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조선의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자들이 아주 어린 나이일 때부터 그들을 올바르게 양육하기 위한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스승을 임명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보양청(輔養廳)과 보양관(輔養官)입니다. 보양관이 정해지면 바로 원자와의 상견례(相見禮)를 실시하였는데, 상견례는 임금의 맏아들, 원자(元子)가 보양관과 처음 인사를 나누는 행사로, 보양청에서 주관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문효세자 보양청계병> 은 정조의 첫 번째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가 1784년 1월, 두 명의 보양관과 처음으로 만나 인사하는 의식을 그린 궁중행사도입니다. 두 돌 무렵 문효세자, 스승을 만나다 보양청에서는 원자가 먹을 음식과 입을 옷, 또는 서책의 공급과 관리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원자의 나이가 약 4살이 되면 보양청은 강학청(講學廳)으로 바뀌고, 더욱 체계적인 교육과정으로 돌입하게 됩니다. 곧 《소학(小學)》, 《맹자(孟子)》 등을 배우는 본격적인 교육에 입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보양청은 왕실의 계통을 이어갈 원자의 첫 번째 보육기관이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고대 동아시아 불교조각의 걸작이자 삼국시대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국보(옛 지정번호 국보 제78호, 제83호)로 지정된 금동반가사유상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상은 높이가 약 1m에 달하며 우수한 주조기술과 조형적인 아름다움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소장품입니다. 그러나 두 작품을 빼면 삼국시대 6~7세기 때 유행한 금동반가사유상 대부분은 높이 20~30cm 정도의 소형입니다. 소형의 금동반가사유상 가운데 비현실적으로 가는 몸체에 추상적인 표현으로 눈길을 끄는 작품이 한 점 있습니다. 바로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331호)로 지정된 금동반가사유상입니다. 이 반가사유상의 가늘고 긴 신체의 비례는 초월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보살의 종교적 신성성을 더욱 배가시켜 주는 듯합니다. 사각형 받침대 위에 앉아 있는 반가사유상 이 반가사유상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10년 일본인 반도 간페[板東勘平]에게 샀습니다. 아쉽게도 제작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연화좌 아래에 다시 사각형의 넓은 받침을 둔 특이한 모습으로 인해 흔히 '방형대좌 금동반가사유상'으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반가사유상은 대부분 둥근 의자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책은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잣대인 동시에 당대의 전통을 계승하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나라의 출판, 인쇄문화는 유구한 기록문화의 전통 속에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큰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옛 책 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빛나는 인쇄 기술뿐만 아니라, 그 속에 펼쳐내고자 했던 이상과 꿈이 담겨 있습니다.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역시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중요시된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옛 책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법, 삼강오륜 사진. <행실도 십곡병풍>. 행실도는 이야기마다 그림을 넣어 글을 모르는 사람도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었으며 종종 병풍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맹자》에서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륜은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어린이, 친구 사이 관계와 같이 기본적인 인간관계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실천덕목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가리킵니다. 곧, 부모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임금과 신하 간에는 의로움이, 부부 사이에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는 종종 판을 바꾸어 다시 펴내고, 그때마다 저자는 수정과 보완을 거듭하면서 완성도를 높여갑니다. 