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어린 단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1453년, 궁궐 안에는 ‘중비’라는 궁녀가 살았다. 중비는 별감인 ‘부귀’를 좋아했다. 하지만, 궁녀는 임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하면 큰 벌을 받았다. 중비는 몰래 한글로 편지를 써서 부귀에게 자기 마음을 전했다. 부귀도 한글로 답장을 써서 사랑하는 마음을 전했다. 두 사람은 서로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싹틔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궁궐 안에 소문이 퍼지고 들통이 나고 말았다. 중비와 부귀는 곤장을 맞고 궁궐 밖으로 쫓겨나 평생 노비로 살았다. 비록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 한글 연애편지 사건으로 당시 한글이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으며 일상생활에서 한글을 친숙하게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The Unknown Court Lady’s Hangeul Letter: The Seed of Hangeul’s Spread [Women and Events That Shined a Light on Hangul] Par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산책로에서 만나게 된 월하의 시조(時調)가락”이라는 제목으로 정가의 명인, 김월하 여사가 시조와 만나게 된 인연, 그리고 동호인들을 통해 정가계의 대가들을 만나게 된 배경을 소개하였다.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삯바느질 일을 하다가 위궤양을 앓게 되었고, 위기는 넘겼으나, 후유증에 시달렸다는 이야기, 그래서 매일 새벽, <구덕수원지>에 올라, 새벽 운동을 하며 시조창 동호인들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들을 통해 당대 유명한 사범들을 만나게 되었고, 이들과 사제의 연을 맺게 되었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랬다. 당시, 30대 중반의 월하 여사는 피난민이자, 환자였고, 매일 새벽 산책길에 나서며 동호인들과 만났다. 또한 그들을 통해 시조창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정가(正歌)의 대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에게 배움을 계속할 수 있도록 기회가 마련되었기에 훗날 그가 으뜸 명인 자리(예능보유자, 속칭 인간문화재)까지 오를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은 전혀 계획되고, 준비되었던 결과가 아니었다. 모든 결과는 결코 우연이 아니었지만, 그가 노력한 결과는 인정되어야 했고, 그 위에 본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찜통더위 여전히 한창인데 도둑같이 찾아온 입추(立秋). 여름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가까스로 마련되는 가을의 거점. 위는 정연복 시인의 <한여름의 입추>라는 시 일부입니다. 시인은 “찜통더위 여전히 한창인데 도둑같이 찾아온 입추(立秋).”라고 노래합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13번째 입추(立秋)로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날입니다. 해가 지나가는 길인 황경(黃經)이 135°에 도달하는 때지요.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종요로운 때이므로 비가 내리지 않고 맑은 날씨가 이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조선시대 조정에서는 입추가 지난 뒤 비가 5일 이상 계속되면 비가 멎기를 바라는 기청제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지금 한반도는 비가 오기는커녕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불볕더위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위 시 <한여름의 입추> 뒷부분에는 “여름의 끝 아직 저만치 있어도, 가을 또한 첫발을 내디뎠으니. 익을 대로 푹 익어버린 한여름 속에, 머잖아 아기같이 가을은 생겨나리.”라고 언어의 농축을 합니다. 지금 불볕더위기 기승을 부려 열대야로 몸살을 앓고 온열환자가 목숨을 잃는 일이 잦지만, 입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본격적인 여름을 맞아 전통사회 사람들이 고된 일상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을 쉬었던 다양한 방식을 소개한다. 오늘날과 같은 연차 휴가는 아니었지만, 관료에게는 제도화된 휴일과 휴가가 있었고, 선비는 독서와 교유로 몸과 마음을 다스렸다. 