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신라 차문화는 산중의 수행에서만 꽃핀 것이 아니었다. 왕궁에도 차향이 스며 있었고, 불전에도 차연이 올랐으며, 향가의 선율 속에도 차 한 잔의 맑은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경덕왕(景德王)과 월명사(月明師)가 있다. 경덕왕은 신라 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성숙한 시대를 이끈 군주였다. 황룡사 구층목탑이 나라를 상징하고, 불교예술과 향가가 절정에 이르렀으며, 왕실은 차를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예(禮)와 공양, 그리고 덕을 나누는 문화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삼국유사》 월명사의 도솔가 (月明師兜率歌)에는 매우 중요한 기록이 전한다. 경덕왕은 월명사의 향가를 듣고 크게 감동하여 '품다(品茶) 일습(一襲)'을 내렸다고 하였다. '품다'는 문자 그대로는 차를 음미한다는 뜻이며, '일습'은 한 벌의 의복이나 예물을 가리킨다. 학자들 사이에는 차와 다구를 함께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와 차를 마시는 예를 베풀었다는 해석이 함께 존재한다.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있다. 임금이 차를 으뜸 예물 가운데 하나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는 신라 왕실에서 차가 이미 정신문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월명사는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1884년 11월 9일 밤새 삼례 주막에서 빈대들에게 뜯겼다. 밤새 비가 왔다. 아침에 일어나니 하늘에 구름이 잔뜩 걸려 있다. 이상한 날씨다. 최저 기온 섭씨 4도. 기러기가 정말 많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귓전을 맴돈다. 아침 밥을 먹고 9시 23 분 주막을 나선다. 사수강(Sac-su-gang, 오늘날의 만경강)에 9시 44분에 도착. 물살은 거세고 수심은 깊다. 가장 깊은 곳은 120cm. 11시 넘어 가리내 마을 주막(Karina chumak)을 지났다. 11시 18분 기압은 30.42, 온도는 11.6도. 전주까지는 10리 길이다. 바람은 남서풍, 차갑다. 산비탈에 많은 마을이 바라보인다. 모든 마을이 대로에서 떨어져 있고 샛길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외국인 여행자가 큰길만 가서는 마을 속을 볼 수 없다. 우리는 진흙투성이의 좁은 길을 지나 12시 10분 전주 남문에 도착했다. 성곽 안에 2,000여 채의 집이 있다. 전체 고을엔 7,000~8,000채의 집들이 있다. 비좁은 길을 지나 관아 경내로 진입한다. 크고 허름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감영에서 왔다면서 한 떼의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와 내 방으로 들어오겠다고 우긴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경제학 교수라고 해서 모두 부자는 아닙니다. 어떤 분야에 전문가라고 하더라도 현실과의 괴리감은 있게 마련이지요. 같은 의미로 조향사는 향기를 소유하지 않습니다. 가장 매혹적인 향수를 배합하는 조향사의 몸에서는 정작 아무런 향취도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향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의 냄새를 비워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팽창을 계산하고 수억 광년 떨어진 성단의 일생을 기록하는 천문학자는 그 광활한 우주를 바라보고 연구하지만 정작 발을 딛고 선 땅 위에서는 단 한 평의 정원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무한(無限)을 사유한다고 해서 그 무한이 그의 영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시인은 정작 현실에서는 지독한 고독 속에서 차가운 차 한 잔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합니다. 사랑의 본질을 언어로 빚어내기 위해 스스로 외로움이라는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富)를 연구하는 자가 부유하지 않고, 빛을 연구하는 자가 눈부시지 않듯, 가르치는 자의 위대함은 가진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세계의 깊이에 있습니다. 가르침은 기계적인 지식의 전달을 의미하는