조선시대에 책을 출판하는 일이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지만, 1459년에 세조가 편찬한 《월인석보(月印釋譜)》가 오늘날로 치면 수정, 증보로 완성도를 높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월인석보》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의 앞 두 글자 ‘월인’과, 《석보상절(釋譜詳節)》의 앞 두 글자 ‘석보’를 합하여 붙인 책 이름입니다. 그럼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은 어떤 책들일까요? 먼저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모님과 아들의 명복을 빌며 1446년에 세종의 비이자 당시 수양대군이었던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가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왕후의 명복을 비는 데는 불경을 옮겨 쓰는 것만 한 일이 없으니, 네가 석가모니의 행적을 편찬하여 번역함이 마땅하다.” 하셨습니다. 이에 수양대군은 1447년에 석가모니의 전기를 모아 《석보상절》을 펴내고 이를 막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세종께 올렸습니다. 이를 보신 세종이 《석보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소조 불상은 흙으로 빚은 부처님의 형상입니다. 원오리(元五里) 절터에서 출토된 소조 불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고구려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소조 불상의 특징 부처님의 형상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재료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흙으로 만든 부처님은 소조(塑造) 불상, 나무로 만든 부처님은 목조(木造) 불상, 돌로 만든 부처님은 석조(石造) 불상이라고 합니다, 동으로 부처님의 형상을 만들고 표면에 도금한 금동(金銅) 불상, 그리고 흙으로 부처님을 만들어 삼베[麻]로 감싼 뒤 옻칠을 하고 칠이 굳으면 다시 흙을 제거하는 건칠(乾漆) 불상도 있습니다. 이 가운데 소조 불상은 조형 재료로 점토를 사용하는데 재료의 특성상 물기가 마르면 수축하여 변형과 균열이 생기고 결국에는 부서지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약점 탓에 지금까지 완성된 형태로 전하는 소조 불상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출토 사례가 적지 않은 점을 보면 부처님 형상을 만들 때 흙을 널리 이용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흙은 우리 주변에서 비교적 손쉽게 구하는 경제적인 재료였기 때문에 소조 불상은 값싸고 빠르게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소조 불상
[우리문화신문=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수행기》는 1833년(순조33) 공청우도(公淸右道, 오늘날 충청남도) 암행어사로 활동한 황협(黃 , 1778~1856)이 남긴 보고서를 필사한 책입니다. 이 책에는 19세기 초반 공청우도 관리들의 업적과 잘못을 비롯하여 백성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 있습니다. 책 제목에서 ‘수(繡)’는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또 다른 이름인 ‘수의(繡衣)’를 뜻합니다. 제목 옆 ‘경랍(庚臘)’이라는 글씨와 책 안의 “경자년 납월 초칠일(庚子臘月初七日)”이라는 기록으로 1840년(헌종6) 무렵 편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협, 55살에 암행어사가 되다 《수행기》를 남긴 황협은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황협은 1825년(순조25) 47살에 이르러서야 문과에 급제해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공충도사(公忠都事), 홍원현감(洪原縣監),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등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지냈습니다. 1832년(순조32) 11월에는 비변사(備邊司)로부터 암행어사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추천을 받습니다. 황협은 55살인 1833년 1월 7일 임금으로부터 공청우도 암행어사로 삼는다는 봉서(封書) 1통, 어사의 임무를 적은 사목책(事目冊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단정하면서도 넉넉하게 생긴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능숙한 화원(畫員)의 솜씨로 보이는 무늬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합니다. 철화(鐵畫) 물감으로 그린 그림은 물감이 바탕흙[胎土]에 스며드는 성질 때문에 뭉그러진 부분도 있지만, 오히려 묵화(墨畫) 같은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킵니다. 한쪽 면에는 포도 넝쿨 사이에서 노니는 원숭이 한 마리가 보입니다. 조선 철화백자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입니다. 몸체가 어깨부터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가 허리부터 서서히 좁아져 바닥에서 약간 벌어진 모습의 항아리입니다. 