 사회를 보는 독립협회 인사가 연설자를 소개한다. 그 순간 군중들 사이에 일순간 침묵이 흐른다. 이내 ‘우와…’ 함성이 터진다. 첫 연설자로 소개된 사람, 그는 뜻밖에도 박성춘이라는 백정이 아닌가. 박성춘이 뚜벅뚜벅 단상으로 걸어가 열변을 토한다. “이 사람은 대한에서 가장 천하고 무지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뜻은 대충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나라와 인민을 이롭게 하는 길은 관과 민이 합심하여야 가능하다고 봅니다. 저 차일(遮日: 햇볕가리개)에 비유하건대 한 개의 장대로 받치면 역부족이지만 많은 장대를 합하여 받치면 그 힘이 매우 공고해집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관과 민이 합심하여 우리 대황제의 성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만만 년 이어지도록 합시다.” 청중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리고 박수가 터진다. 사회 저명인사가 아닌 천민 중의 천민인 백정이 만민 앞에 우뚝 선 것 자체가 뇌성벽력이다.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6월 어느날 궁녀들이 비밀스러운 눈빛을 주고받으며, 살금살금 깨금발을 한 채 복도를 걷고 있다. 장지문 앞에서 발을 멈춘다. 숨을 죽인 채 창호문에 구멍을 뜷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문 안에서는 고종 임금이 미군함 트렌턴호Trenton의 함장을 비롯한 사관생들을 접견하고 있다. 트렌턴호가 최초의 방미 사절인 민영익, 서광범, 변수를 뉴욕항에서 태운 후 6개월 동안의 항행 끝에 제물포항에 들어온 것은 1884년 5월 31일이었다. 그 배에는 조지 포크(George Clayton Foulk)라는 이름의 해군 소위가 동승했다. 당시 한국말을 구사하는 미국인이 천지에 오직 한 사람 있었으니 바로 조지 포크였다. 그도 그날 트렌호의 사관들과 함께 조선의 임금을 알현하고 있다. 그날의 일을 그는 7월 22일자 부모님전 상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저희가 임금을 알현할 때 궁녀들이 창호문 뒤에서 우리를 엿보려고 안달하던 광경이 재미있었답니다. 알현했던 방은 사방이 창호 문이었답니다. 일분 정도마다 '푹!' 하고 창호지가 뚫리는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구멍을 내어 엿보려는 것이지요. 머리가 영리한 여자들은 손에 침을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우리는 지난번에 ‘이유인의 말로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한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제 오로지 한가한 사람을 위하여 한가한 이야기로 한가한 의문을 풀어보고자 한다. 일제 앞잡이 일진회(一進會)가 창립될 즈음 그에 대립하는 단체가 1904년 창립되었으니 이름하여 ‘공진회(共進會)’. 나중에 ‘열사’라고 불리게 될 이준이 회장이었고 총무는 윤효정이었다. 윤효정은 1898년 일본에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 관련자 우범선을 처단하고 귀국했다. 그는 1906년 이준이 세운 헌정연구회를 기반으로 대한자강회를 조직하는 등 항일운동에 힘썼다.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라는 재미있는 책을 지었는데 여기 이야기는 그 속에 들어 있다. 잡배들의 국정 농단이 갈수록 심해지자, 공진회는 비분강개했다. 공진회는 정부에 60명의 잡배 명단을 보내면서 처벌을 요구했다. 일주일 뒤에 답장이 왔다. “60명의 명단 가운데 잡배는 하나도 없으니 그리 헤아려주기 바라노라.” 공진회 회원들이 격분했다. 깊은 밤 비밀리에 논의를 거듭한 끝에 죄가 가장 무거운 이유인 전 법무대신을 우선 잡아들이기로 했다. 이유인을 찾아가 “공진회에서 각하에게 상의드릴 일이 있으니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누가 모르는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처단했음을. 그러나 누가 아는가? 대한제국 정부가 이토 히로부미 친족에게 위로금으로 10만 환을 보냈다는 것,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죽인 것이 너무 죄송하다며 얼빠진 동포들이 ‘사죄회’를 조직했다는 것. 어떤 ‘앙실방실한’ 무당은 삼년상을 치르겠다며 자신의 집을 전당 잡혀 돈을 빌렸다는 것. ‘앙실방실’ 요망한 무당의 이름은 ‘수련’이다. 1910년 3월 1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수련이 보인다. 지금의 우리말로 옮긴다. 무당 요물 수련이는 이등박문의 영정을 굉장하게 벌여놓고 삼년상을 지낸다고 경시청에 청원한 후 어제부터 시작하여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모신다니 그 효성이 끔찍하다. 수련은 ‘봉신회(奉神會)’라는 걸 조직하여 이토 히로부미 추도회를 열기도 했다. 600여 명의 조선인 추모객이 모였다 한다. 수련이는 왜 이런 짓을 하는 것일까?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해서일까? 아니다. 오직 권력을 얻기 위해서다. 당시 권력은 일본인에게 있었으므로 그 환심을 사서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수련에는 그보다 몇 년 전에는 시해당한 명성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우리네 세상에는 소설 같은 일들이 넘실댄다. 다음 광경은 어떠한가? 1897년 어느날 필립 제이슨(Philip Jasohn)이라는, 국적은 미국이고 직업은 서양의사인 사나이가 조선의 길거리에서 신문팔이를 하고 있다. “한 장에 한 푼인 신문이오! 읽고 나면 창호지도 되고 밥상 덮는 상보도 되는 신문 한 장에 한 푼이요.”(이규태, <이규태 코너:서재필 정신>, 조선일보 1994.4월5일 5면 / 강준만의 《한국근대사 산책》 제3권 55쪽에서 재인용) 그의 한국 이름은 서재필(1864-1951)이다. 스무 살 때 불끈, 혁명(1884년 말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대역죄인이 되어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갔던 그 사람. 그가 다시 조선에 돌아와 독립문과 독립협회를 세우고 <독립신문>을 창간할 그때 고국에 혈육붙이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죄다 처형당했기에. 전라도 보성이 고향이며 미국 여자를 아내로 둔 이 의사는 자신이 창간한 <독립신문>을 지금 길거리에서 목청 높여 팔고있이다. 신문을 직접 우리의 눈으로 보기로 하자. 1899년 3월 15일(수) 자 제55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다. 기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905년 5월 22일 자 <황성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실려 있다. “지난 음력 4월 13일 아홉시 반에 여종 하나가 도망하여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아서 사방을 찾아다녔으나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까닭에 광고하노라. 그 여종의 차림은, 닳아서 구멍이 난 푸른 베옷을 걸치고 푸른 신발을 신었는데 말을 잘하며 나이는 14세라. 얼굴은 희고 흉터가 없으며 왼쪽 눈언저리에 검은 사마귀가 하나 있고 청나라 화장분을 발랐다. 혹시 이런 계집아이를 본 군자가 계시면 통기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보상은 한화 20원이며 에누리 없이 드릴 것이라. 한성 대안문 앞 안창호 알림.” 말 잘하고 얼굴이 희며 눈언저리에 검은 사마귀가 하나 있는 이 ‘계집아이’는 끝내 도주에 성공했을까? 아니면 잡히고 말았을까?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궁금하지만 기록이 없다. 1909년 5월 16일 자 <대한매일신보>에는 ‘이제 그만 갈라섭시다’라는 개인 광고가 실렸다. 갈무리하여 옮긴다. “본인은 최환석 씨의 손녀인데 열세 살에 김춘식 씨의 아들과 혼인하여 지금 4년이 되었는데, 시어머니가 누명을 씌워 모함하고자 하는 고로 견딜 수가 없어 본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