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류리수 기자] 아침 일찍 ㅎ 선생과 함께 협곡열차(도롯코)를 타러 우나즈키(宇奈月) 협곡역으로 향했다. ㅎ 선생이 미리 열차표를 예약해 두셔서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 수 있었다. 이 지역은 깊은 협곡 지형이라 도롯코 열차의 운행구간은 해빙 시점에 따라 늘어난다. 내가 방문했을 당시에는 막 운행을 개시한 직후라 야나기바시(柳橋)까지의 10분 구간밖에 탈 수 없었다.

이 협곡철도는 그 자체로 한 세기의 역사를 지닌다. 1922년, 야나기가와라(柳河原) 발전소 건설을 위해 자재를 운반하며 시작된 철도는 이후 구로베 제2ㆍ제3 발전소 건설과 함께 연장되어 1937년에는 게야키다이라(欅平)까지 20.1km 구간으로 늘어났다. 올해 첫 운행을 알리는 전단을 보니 지역 주민들이 관광객을 환영하는 행사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도롯코를 타러 가는 내 마음은 무거운 슬픔으로 가득했다.

야나기바시까지 가는 동안 우리는 유황이 섞인 듯한 뿌연 옥빛의 우나즈키호(댐)를 지나고, 터널도 통과했다. 캄캄한 터널 속 벽면에 규칙적으로 박힌 불빛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나즈키호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두운 동굴을 지나며 이색적인 경험으로 들뜬 다른 관광객들과는 달리, 나는 고향을 떠나 이국땅 깊은 산속으로 끌려가 혹독한 노동을 했을 우리 조선인 청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열차에 나의 조상들이 몸을 싣고 깊은 산속으로 일하러 들어갔으리라. 어떤 끔찍한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갔으리라. 혹은 위험을 알면서도 가족에게 돈을 보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갔으리라. 특히 1939년 이후에는 강제로 동원된 젊은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이 열차를 타고 두려움과 신기함으로 두리번거리며 깊은 산을 향해 갔으리라. 그리고 내려올 때는 성치 않은 몸으로 또는 뿔뿔이 흩어진 조각이 되어 실려 온 이도 있으리라.
구로베 제2ㆍ제3 발전소 건설을 위해 최소 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이 열차를 타고 생지옥 같은 댐 공사장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고통을 겪고 희생되었지만(다음번 연재 6부에서 상술할 예정), 이 지역의 역사 기록인 우나즈키 쵸사(宇奈月町史), 발전소 공사를 진행했던 회사의 문서인 사토공업 100년의 발자취(佐藤工業110年のあゆみ), 구로베가와(黒部川) 전기기념관 등 어디에도 조선인에 대한 흔적은 없었다.
도롯코를 타고 구로베 협곡을 오르려면 16개의 다리를 건너게 되는데, 그중가운데 첫 번째로 지나는 붉은 색 다리 한 쌍이 나란히 있다. ‘구 야마비코 다리(旧山彦橋, 1924년)’와 ‘신 야마비코 다리(新山彦橋, 1986년)’다. 현재는 도롯코를 타고 신 야마비코 다리를 지나면서 인도로 쓰이는 구 야마비코 다리를 바라볼 수 있다. 이 가운데 구 야마비코 다리를 일본 문화심의회가 유형문화재로 등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구 야마비코 다리는 일본에서 Spandrel Braced arch bridge(아치와 상부 구조 사이를 보강재로 연결하여 구조적 안정성을 높인 아치형 다리) 형태로는 가장 오래된 철교이자 전력 개발 역사의 상징이다. 야마비코 다리에서 보이는 협곡의 사계절 풍경을 자랑하는 구로베 시민들은 이번 유형문화재 등록을 크게 반기고 있다.

한편, 이 기사를 보내온 그 지역 일본인 ㅅ 씨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함께 전했다. “구 야마비코 다리를 건너 조선인 노동자들은 깊은 산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불안과 차별 속에서 우나즈키(宇奈月) 소학교에 다녔겠죠. 이 다리가 유형문화재로 등록된다면, 그 다리 위를 지나간 조선인의 역사도 함께 밝혀야 합니다.”
ㅅ 씨는 지역의 역사에 진실을 남겨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숨겨진 기억을 드러내는 일이 일본인만의 일인 것일까?

옛 조선인의 발자취를 따라 협곡을 오르며, 나는 짧은 도롯코 열차 여행이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여정이 되기를 바랐다. 구로베 협곡 철도는 일본 근대 전력 개발의 뼈대 가운데 하나며, 동시에 ‘조선인 강제노역의 기억을 실은 선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