[우리문화신문=안동립 기자] 어젯밤 캉진곰파의 기온은 영하 18°C까지 뚝 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화장실 수도관이 모두 얼어있다. 나흘째 세수를 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씻지 않은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체르고리(Tserko Ri, 4,980m) 등반팀 4명은 아침 6시 30분에 출발하고 나와 민병귀 대원은 캉진리(Kyanjin Ri, 4,700m) 등반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뒷산인 캉진리(봉)는 남향이라 골바람이 불어와 무척 차갑지만, 내리쬐는 햇살이 워낙 강렬한 직사광선이라 몸이 빠르게 더워진다. 결국, 입고 있던 두꺼운 패딩 점퍼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발 아래를 내려다보니 캉진곰파 마을이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보인다. 해발 4,100m까지 올리는 데 약 50분 정도가 걸렸다. 산으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매서워 귀마개를 해야 했다. 공기가 건조한 탓에 입술이 쩍쩍 갈라진다. 오르는 경사도가 60°에서 70° 달하는 급경사를 지그재그로 천천히 오르는데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힘이 들어 다리가 떨어지지 않는다. 수십 번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올라갔다. 산을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로 어지럽게 나 있는데, 사람이 걸어간 길은 잔돌과 자갈이 많아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매독환주(買櫝還珠)’는 상자만 사고 진주를 돌려준다는 의미입니다. 주객(主客)이 전도된 경우를 이야기하지요. 우리는 때로 눈부신 껍데기에 매료되어 그 안에 담긴 침묵의 본질을 잊곤 합니다. 한비자(韓非子)에는 매독환주(買櫝還珠)의 우화가 나옵니다. 초나라의 한 장사꾼이 진주를 팔기 위해 난초 향이 배어나는 좋은 나무로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그 상자에 금과 은으로 무늬를 새기고 장식하니, 진주보다 상자가 더 찬연히 빛났습니다. 그것을 본 정나라 사람이 값을 치르고 상자를 샀지만, 그 안의 진주를 꺼내 장사꾼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상자가 아름다워 샀을 뿐, 진주는 필요 없소."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주를 팔기 위해 상자를 꾸몄던 상인은 횡재를 하지요. 이 이야기는 비단 어리석은 정나라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은 어쩌면 수많은 매독환주로 점철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기 위해 대화를 시작하지만, 진실한 공감보다는 세련된 말투와 화려한 수식어에 집착합니다.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반지를 준비하지만, 정작 중요한 사랑의 맹세보다 보석의 크기와 상표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본질인 진주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맥아더 장군 인천항 자유공원에 서 있네 (돌) 한국을 구한 불멸의 맥장군 (심) 그 앞에서 은혜를 되새기며 (달) 늘 굳건 하리라 다짐한다네 (빛) ... 25.6.20.불한시사 합작시 인천 자유공원 언덕에 우뚝 선 맥아더 장군 동상은 단순히 한 장군의 기념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를 지켜 낸 한 사람의 결단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다. 절망의 끝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자유의 상징이며,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은 살아 있다는 역사의 증언이다.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미국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가장 뛰어난 생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그는 1903년 졸업 당시 최상위권의 성적으로 이름을 남겼고, 뛰어난 지략과 강한 책임감으로 일찍부터 군 지도자의 자질을 인정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필리핀 방어전과 남서태평양 전역을 지휘하며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였고, "I shall return(나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라는 약속을 끝내 실현하여 필리핀을 해방시켰다. 이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전후 일본의 민주화와 재건을 이끈 그의 업적은 현대사의 한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21세기에 지구가 처한 환경위기를 극복하는데, 가장 도움이 되는 종교는 무엇일까? 필자는 단연 불교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종교는 반환경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지구촌에 사는 80억 인구 가운데서 불교를 따르고 생활 속에서 불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인류는 상생(相生)과 평화(平和)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면 불교의 어떠한 요소가 친환경적인지 두 가지만 살펴보자. 불살생(不殺生) 불자가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계율이 오계(五戒)다. 오계 가운데서 첫 번째가 불살생으로 살아있는 존재를 죽이지 않는 것이다. 불살생은 자기가 직접 죽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남을 시켜 죽게 하거나 죽음을 부추기지 않는 것, 그리고 생명을 해치지 않는 태도까지 포함한다. 불살생 계율에 따라서 신도들은 가능한 범위에서 생명을 살리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불자들은 벌레를 죽이기보다 밖으로 내보내고, 방생(放生) 행사처럼 생명을 살리는 행동을 주기적으로 실천한다. 불자들은 식생활에서 가능하면 육식을 줄이고 채식을 늘린다. 불살생 계율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는 목표로 확장된다. 인