농민들은 농사일이 한고비를 넘으면 호미를 씻어 걸어 두고 마을 사람들과 음식을 나누며 쉬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쇄미록(瑣尾錄)》과 《해주일록(海洲日錄)》에는 무더위와 고된 노동 속에서 잠시 일손을 놓고 재충전했던 옛사람들의 모습이 남아 있다. 관료에게도 휴일과 휴가가 있었다 신라시대에도 관인의 휴일과 휴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려시대에는 더욱 구체적인 규정이 마련됐다. 고려의 관인들은 매월 1일ㆍ8일ㆍ15일ㆍ23일, 대략 7일마다 하루씩 쉬는 ‘칠가(七暇)’를 누렸다. 자신이 병들거나 부모를 간병할 때, 멀리서 사는 부모를 찾아뵙거나 부모의 묘를 돌볼 때에도 휴가를 받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혼례ㆍ상례ㆍ제사ㆍ질병ㆍ부모 봉양 등을 위한 ‘급가(給暇)’가 운영됐다. 세종은 젊고 재능 있는 문관들이 공무에서 벗어나 독서에 전념하도록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
[우리문화신문=김슬옹 김슬옹 문학박사ㆍ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정의 공주는 세종과 소헌 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다. 어릴 적부터 지혜롭고 총명해서 사랑을 듬뿍 받았다. 세종은 1443년 《훈민정음》창제 전까지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알리지 않고 홀로 새 문자를 만들어야 했다. 당시 사대부 양반들에게 중국 한자가 아닌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쓰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혼자 생각하고 연구할 수는 없었다. 비밀리에 소리와 문자 연구를 하면서 늘 가까이했던 자식들과 신하들의 간접 도움을 받았다. 그 가운데서도 정의 공주는 시집을 간 뒤에도 궁궐 밖에 살면서 소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버지 세종을 닮아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었고 실록에 사관이 기록에 남길 만큼 수학과 천문에 밝아, 세종이 문자를 연구하다 막힐 때면 함께 토론하고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 Princess Jeongui Helps Her Father,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젊은 가객, 김윤서와 월하 여사가 <손녀딸과 할머니>로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기 위해 당시 5살이었던 김윤서 어린이를 마주하면서 아마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경기도 고양군(현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 보광동)에서 5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났고, 2살 되던 해에 유행병으로 할머니, 어머니, 두 오빠 등, 가족 4인을 잃고 고아가 되었으며, 이모 댁에서 종로구 사간동 유씨 부인의 수양딸로 들어가 <유정환>이란 이름으로 살다가 자신의 이름이 <김덕순>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사실, 16살에 혼인하였으나, 6, 25사변으로 남편과 생이별했다는 아픈 이야기 등을 이야기하였다. 우리의 아픈 역사, 6.25 전쟁은 밀고 밀리는 남과 북의 불행한 동족싸움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北進), 압록강 부근까지 진격하여 남쪽의 승리를 굳히는 듯했지만, 해가 바뀐 1월 4일, 중공군이 가세하여 인해(人海)전술로 밀고 내려온 것이다. 그 공세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까지 내주게 되는, 그래서 그 추운 겨울, 어쩔 수 없이 후퇴하게 되는 상황을 일러 <1·
[우리문화신문=김슬옹 문학박사ㆍ세종국어문화원 원장] 소헌 왕후는 열네 살이 되던 1408년에 당시 충녕대군이었던 세종과 혼례를 올렸다. 금실이 좋아 8남 2녀를 낳았고 많은 후궁과 그들의 자녀들까지 돌봐야 했지만, 세종이 한글 창제를 비롯한 나라 운영에만 신경 쓸 수 있도록 내조를 잘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가 누명을 써서 사약을 받아 죽고 광평대군과 평원대군까지 먼저 떠나보낸 뒤 자리에 몸져눕더니 《훈민정음》 해례본 반포 6달 전인 1446년 3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종은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에게 아내의 명복을 빌고 어려운 불경을 쉬운 한글로 옮겨 부처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엮은 한글 불경책 《석보상절》을 펴내게 한 뒤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손수 펴냈다. 