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춘천시립국악단》의 연주회 평가와 관련하여 단원의 증원 문제, 공연의 홍보와 프로그램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춘천시청과 춘천의 문화예술인, 악단의 관계자, 그리고 국악을 사랑하는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예로부터 춘천은 강원도의 중심 도시이면서 특히 산수(山水)의 경관이 빼어나서 많은 사람이 발걸음 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호반의 도시로 유명하다. 이 도시의 역사적 배경을 인터넷 자료나 향토 연구자들이 남긴 결과물들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지역은 본래 고대 부족 국가인 맥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그 뒤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대로 점령하게 되는데, 백제시기에는 주양(走壤), 고구려때에는 수추성(須鄒城), 신라가 점령하던 시기에는 우수주, 수약주(首若州), 삭주(朔州), 광해주(光海州)등으로 부르다가 고려시대에 와서 춘주(春州),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현재와 같은 춘천(春川)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각 도(道)의 으뜸 행정관청을 감영(監營)이라 불렀는데, 그 우두머리 관찰사(觀察使)가 업무를 보던 곳이어서 관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번역한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5년의 노력 끝에 펴낸 류리수 박사가 며칠 전 글을 보내왔다. 류리수 박사는 최근 일본 외상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전에 한국문학지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시 몇편과 해설이 실린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글의 내용을 읽고 보니 필자 혼자 보기 아까워 5회의 연재로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빈다. (연재 글은 류리수 박사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임) - 기자의 말- " 한국정부는 일제에 강제 동원되었던 할머니의 배상금을 자국기업의 돈으로 지불하겠다는 해법을 내놓았고, 사흘 뒤 일본외상은 ‘강제노동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미 지난해 여름 일본 후생성은 할머니의 통장에 친절(?)하게도 후생성 탈퇴연금 ‘99엔’을 송금했었다. 공부시켜준다고 속이다가 마침내 협박당하여 어쩔 수 없이 일본의 군수공장에서 일해야만 했던 양금덕 어린 소녀는 잠 못 자고 굶주리며 일해야만 했다. 고통은 그때만으로 끝나지 않고 결혼생활에 멍에가 되어 여성으로서 지독히도 불행하게 평생을 살아야만 했다. 한국정부의 해법에도 일본외상의 주장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1123년 서긍(徐兢, 태어나고 죽은 때 모름)은 송 휘종이 파견한 국신사 일행 가운데 한 명으로 한 달 남짓 고려에 머물면서 공식일정을 수행하였습니다. 이때 고려의 여러 곳을 둘러보고 그에 대한 면모를 기록한 것이 바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입니다. 이 책의 그릇 부분에는 고려의 다양한 그릇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특히 ‘도로조(陶爐條)’의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산예출향도 비색이다. 위에는 짐승이 웅크리고 있고 아래에는 봉오리가 벌어진 연꽃무늬가 떠받치고 있다. 여러 그릇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 그 나머지는 월요의 옛날 비색이나 여주에서 요즘 생산되는 도자기와 대체로 비슷하다.” 위의 내용은 고려시대 도자공예의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습니다. ‘산예출향(狻掜出香)'은 사자가 장식된 향로를 말하는데, 당시 서긍은 연화형(蓮花形) 향로 뚜껑 위에 사자가 장식된 것을 보고 이처럼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색은 비색(翡色)이며 매우 뛰어난 솜씨로 만들어졌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위 기록에 맞는 가장 비슷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청자 사자장식 향로‘입니다. 