[우리문화신문=손병철 박사/시인] 한국 차문화사에서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은 가장 오래된 차 수행의 전통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두 사람은 단순히 차를 즐긴 차인이 아니라, 차를 수행과 공양의 길로 승화시킨 신라의 왕자들이었다. 최근 학계에서는 두 사람을 신문왕계 왕자일 가능성이 높은 역사적 인물로 보고 있으며, 왕위 계승 과정의 정치적 갈등 속에서 세속의 권력을 떠나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신앙을 중심으로 수행하였던 인물로 재조명하고 있다. 그들이 남긴 삶은 은둔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위한 더 깊은 기도였다. 《삼국유사》에는 두 왕자가 오대산에 각각 암자를 짓고 새벽마다 문수보살께 차를 달여 올리며(煎茶供養) 수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에서 '전차(煎茶)'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사례 가운데 하나며, 한국 불교 차문화의 출발을 보여 주는 귀중한 역사적 기록으로 평가된다. 오대산의 새벽은 언제나 맑은 안개 속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문수봉을 감싸는 운무 사이로 샘물을 길어 와 조용히 불을 지피고, 맑은 물이 끓어오르면 정성껏 차를 달여 문수보살께 올렸을 것이다. 그 차는 갈증을 풀기 위한 음료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우리문화신문=김선흥 작가] 포크는 용안(오늘날 익산시에 속함)을 방문한 다음 날 1884년 11월 9일 밤 삼례(오늘날 전북 완주군 소속) 주막에 든다. 등잔불 아래서 빈대와 벼룩과 싸우면서 이렇게 썼다. 민중의 비참상을 여실히 증언하고 있다. "전양묵(Muk)의 말에 따르면, 관리들이 백성을 불러서 돈을 요구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 백성이 돈을 내놓지 않으면 매질한다고 한다. 하눌님께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을 땐, 백성들이 종종 관아를 들이쳐서 한양으로 내쫓아 버린다고도 한다. 오늘 여정은 몹시 힘들었다. 익산(Iksan)에 도착하기 전에 심한 눈이 서너 차례 내렸다. 길이 엉망진창이었다. 가마꾼들이 참 안 됐다. 그들은 우리 일행을 용감하고 세심하게 날라 주었다. 가마꾼 일은 지독히 고되다. 그들은 맨다리를 드러낸 채 홑겹의 무명옷을 걸치고 있다. 발은 낡은 헝겊을 두른 짚신을 신고 있다. 오늘은 온도계가 섭씨 4.4도까지 내려갔는데도 알몸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이 눈에 많이 뜨였고, 맨발을 한 장정들도 수없이 많다. 오늘 나와 수일(Suil, 집사 정수일)은 위장에 통증을 느꼈다. 아마도 익산에서 먹은 떡(mochi) 때문인 듯하다. 이런 가슴의 열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옛날 사람들은 사서(四書)를 중심으로 공부에 매진하였습니다. 그 중심 내용은 나의 인격을 어떻게 가꾸어 가느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징요. 문제를 풀고 점수를 많이 얻어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것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부릅니다. 곧 자신을 위한 공부라는 뜻입니다. 세상이라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우리는 종종 길을 잃습니다. 타인의 박수갈채에 목말라하며 나를 증명하려 애쓰는 삶과, 고요한 방 안에서 묵묵히 내면의 등불을 밝히는 삶. 공자는 이 두 갈래 길을 ‘위인지학’과 ‘위기지학’이라는 정갈한 언어로 나눕니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입니다. 남이란 타인의 시선, 사회적 명성, 혹은 나를 향한 기대치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로 내면의 갈증을 채우기보다 남들에게 보여줄 화려한 스펙을 채우는데 더 많은 시간을 쏟습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비교의 잣대 위에서 스스로 불행해하기도 합니다. 마치 뿌리 깊지 않은 나무가 화려한 조화(造花)를 매달고 있는 것과 같지요. 반면 위기지학은 나를 위한 공부입니다. 이는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인간다움을 완성해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