소헌 왕후의 안타까운 죽음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조선시대에 불경책을 펴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사대부들의 반발을 잠재우는 구실을 하였다. --------------------------------------------------------------------------------------------- Publishing Seokbosangjeol and Wori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가곡 달꽃을 피우다” 발표 무대에서 <계면, 중거-中擧>, “산촌에 밤이 드니”를 불러 객석의 공감을 얻은 김윤서 가객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 노래 역시, 이수대엽에서 파생된 곡이고, <중거>라는 이름은 ‘초장(初章) 중간 부분을 높게 들어 올린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허리 드는 잦은한잎>, 또는 <중허리>라고 부른다는 점, 그 이름에서 잦은=삭(數), 한=대(大), 잎=엽(葉)을 뜻한다는 점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이 노래는 산촌(山村)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개 짖는 소리를 통해, 견공(犬公)과 함께 하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의 풍류를 떠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 이 곡은 여창의 맑고, 높은 속 소리로 이어감으로써 현대사회에 엉켜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준다는 이야기, 그리고 김윤서와 월하 여사는 사제(師弟)관계이기도 하지만, 그가 5살 때, 월하 선생과 가족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그 뒤의 이야기로 이어간다. 당시, 김윤서는 처음 월하 선생을 뵈었을 때, “너무도 곱고 밝으셔서 할머니를 보고, 따라갔다”라는 추억담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무더위의 한가운데인 중복(中伏)입니다. 여기서 ‘복(伏)’ 자는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있는 모양으로, 가을철의 금(金) 기운이 땅으로 내려오다가 아직 더운 여름 기운이 강하기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복종한다’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이 복날을 '서기제복'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서기제복에서 '복(伏)'은 꺾는다는 뜻으로 써서 복날은 더위를 피하는 피서가 아니라 정복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중복은 삼복의 둘째 날인데 하지 뒤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初伏), 넷째 경일을 중복(中伏), 입추 뒤 첫 경일을 말복(末伏)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또는 삼복이라 합니다. 천간(天干: 갑-甲ㆍ을-乙ㆍ병-丙ㆍ정-丁ㆍ무-戊ㆍ기-己ㆍ경-庚ㆍ신-辛ㆍ임-壬ㆍ계-癸) 가운데 ‘경(庚)’이 들어간 경일을 복날로 삼은 까닭은, 경(庚)이 계절로 가을을 상징하는데 이날을 복날로 정해 더위를 극복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복날은 열흘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립니다. 그러나 올해처럼 해에 따라서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걸리기도 하는데, 이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두째인 대서(大署)입니다. 이때는 대개 중복(中伏) 무렵으로, 올해는 아직 장마가 끝나지 않아 사람들은 무더위(물+더위)로 고생합니다. 장마 때의 이 후텁지근한 더위를 우리는 무더위 말고 찜통더위 또는 가마솥더위라고도 하지요. 그런데 장마가 지나면 습도가 낮은데 더위가 몹시 심해 이를 된더위, 마른 더위, 강더위라고 하며, 더 심해지면 불더위, 불볕더위가 됩니다. “염소 뿔도 녹는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더위가 가장 심한 때죠. “쇠를 녹일 불볕더위에 땀이 마르지 않으니 가슴 헤치고 맨머리로 소나무 난간에 앉았노라. 옥경의 신선 벗이 나를 지성스레 생각해 주어 맑은 바람 한 줄기를 나누어 보내주었구려” 이 시에서 불볕더위가 쇠를 녹인다는 말은 한여름 더위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1940년에 펴낸 옥담 김위원(玉淡 金偉洹, 1864-1925)의 시문집 《옥담고(玉淡稿)》에 나오는 한시 ‘부채선물에 화답’입니다. 조선시대 옷을 훌훌 벗어 던질 수 없었던 선비들은 냇가에서 발을 담그는 탁족(濯足)을 하거나 소나무 그늘이 진 정자에서 솔바람 맞으며 시를 읊는 것으로 더위를 피하기도 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