이 향로는 뚜껑…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서울, 경기지방의 <본조 아리랑>은 1896년, 헐버트(Hulbert)가 채보한 <구아리랑>을 고쳐 만든 아리랑이라는 이야기, 또한 <긴 아리랑>은 <본조아리랑>이나 <구아리랑>과는 노랫말, 가락, 장단형, 빠르기, 분위기 등이 서로 다르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번 주 이야기는 춘천시립국악단의 발전 가능성이 기대된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경기 및 서도 지방의 전통 민요를 전공하고 있는 소리꾼들은 여러 지역의 다양한 소리를 잘 부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편이다. 마치 한국어를 전공했다고 해서 각 지역의 언어, 예를 들면 경상도나 전라도 지역의 고유한 언어, 또는 충청도나 강원도, 제주도의 독특한 지방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각 지방의 고유한 언어가 익숙해질 수 없는 경우처럼, 민요창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래서 발성법이나 표현법, 시김새의 처리 등등이 서로 다르기에 전공 분야 외에 소리는 제대로 잘 부르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곧 경기소리에 능한 사람이 서도소리를 제대로 부르기 어려운 법이고, 서도소리를 잘하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시즈오카현 이즈반도(伊豆半島)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어제 라인(한국의 카톡처럼 일본인들이 주로 쓰는 것)이 하나 날라왔다. 30년 지기인 이 친구는 이삼일 걸러 소소한 일상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내오기도 하고 어제처럼 ‘한국과 관련된 뉴스’를 보내오기도 한다. 열어보니 ‘한국의 오마카세 열풍’이라는 주제의 뉴스였다. 요점은 “일본에서는 보통 음식점인데 한국에서는 고급음식으로 둔갑(?) 되었고 특히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며 값도 비싼 음식점”이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에서 고급음식점(?)으로 통하고 있다는 ‘오카마세’의 어원을 살펴보자. 이 말은 원래 마카세루 (任せる·委せる: まかせる)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1.(추세에) 맡기다 2.(있는) 대로 …하다 3.(일 등을 남에게) 맡기다 4.일임하다" 라는 뜻을 지닌다. 이 말이 ‘오마카세(おまかせ)’ 라는 명사화가 되어버리면 일본에서는 재미난 뜻이 된다. 야후제팬 검색창에 일본어로 ‘おまかせ(오마카세)’를 입력해보니, 빵봉지, 팬티 셋트 등 다양한 이미지가 뜬다. 이 사진에서 ‘오마카세’는 ‘마음대로 골라 담기’라고 봐야한다. 한국에서 처럼 유행하는 음식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호패(戶牌ㆍ號牌)는 조선시대 16살 이상의 남성들이 차고 다니던 신분증으로 조선시대 전시실의 필수 전시품이기도 합니다. 호패법은 1413년(태종 13)에 처음 제정되었으나 시행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호패는 호구(戶口)를 파악하여 각종 국역(國役)을 부과하기 위해 발급하는 것이었기에 역을 부담해야 하는 양인(良人)의 반발이 컸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사회 제도를 재정비했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대에 이르러서야 호패제가 지속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습니다. 신분에 따라 재질과 수록 정보가 다른 호패 신분제 사회인 조선시대에는 신분에 따라 호패 재질도 달랐습니다. 2품 이상의 관리는 상아로 만든 아패(牙牌)를, 3품관 이하 관리는 뿔로 만든 각패(角牌)를, 그 이하의 양인은 나무패를 착용했습니다. 재질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정보도 달랐습니다. 착용자의 성명, 출생 연도, 제작 시기, 관(官)이 찍은 낙인(烙印)은 공통 요소이나, 상아ㆍ각패에는 나무 호패에 있는 신분과 거주지 정보가 없고 대신 과거 합격 시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패와 각패에는 신분증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주지 정보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문화신문=김광옥 수원대학교 명예교수] 박은, 설순, 신석조 세종시대의 인물을 살피고 있는데 세종을 도와 세종르네상스를 만든 인물은 많겠지만 그간 다루어 온 주요 인물 이외 몇몇 신료들을 요약ㆍ정리해 본다. 박은(朴訔 공민왕 19년 1370~ 세종 4년 1422) 고려 말부터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난 지 여섯 살 때 부모가 모두 돌아가 외롭게 자랐다. 태상왕이 임금이 되기 전에, 은은 본래부터 태상왕에게 마음을 바치고 있었으므로, 어느 날 편지를 올려서 말하기를, "각하가 보통 사람으로 대접하지 아니하니, 내 어이 보통 사람과 같이 보답하리오. 