입 부분은 곧고 낮게 만들었는데, 이와 같은 형태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만들어졌던 항아리들의 특징입니다. 철화 물감을 사용해 입 둘레에 연속적인 무늬를 장식하고, 어깨에서 허리 부분에 걸쳐 능숙한 필치로 포도와 넝쿨을 그려 넣었습니다. 원래 철화 물감은 태토에 스며드는 성질이 강한데, 이 작품의 경우 물감이 너무 많이 묻어서 포도와 잎이 엉켜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림을 그린 화원의 성숙한 필력(筆力)과 적절한 구도는 살펴볼 수 있지요. 장인(匠人)이 정성 들여 수비(水飛, 곡식의 가루나 그릇을 만드는 흙 따위를 물에 넣고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삼국시대 팔찌는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는데, 무덤에 묻힌 사람의 신분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팔찌의 재질이나 수량이 달라집니다. 왕족 무덤에서는 금, 금도금, 은으로 만든 팔찌가 같이 나올 때가 많고, 그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의 무덤에서는 은 또는 구리로 만든 팔찌가 적지 않게 확인됩니다. 특히 많은 수의 팔찌가 확인된 곳은 신라의 왕경(王京)이었던 ‘경주’로, 5~6세기 경주 곳곳에 만들어진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묘, 積石木槨墓]에서 수십 점의 팔찌가 출토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출토된 다양한 껴묻거리(부장품)를 통해 무덤에 묻힌 사람의 신분과 위계가 각기 달랐다는 데 대부분 동의합니다. 국립박물관에서 찬란한 빛을 뽐내고 있는 금관과 금제 허리띠, 금귀걸이와 금팔찌, 금반지 등은 모두 마립간(임금)과 부인, 자식 등 가족의 무덤에서 출토되었습니다. 황남대총과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금령총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무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가장 화려한 신라 목걸이, 그리고 ‘금팔찌’ 하지만 금관이 출토되지 않은 무덤에서 금팔찌가 확인된 예도 있습니다. 경주 노서리 215번지 무덤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일제강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1903년 겨울, 해가 어느덧 산 너머로 넘어가는 밤 충청북도 회인(懷仁, 지금의 보은 일대)에 살던 부자(富者) 정인원은 자기 집 사랑채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멀리서 보기엔 그저 평안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종잇장 하나를 들고 벌벌 떨고 있군요. 무엇이 그를 이렇게 떨게 했을까요. 일렁이는 호롱불 아래, 종잇장에 적힌 한글이 언뜻언뜻 드러납니다. 이를 읽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정인원의 어깨너머로 그 글을 읽어봅시다. 지금은 읽기도 힘든 옛한글입니다. 번역을 해보면, “활빈당(活貧黨) 발령(發令). 이상 발령하는 일은 전일에 전(錢) 5천 냥을 보내라 하였더니, 3백 냥만 보내니 괘씸한 마음을 어디에 다 말하랴 … 명령을 내니 이번에도 따르지 않으면 조금도 사정을 두지 않을 것이로다.”라는 내용이네요. 허! 그냥 글이 아니었습니다. 홍길동(洪吉童)이 만들었던 도적 집단, 활빈당의 협박장입니다. 그러니 정인원이 이렇게 떨 수밖에요. 종이 위에 크게 박힌 화살 모양 수결(手決)이 그에겐 퍽 섬뜩했을 겁니다. 아니 그런데 잠깐, 활빈당은 고소설 《홍길동전》에 나오는 가상의 존재 아니었던가요? 한데 20세기로 접
[우리문화신문=한성훈 기자] 새로운 종교가 한 사회에 처음 발을 내디딜 때 새로운 신(神)의 형상도 함께 전해집니다. 이 땅에는 없었던 얼굴과 옷을 입은 낯선 존재들의 모습이 상으로 만들어지고 사람들의 숭배를 받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낯선 신들은 신성하지만 친근하고 낯익은 존재로 바뀌어 갑니다. 우리나라에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삼국시대의 일입니다. 세 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이 새로운 종교는 이내 사람들의 마음과 삶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최초의 사원이 세워지고 승려들이 등장했으며 새로운 사상과 이국적인 모습을 한 신(神)들이 사람들의 의지처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신자들이 보았던 부처와 보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이 글에서 소개하는 보물(옛 지정번호 보물 제333호) 금동보살입상은 지금까지 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보살상 가운데 하나로, 우리나라 불교 조각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상입니다. 또한 1,500여 년 전 이 땅의 불교 신자들을 떠올리기에 아주 적절한 소재이기도 합니다. 삼국시대 초기 불교 조각의 모습을 보여주는 보살상 이 상을 보았을 때 어떤 점이 가장 인상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