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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뭐꼬의 장편소설 <꿈속에서 미녀와>

오르가즘에 대한 라즈니쉬의 설명은 글쎄

이뭐꼬의 장편소설 <꿈속에서 미녀와> 36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K 교수는 홍신자 씨가 1993년에 쓴 <푸나의 추억>이라는 책을 읽어 보았느냐고 미스 K에게 물어보았다. 그런 책은 읽어 보지 않았다고 한다.


 

 

푸나는 홍신자씨가 인도의 명상 철학자 라즈니쉬의 제자가 되어 머물렀던 도시 이름이다. 푸나는 인도의 서쪽 해안 도시 봄베이(1995년에 뭄바이로 이름이 바뀜) 근처에 있는데, 구글 지도에는 도시 이름이 푸네(Pune)로 표기되어 있다. K 교수는 <푸나의 추억> 책에 나온다고 말하면서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불교의 한 지파로서 탄트라(tantra)가 있다. 우리말로는 밀교(密敎)라고 번역된 탄트라는 절대자인 신(神)은 남성 원리를 나타내는 쉬바(shiva)와 여성 원리를 나타내는 샥티(shakti)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쉬바는 순수한 존재로서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진 로고스(logos)라고 볼 수 있다. 샥티는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에너지이며 자기실현의 기쁨과 사랑을 나타내는 에로스(eros)라고 볼 수 있다. 서양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쉬바와 샥티는 이성과 감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절대자인 신이 양과 음의 양면성을 가졌다고 보면 된다.

 

탄트라 불교에서 우리가 ‘깨닫는다‘는 것은 양면성을 가진 절대자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탄트라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감성 또는 음에 대해서, 더욱 구체적으로는 성(性)에 대해서 매우 긍정적이다. 밀교에서는 삼밀(三密)을 통해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삼밀이란 신(身), 구(口), 의(意)를 말하며 수행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의밀(意密)은 만다라로 나타내고, 구밀(口密)은 만트라로 나타내며 신밀(身密)은 성교(性交)라는 양성의 결합의식을 말한다.

 

성교를 의미하는 신밀은 기독교 또는 유교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도덕적인 논란까지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밀교에서 말하는 성(性)은 내가 우주의 근원에 합일하는 통로로서 신성한 종교의식이라고 간주한다. <푸나의 추억> 책에서 라즈니쉬는 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많은 구도자들은 성이라는 말 자체를 입에 담는 것조차도 불순한 것으로 여겨 꺼린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수행자가 되는 조건으로 금욕을 요구한다. 그러나 냉정히 뒤집어 보면 그들은 성을 죄악시하고 거부하지만, 그들의 내면에서는 성의 환상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성의 환상을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가고 있을 뿐이다. 성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데 그것이 없다고 억지로 우기면 결과는 우스꽝스러운 위선이 되고 만다.

 

나를 두고 사람들은 성의 지지자요, 성의 장려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성의 가장 큰 적이다. 왜냐하면, 나는 궁극적으로 모든 인간이 성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을 바라는 사람, 모든 인간이 더는 성이 필요하지 않은 상태에 이르기를 바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가는 과정에서 성을 죄악시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금욕을 반대하는 것이다.

 

근대에 이르러서까지도 서양의 모든 여자들은 발끝까지 뒤덮는 긴 치맛자락으로 길바닥의 먼지를 쓸며 다녔다. 어쩌다 그들의 발가락이라도 보일라 치면, 거리의 남자들은 춘정을 느껴 추파를 던지곤 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성을 은폐할수록 우리는 그것에 필요 이상의 매력을 부여하는 셈이 된다. 성을 덮어둘수록 우리는 그것 때문에 병적인 상태로 치닫게 된다. 성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은폐하고 덮어두었던 그것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그것을 밝고 환한 곳으로 불러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 단계다.

 

라즈니쉬는 탄트라의 개념을 이야기하면서 성교의 절정 단계를 의미하는 오르가즘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설명한다.

 

오르가즘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정상의 오르가즘이다. 이것은 재채기를 하듯 생리적인 발산을 위하여 절정으로 몰아쳐 가기만 한다. 그러나 흥분의 절정에 도달하고 나면 더 이상의 차원으로 고양되어 나아갈 수가 없다. 에너지는 사라지고 이완감 속으로 도피하는 것으로 끝나 버린다. 성교라고 하면 누구나 흥분된 상태에서의 행위를 연상하는데, 탄트라에서는 흥분 상태에서 성행위를 하게 되면 에너지를 빼앗기게 된다고 본다.

 

탄트라에서는 다른 유형의 오르가즘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은 계곡의 오르가즘이다. 계곡의 오르가즘은 성을 나누는 두 사람이 절정을 향해 올라가지 않고 존재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오르가즘이다. 이러한 오르가즘은 안정되고, 집중되고, 고요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계곡의 오르가즘에서 우리는 몸과 정신에 일어나는 연금술적인 작용을 체험할 수 있다.

 

에너지의 사출 없이 몇 시간이고 결합된 상태로 머물면서 두 사람은 깊은 포옹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 때에 성은 정신적인 것으로 승화되며, 깊고 조용한 교섭이 두 육체 사이에서 발생한다. 계곡의 오르가즘에 도달하게 되면 신비의 세계가 하나씩 열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무아의 상태, 시간이 정지해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마침내 우주적인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의 수도자들이 추구하는 신비한 체험인 것이다.

 

오르가즘에 대한 라즈니쉬의 설명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궤변 같기도 하다. 계곡의 오르가즘을 체험한 사람이 있을까? 사정하지 않고 결합된 상태로 몇 시간을 버틸 수가 있을까? 라즈니쉬의 이론은 사이비 종교의 냄새가 나기도 한다.

 

<푸나의 추억>을 읽어 보면, 홍신자 씨는 인도에서 알게 된 한 청년과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녀가 책방을 드나들면서 알게 된 한 청년이 있었다. 그는 서점에서 일하는 성실하고 진지한 청년이었는데, 탄트라에 관심이 많았다.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친해졌는데, 그는 어느 날 그녀에게 질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이하는 <푸나의 추억>에 나오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다.

 

“나는 당신과 더불어 라즈니쉬가 얘기하는 성을 통한 의식의 팽창, 곧 탄트라를 체험해 보고 싶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의 질문은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그의 의도를 짐작해 보려고 애썼다. 저토록 순결하고 종교적인 구도의 길에 온몸을 바친 사람이 왜 이런 당돌한 질문을 하는 것일까? 그러나 따귀라도 한 대 맞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태도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서 있는 그를 보자, 이것도 구도자로서의 새로운 경지의 체험을 바라는 순수한 의도에서 나온 질문이라는 신뢰가 갔다.

 

만일 그에게 다른 저의가 있었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거절의 기회를 주는 이런 식의 질문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는 태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글쎄, 경험이 없어 망설여지긴 하지만, 나도 그것을 체험해 보고 싶군요.” 나의 대답이 떨어지자, 그때까지 잔뜩 긴장해서 서 있던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사실 나도 이런 질문이 어떤 험악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인도에서 내가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여성은 당신밖에 없었어요.”

 

(계속)