이미 각하를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마땅히 각하를 위하여 몸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이제..., 나라와 존망(存亡)을 같이할 것이니, 죽고 사는 것을 각하에게 바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 아니요, 노둔한 자질을 밝을 때 다 바치는 것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세종실록》 4/5/9) · 용서하는 넒은 마음의 소유자 태조 6년(1397)에 사헌 시사(司憲侍史)에 임명되었는데, 계림 부윤(鷄林府尹) 유양(柳亮)이 일찍이 어떠한 일을 가지고 은을 욕하였다. 은이 굴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만일…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춘천 시립국악단》 상임 단원들이 부른 <금강산타령>에 관한 이야기로 이 노래는 6박의 도드리장단에 맞추어 부르며 서울의 긴잡가 형태의 좌창이란 점, 끝 절에서 <노랫가락>으로 이어간다는 점, 일제시대에 최정식 명창이 지어 불렀으며 금강산의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번주에는 최은영, 박희린, 이현진, 왕희림 등, 4인의 젊은 단원들이 부른 <긴 아리랑> 외 흥겨운 경기민요창이 이날 밤, 거의 절정의 시간이었으며 특히 <긴 아리랑>의 구슬픈 가락은 이날의 압권이었다. <긴 아리랑>이란 어떤 노래인가? 대부분 아리랑은 그 제목 앞에 지역 이름이 붙는다. 예를 들어,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등이 그러하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로 진행되는 서울, 경기지방의 아리랑이 그러하다. 서울이나 경기지방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는 아리랑을 우리는 <본조 아리랑>, 줄여서 <아리랑>이라 부른다. 이 노래는 1896년, 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
[우리문화신문= 이윤옥 기자] 3월 3일인 어제, 일본은 “히나마츠리” 날이었다. “히나마츠리(ひな祭り)” 란 여자아이가 있는 집안에서 장차 딸에게 닥칠 나쁜 액운을 덜기 위해 시작한 인형 장식 풍습으로 이때 쓰는 인형을 “히나인형(ひな人形)”이라 한다. 히나마츠리를 다른 말로 “모모노셋쿠(桃の節句)” 곧 “복숭아꽃 잔치”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복숭아꽃이 필 무렵의 행사를 뜻하는 것으로 예전에는 히나마츠리를 음력 3월 3일날이었지만 지금은 양력으로 치룬다. 히나마츠리 열기가 얼마나 큰지 거리에는 붉은색의 히나인형을 파는 곳이 많을뿐더러 크리스마스카드처럼 히나 카드도 인기다. 히나인형은 3월 3일 이전에 집안에 장식해 두었다가 3월 3일을 넘기지 않고 치우는 게 보통이다. 따라서 히나인형 판매의 절정은 2월 한 달이다. 이때 일본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일본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히나인형 판매 경쟁을 보게 될 것이다. 원래 히나인형은 집안에 손녀가 태어나면 할머니들이 선물하는데 히나마츠리 날에도 선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히나인형은 가지고 노는 인형이 아니라 집안에 장식해 놓는 인형이라 도쿄처럼 집이 좁은 곳에서는 보통 2단짜리 히나인형을 장식한다. 하지만 집이…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춘천 시립국악단의 류지선, 최은영, 박희린, 이현진, 왕희림 등 5명의 출연자가 합창으로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불렀다고 이야기하였다. 관동의 8경이란 총석정(叢石亭), 삼일포(三日浦), 청간정(淸澗亭), 낙산사(洛山寺), 경포대(鏡浦臺) 죽서루(竹西樓), 망양정(望洋亭), 그리고 월송정(越松亭) 또는 시중대(侍中臺)로 박헌봉이 가사를 짓고, 벽파 이창배가 서도(西道)식 창법으로 곡을 지어 세상에 내놓았으나, 이 노래는 생각 밖으로 세상에 널리 확산하지 못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창단 두 번째 정기공연의 시작은 <관동의 팔경>, 곧 강원도의 소리로 시작했다는 점이 참신하다. 또한 거의 단절된 노래를 찾아 단아하게 연출했다는 그 자체로도 공연의 성공은 이미 예고되었다. 이 노래는 가사의 내용이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을 뿐 아니라, 곡조 또한 특유의 창법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를 배운 소리꾼들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고, 그들의 공개 발표회에 이 노래를 포함하지 않아 아쉽게 생각해 오던 차였다. 그런데 이번에 춘천시립 국악단 이유라 감독의 지도와 연출로 무대에 올리게 되어 여간 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